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100] 서핑으로 맛 본 인생의 쓴맛, 단맛… '난생처음 서핑'

이희승 기자
입력일 2020-08-18 17:00 수정일 2020-08-18 20:37 발행일 2020-08-19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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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서핑으로 맛 본 인생의 쓴맛, 단맛 '난생 처음 서핑'
'파도가 우리를 밀어줄 거야'란 부제로 인생 역경속 중심 잡는 법 담백하게 풀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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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서귀포시 중문해수욕장에서 서퍼들이 파도를 즐기고 있다.(연합)

제목은 평범하다. ‘난생 처음 서핑’. 그러나 부제는 꽤 낭만적이다. ‘파도가 우리를 밀어줄 거야’라니. 하지만 이 책, 읽을수록 그 치열함에 흠뻑 빠져든다.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 인생은 한번 뿐) 족들의 필수 스포츠라 생각했던 서핑에 대한 찬사려니 했던 책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인 김민영은 ‘엄마 아빠의 잘난 딸’이자 책 속 표현을 빌자면 ‘회사의 새끼’일 뻔 했으며 호기롭게 인턴은 그만 하기로 한 열혈 취준생이다.

이 책은 취업과 인생의 굴레에서 서핑을 만나 직접 체험한 단맛과 쓴맛의 엑기스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겪을 만큼 겪은 인생 선배의 조언이 아니다. 어쩌면 서핑은 인생을 닮았다. 파도를 타면서 느낀 환희와 바다의 짠맛이 이 한권의 책에 담겼다.

◇균형 잡고 살기 위해서 

난생처음서핑
난생 처음 서핑 | 파도가 우리를 밀어줄 거야 |김민영 저 | 1만 3000원.(사진제공=티라미수 더북 )

저자는 어릴 때부터 확고한 꿈이 있었다. 바로 방송국 PD였다. 인턴, 프리랜서, 계약직이라는 갖가지 이름으로 S사, M사 그리고 JTBC 디지털 PD를 거쳤다. 한번 빠져 들면 뭐든 끝까지 하고야 마는 성격의 소유자다. 대학교 때는 치킨 동아리 활동을 하며 치믈리에(치킨 소믈리에) 자격증까지 땄을 정도다.

남다른 승부욕에 축구, 농구, 테니스, 요가, 필라테스 등 여러 가지 운동을 섭렵했지만 서핑만큼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고. 일단 오해는 하지말자. 금수저 출신의 방송국 PD가 힐링을 하러 발리에 가 서핑에 빠진 게 아니다. 단지 만나는 사람마다 PD라는 저자의 직업에 “그럼 TV에 나오느냐?”고 질문했고 “디지털 PD여서 나오지 않는다”면서 전화를 끊거나 구구절절 설명을 해야 했다. 그리고 똑같이 일했어도 성과급은 정규직에만 지급되는 단체생활을 겪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된 취준생 생활이 3년이 넘어가면서 부모의 눈치가 보였던 때 순전히 우연히 30만원대 49박 50일짜리 발리행 항공권을 발견했을 뿐이랄까. 한국에서의 한달 생활비면 발리에서의 석 달여를 살 수 있다는 걸 안 저자는 바로 200만원을 대출(?)받아 발리로 향했다. 책에는 이때를 “적어도 부모님의 눈치는 보이지 않았다. 생애 처음으로 아빠 엄마의 돈 없이 살았다”고 적고 있다.

◇지구 환경, 부모, 친구, 인생 파도의 선배들

서핑을 한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지구 환경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유튜브에서 볼 법한 에메랄드빛 바다는 이제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론으로 원거리에서 촬영한 서핑 비디오가 아니라면 서퍼들은 바다 속 비닐봉지와 각종 쓰레기, 플라스틱 뚜껑 더미들에 경악을 금치 못하곤 한다.

책에도 발리의 우기에 밀려든 쓰레기 더미 속에서 서핑을 한 뒤 온 몸에 발진이 올라 고생한 에피소드가 실렸다.

말로만 환경보호를 외칠 게 아니라 그 바다에 몸을 한번이라도 담궈 본다면 각종 연고와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심각성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귀띔이다.

파도를 통해 만난 소중한 인연도 있다. 바다에 나가면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만삭의 임산부도, 어린 아이들조차 프로 보드를 타기도 한다. 바다는, 그 곳에서 균형을 잡는 서핑은 평등한 스포츠다. 현지인이라서 더 좋은 파도를 내어주지도, 타지인이라고 험한 파도를 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보드에 연결된 리쉬는 일종의 생명선 같은 존재다. 보드를 잃어버리지 않게 해주고 서퍼들을 언제든 밖으로 나가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 리쉬는 어쩌면 인생에서 당연히 곁에 있을 거라고 혹은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과도 같다. 절대 끊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그 끈이 2m 파도에 끊어진 날 죽을 뻔한 경험을 하면서 저자는 인생을 되돌아보게 됐다.

때로는 끊어질지 모를 리쉬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주변사람들을 챙기기 시작한 것.

거센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다 혹은 바람 잘 날 없는 일상에서 포기하지 않고 버텨내려면 “한낱 실오라기 같은 리쉬라도 있어야 한다”는 문장에 절로 코끝이 찡해진다.

서핑
한국영화 최초 서핑을 소재로 한 영화 ‘어서이소게스트하우스’의 한 장면.(사진제공=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바다의 밖에서도 삶은 이어진다

이 책은 서핑 입문책으로 손색이 없다. 자신의 경험으로 패들링, 패들아웃, 덕다이브, 에스키모롤 같은 전문용어들이 재미있게 녹아있기 때문이다. 무슨 단어인지 몰라도 된다. 저자가 빨래처럼 파도에 돌려지고 파도 안으로 들어가고 팔로 저어 나가간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간단하다.

간간히 바다 위에서의 경험에 한국에서의 기억을 훑고 지나가는데 이 또한 흡사 에세이판 ‘90년대생이 온다’를 읽는 느낌이랄까. 단순히 사회생활의 단면이 아니다. 키 174cm인 저자가 여성으로서 겪는 시선과 차별 그리고 서퍼로서 중요한 건 무게보다는 ‘조절’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을 저자는 낱낱이 고백한다.

평생을 덩치 큰 여자로 굽은 어깨를 지니고 살았으며 완벽한 시도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고백은 그러니까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는 것이 ‘진짜 실패’라는 인생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과정이다.

수백 번 바닷물을 마셔가며 보드 위에 섰어도, 파도를 탔어도, 더 중요한 건 ‘내려오기’다.

마침내 파도를 잡을 힘이 생겼고 잘 따라갔더라도 금방 처박히기 일쑤다. 올라갈 땐 그게 전부처럼 보이지만 정작 중요한 행위는 잘 내려 오는 것이었다.

쉴새 없이 변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오르락 내리락 했던 저자는 회사의 눈치덩이로 간이 사무실에서 시작해 19층까지 올라가 결국엔 회사가 지급하는 개인 컴퓨터까지 쓰며 매일 몇 만명이 넘는 팔로워가 생기는 인기 콘텐츠를 만든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계약이 끝난 현실은 냉정했다. 대가는 ‘그동안 수고한 0기’라고 씌여진 감사 문구가 쓰인 상장이 다 였고 밤을 새가며 힘든 줄 모르고 아이템을 냈던 동기들과 나란히 회사문을 나가야 했던 아픔을 서핑으로 치유했다. 잘 내려오면, 인생이 요동쳐도 살만 하다고, 그럼에도 감사할 일이 생길 거라고 책은 말한다.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