[기자수첩] 영화 '화녀'로 보는 스승의 고마움

이희승 기자
입력일 2021-05-10 13:50 수정일 2021-05-10 21:20 발행일 2021-05-11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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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승 문화부 차장

얼마 전 영화 ‘화녀’를 봤다. 윤여정이 한국인 최초로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거머쥔 뒤 발빠르게 움직인 영화업계 덕분(?)이다. 故김기영 감독은 국내에서 이미 여러 차례 기획전을 가졌지만 이번엔 달랐다. 무려 50년만에 정식으로 극장개봉을 한 것. 

전세계에 생중계된 수상소감을 통해 윤여정은 자신의 데뷔작인 ‘화녀’를 만든 감독에게 감사함을 전했고 “살아계셨으면 분명 기뻐하셨을 것”이라며 반세기 넘게 자신을 연기의 세계로 이끈 그를 추모했다.

TV탤런트로 활동하던 윤여정의 첫 스크린 데뷔작은 지금 봐도 파격적이다. ‘화녀’는 시골에서 상경해 부잣집에 취직한 가정부 명자(윤여정)가 주인집 남자의 아이를 갖게 된 후 벌어지는 파격과 광기의 미스터리다. 한 가정을 파멸로 몰고 가는 명자의 집착은 가녀린 윤여정의 체구와 그로테스크하게 맞물려 큰 화제를 모았다.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손바닥 만한 쥐를 움켜쥐고 주인집에서 키우던 닭을 조각내는 모습은 애교다. 자신을 잡으러 온 형사들을 예상하며 눈을 가리는 모습을 다양한 버전으로 상상하는 모습은 사랑스러움마저 풍긴다. 이후 여러 인터뷰에서 윤여정은 “자신에게 그런 연기를 시키는 감독님이 미워 당시에는 많이 울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만큼 연기적으로 많이 배운 때도 없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지난 주는 어버이날이었고 곧 스승의 날이 다가온다. 세월이 흘러 모두가 우러러 보는 자리에 섰을 때 자신을 이끈 선배이자 스승을 이렇게 추억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요즘엔 뭔가를 가르치려는 사람을 ‘꼰대’라고 부른다. 이미 4050세대는 후배와 윗선에 끼여 눈칫밥을 먹은 지 오래다. 만약 나에게 저런 가르침을 준 존재가 없다 해도 슬퍼하지 말자. 윤여정의 수상소감만큼 거창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고마운 존재로 기억된다면 그것만큼 성공한 인생도 없을테니까.

이희승 문화부 차장  press512@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