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100] 우리 역사는 우리가 쓴다… 신간 '영화하는 여자들'

이희승 기자
입력일 2020-09-08 18:00 수정일 2021-06-12 00:53 발행일 2020-09-09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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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여성영화인모임 창립 20주년 맞아 출간한 영화계 필독서
1990년 이후 영화 제작, 연출, 연기, 촬영, 조명, 미술, 사운드, 편집, 다큐멘터리, 마케팅, 영화제 프로그래밍, 저널리즘의 여성들 인터뷰로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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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는 예술장르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여성영화인들.(사진제공=사계절)

“우리가 만드는 영화 속 캐릭터가 남성적 시선에 의해 왜곡되는 것을 늘 조심했어요.”-심재명 영화제작자

“남성장르에서 내가 만드는 그림은 다를 거란 믿음이 있습니다.”-류성희 미술감독

“블록버스터를 여자촬영 감독에게 준 적이 없어요. 미국에서도.레이첼 모리슨이 ‘블랙팬서’를 찍었을 때 저는 정말!(박수)”-엄혜정 촬영감독

처음에 두께를 보고 놀라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닫을 때까지 눈을 뗄 수 없다. 신간 ‘영화하는 여자들‘은 우리가 몰랐던 그리고 알았어도 자세히 몰랐던 여성 영화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사단법인 여성영화인모임은 창립 20주년을 맞아 한국영화계에서 활약해온 분야별 여성 영화인 20인의 일과 삶, 영화에 관한 생각을 인터뷰 형식으로 엮어 출간했다.

한국 영화계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1990년 이후 영화 제작, 연출, 연기, 촬영, 조명, 미술, 사운드, 편집, 다큐멘터리, 마케팅, 영화제 프로그래밍, 저널리즘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경험한 변화와 도전, 성취와 좌절, 연대와 협력은 흡사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 하다. 2020년 현재까지 활약하고 있는 여성영화인들의 손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수작들이 탄생됐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분명하다.

◇이름을 부르기 보다는 ‘미쓰 아무개’였던 19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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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하는 여자들’주진숙/이순진 지음 | (사)여성영화인모임 기획 |1만9800원.
“인터뷰에 응해준 여성 영화인들은 선배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잘못된 구조와 관행에 도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지은이 주진숙 한국영상자료원장과 이순진 영화사 연구자는 서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 그들이 던지는 심도 있는 질문과 초보자들이 공감할 가장 원론적인 궁금증은 이 책의 가독성을 높이는 일등공신이다.

포문은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가 연다. 스물 다섯에 여성을 전문인력으로 존중하는 분위기가 아닌 영화계에 첫 발을 딛은 그는 ‘미스 심’으로 불린 사회초년생 시절을 추억한다. 충무로 토착 작업과 대기업 자본이 충돌하며 한국 영화의 제작과 내용이 바뀌는 격동의 시기였다.

전 스태프가 표준근로계약서를 체결하고 촬영한 첫 영화인 ‘관능의 법칙’ 제작자기도 한 심 대표는 영화마케팅의 대모로 불리는 올댓시네마 채윤희 대표와 의기투합해 한국 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을 만드는 등 후배들의 롤 모델로 꼽히고 있다. 넘쳐나는 매체와 다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채 대표가 밝히는 ‘쉬리’와 ‘컬러 오브 나이트’의 홍보 뒷이야기는 발로 뛰던 당시의 치열함을 증명한다.

‘쉬리’ 홍보를 위해 한석규, 최민식 등을 내세워 액션 스쿨에서 직접 총을 쏘고 훈련하는 모습을 언론에 공개하는가 하면 주제 음악이 좋아 악보 전단을 만들어 뿌리면서 ‘컬러 오브 나이트’는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흥행 수익을 냈다.

배우 전도연은 “계속 환경이 바뀌는데 혼자 독야청청하고 싶지 않다”는 속내를 이 책에서 밝힌다. 그는 “작은 이야기라도 누군가가 그 이야기를 하고 싶고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면 주류 영화가 아니어도 참여하고 지금도 조연급이라도 할 수 있다”며 변화에 대한 두려움에 맞선다.

◇그들의 직업 앞에 ‘성별’ 구분이 없어지는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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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는 예술장르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여성영화인들.(사진제공=사계절)

시대가 바뀌고 각 직업군마다 여성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이 책은 의미 있는 성취를 거둔 여성영화인들을 10년 단위로 나눠 소개한다. 1부 ‘소외의 벽을 넘어 눈부신 성취로’, 2부 ‘더 넓고 더 깊게, 전문가의 시대’, 3부 ‘단단한 자기중심과 새로운 감수성’까지 총 3부로 구성됐다.

왜 굳이 앞에 ‘여성’이라는 말이 붙느냐는 질문에 3부에 등장한 배우 천우희는 “여성 감독님과의 작업일수록 차이점이 있냐는 질문이 어김없이 나온다”며 미디어에 뿌리 깊게 박힌 젠더 감성을 저격한다.

더불어 책 속에는 이들이 영화 현장에서 겪어야만 했던 어이 없는 실제 상황들도 고스란히 담긴다. 지방 촬영시 숙식을 할 때 방을 나눠 얻어야 하니 제작비가 상승해서 여성은 안된다. 여자니까 필요없을 거라며 협회에서 나온 다이어리를 혼자만 못 받았던 일도 실제 있었던 일이다. 미혼이니 주말에 나오는 게 너무 당연해서 결혼한 동기와 계속 비교당하다 결국엔 퇴사한 일이 생겼지만 “그때는 나도 여유가 없어서 미쳐 그 부분까지 챙기지 못했다”는 자기 고백도 있다.

지금은 촬영과 조명을 동시에 담당하는 몇 안되는 감독으로 꼽히는 남진아 감독은 ‘기집애는 안된다’는 조명, 단 한번도 여성이 일하지 않은 분야에 뛰어든 인물이다. 도제시스템이 당연한 시대에 영화에 뛰어들어 두 분야를 모두 담당하는 감독은 흔치 않다. 뿌리깊은 남성들의 텃세에도 살아남은 이유는 필름에서 디지털로 바뀌는 시대에도 “주변 조건 봐가며 일하지 않았다.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지 않으면 원하는 그림이 안나오니까 화가 나서 공부했다”고 그 이유를 전한다.

책은 ‘여자가 카메라를 만지면 재수 없다’는 의식이 팽배했던 시절 영화의 다양한 분야에서 현장을 지켰던 이들은 입모아 “이제는 일부러 차별한다기 보다 단지 그 시대가 남성 중심으로 돌아갔던 시기였다”며 “이제는 누가 끝까지 가느냐의 문제”라고 젠더 문제를 아우른다.

‘두개의 문’ ‘공동정범’을 만든 김일란 감독은 여기에 “여성영화인의 역사 안에서 데뷔한 감독이 불과 여섯 명”이라고 앞으로의 과제를 던진다. 광화문시네마의 공동대표이자 ‘소공녀’의 전고운 감독은 “여자들의 다양한 직업과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이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며 정체성을 공고히 했다.

이들은 ‘영화하는 여자들’이란 책 속에서 누군가의 딸이자 엄마로서의 위치와 오롯이 자신으로서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리고 영화라는 장르에 예술혼을 발휘하는 한 인간의 매력을 마음껏 뽐낸다. 그 어떤 이론서보다 더 읽어야 할 필독서의 탄생이다.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