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경제의 ‘신간(新刊) 베껴읽기’] <이나모리 가즈오> 송희영

조진래 기자
입력일 2020-07-28 07:00 수정일 2020-07-28 07:00 발행일 2020-07-26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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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보다 사람을 중시했던 '살아있는 경영의 전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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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출신의 저자가 마쓰시타 고노스케 평전에 이어 두번째로 내놓은 일본 창업가 평저다. 교세라를 창업한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은 파산 직전의 JAL을 회생시킨 기업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저자가 보는 이마노리 회장은 ‘기업의 존재 이유가 인간에 있다는 철학을 실행에 옮긴 기업인’이다. 저자는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을 ‘이런 총수 밑에서 온 몸을 던져 한번 실컷 일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기업인’이라고 극찬했다. 돈이나 수익 보다는 사원 행복에 최우선 목표를 두고 일생을 후학 양성에 매진했던 그의 생생한 경영관과 가치관을 들여다 보자.

* 이나모리 경영스쿨 -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은 매년 ‘세이와주쿠’라는 이름으로 경영스쿨을 연다. 이른바 ‘이나모리의 경영 제자들’이 모이는 세계대회다. 일방적인 연설보다 문답식으로 기업인들이 처한 곤경에 대응책을 제시해 줘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1932년생으로 올해로 88세를 맞은 이나모리 회장은 “더는 정력적으로 강의에 참가하기 힘들다”고 털어놓으며 36년째 이어오던 이 대회를 지난해 공식 폐쇄했다. 2019년 7월18일 요코하마 해변의 국립컨벤션센터 ‘파시피코 요코하마’ 대강당에서 열린 마지막 행사에는 이나모리 회장이 직접 참가하지 못했음에도 무려 4791명의 기업인들이 세계 각지에서 몰려와 화상을 통해 그의 마지막 육성을 들었다.

* ‘인본주의 & 종업원주의’ 이나모리즘 - 이 대회 참가자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마음의 경영’을 말한다. 이나모리 회장은 매년 어려움을 멋지게 뛰어넘은 문하생들을 선정해 시상식을 열었다. 반대로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제자들에게는 “넌 바보냐?”,“그럴려면 자퇴해라”하며 막말 직격탄을 날리곤 했다. 경영학자들은 이나모리의 경영을 인본주의 경영 또는 인간존중의 경영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나모리는 ‘종업원 행복, 사원 행복 경영’이라고 설명한다. 사원 행복이 기업 경영의 최우선 순위이며, 기업 이익은 사원 행복을 위한 수단이라고 말한다.

* 한 때 수제자였던 손정의 - 1990년대 중반 손정의가 IT사업에 막 뛰어들던 시절만 해도 그는 이나모리스쿨에서 일등 문하생이었다. 벤처기업의 기수로 ‘이나모리의 수제자’라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둘은 가까운 사이였다. 하지만 손정의는 “어느 정도 배가 부르면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이나모리 철학을 따르지 않았다. 손정의에게 수 차례 “자기 체력에 맞는 경영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으나 듣지 않았다. 제조업에서 출발한 교세라가 신기술 개발에 집착하는 일본식 경영을 했다면, 소프트뱅크는 돈이 더 큰 돈을 만들어 내는 미국식 경영 전략을 구사한 셈이다. 이나모리가 인간의 무한한 힘을 중시한 경영이었다면, 손정의의 경영은 돈의 위력을 더 믿는 경영이었다.

* 대학 정규강좌로 채택된 이나모리 경영학 - 이나모리는 가정 형편 상 형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대학을 다녔다. 가고시마대학에서 그의 대학 졸업논문은 가고시마 지역 점토를 연구한 내용이었다. 이를 계기로 도자기 기술을 발전시켜 TV나 컴퓨터 휴대폰 자동차 등에 들어가는 각종 첨단 부품을 개발하면서 신소재 세라믹을 창조했다. 이 대학에서 이나모리아카데미가 진행하는 강좌는 재학생들에게 선택과목이지만 창업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큰 인기라고 한다.

* 단칼에 승부하는 ‘가고시마 기질’ - 가고시마를 ‘사쓰마’라고도 부른다. 이 지역 사람들은 성질과 기력이 남달라 목숨을 가벼이 여기고 살상을 좋아한다고 조선 실학자 정약용이 썼을 정도로 특별한 기질을 가졌다. 임진왜란에서 이순신 장군의 목숨을 앗아간 해전에서도 사쓰마 군대가 주력이었다고 한다. 가고시마 남자들을 특별히 ‘사쓰마 하토야’라고 불렀고 “사쓰마 하토야의 첫 칼은 무조건 피하고 봐야 한다”는 전설이 전해질 정도로 일본 검객들 가운데서도 특별했다고 한다. 이 고장에서는 사쓰마 하야토의 기본 자세로 3가지가 강조되는데 첫째 싸움에서 지지 말라, 둘째 거짓말하지 말라, 셋째 약자를 괴롭히지 말라이다. 모두 사무라이 정신의 기둥이 되는 내용들이다.

* 이나모리가 가장 존경한 ‘사이고 다카모리’ - 이나모리 회장은 고향 위인 중에서 누구보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존경했다. 일생을 그처럼 살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다. 톰 크루즈 주연의 <라스트 사무라이(2003)>가 그를 모델로 만든 작품이다. 그는 가고시마 출신으로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메이지 유신 혁명의 주인공이었다. 이나모리 회장은 사이고가 개인적 출세나 영달을 바라지 않고 평민을 위한 국가 건설이라는 대의명분만을 추구했다며 그를 따랐다. 그의 반골 정신과 애민 정신을 존경한 것이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친필휘호 ‘경천애인’을 액자로 사무실에 걸어두고 이를 사훈으로 채택하기 까지 했다. 히지만 사이고는 한반도 침략에 앞장선 ‘정한론’ 주창자로 알려져 우리나라에선 평이 좋지 않다.

* ‘외길 승부’ 교토에서 장사를 배우다 - 교토는 과거 1200년 동안 일본이 수도였다. 이 곳 장사꾼들에게는 “화살을 2개 갖지 말라”는 말이 전해내려온다고 한다. 첫 화살이 빗나갈 것에 대비해 예비 화살을 준비하지 말하는 뜻이다. 한 개의 화살로 승부해야 한다는 외길 승부를 강조한 말이다. ‘교토 송곳 전략’이라는 말도 있다. 송곳으로 한 점을 찌르듯 한 점을 계속 파고들어 구멍을 뚫는 식으로 경영한다는 것이다. 이곳에는 1000년이 넘는 가게가 최소한 5곳이 있다. 100년 이상 영업중인 가게는 1100곳을 헤아린다. 장수 기업 수에서 일본 최대 도시다. 이나모리 회장은 이곳에서 기업가 정신을 익히면서 ‘나 만의 기술, 나 만의 제품’을 만들어 높은 가격에 파는 것을 배웠다.

* 일본의 3대 기업가 탄생 ‘명당’ - 일본에는 유난히 기업인들을 많이 배출한 것이 3곳이 있다. 시즈오카 서쪽의 하마마쓰, 히로시마 동쪽의 빈고후추, 그리고 교토 남쪽 지역이다. 교토가 명당으로 꼽하는 이유는 선배 기업인들이 후배 기업인들을 지원하는 전통이 강한데다 역사가 오랜 기업이 많다는 점, 그리고 기업인들을 단련시키는 까다로운 고객층이 두텁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나모리 회장이 교세라를 창업했을 때 설립 자본금 300만엔 가운데 200만엔을 댄 미야기전기는 8년 후 이나모리가 독립 행보를 선언하자 깨끗이 뒤로 물러났다. 전형적인 교토 기업다운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창업 당시 이나모리 회장은 돈이 없어 보유 기술로 10%의 지분 가치를 평가받아 교세라를 설립했다.

* 한국인 장인 ‘우장춘’ - 이나모리의 아내 아사코는 한국 근대 농업의 이버지 우장춘 박사의 넷째 딸이다.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은 명성왕후 암살에 가담한 죄로 조선 왕조가 파견한 자객에게 살해되었고, 우장춘은 일본인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자신의 가문의 비밀을 안 우장춘은 아버지와 김옥균을 비롯한 19세기 친일 개화파 인사들의 망명 생활을 돌봐준 스나가 집안에 아이들을 입적시키고 자신은 그대로 우장춘으로 살았다. 그는 어머니 별세 후 들어온 부의금으로 부산광역시 온천동에 우물을 파 동네 사람들에게 개방했다.

* ‘교세라 필로소피(철학)’ - 교토는 정치적 성향이 강한 좌파 도시로 꼽힌다. 교세라 창업 2년 만에 고졸 출신 사원들이 고정급 지급과 임금 인상, 보너스 보장을 외치며 파업에 나섰다. 이 때 그는 고졸 사원 전원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비공식 협상을 벌였다. 고정급 지급은 가능하지만 매년 임금 인상과 보너스는 도저히 약속할 수 없다고 맞서면서 최후 통첩으로 “만약 내가 어설픈 경영을 하거나 사리사욕을 추구하면 나를 칼로 찌르라”고 선언했다. 그의 진심을 읽은 사원들은 물러섰고 이를 계기로 이나모리는 “전 직원의 물심양면의 행복을 추구한다”며 ‘사원 행복’이 교세라 경영의 목적임을 공식 선포했다. 회사는 훗날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담아 교세라 필로소피라는 작은 수첩으로 제작해 모든 사원이 호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1970년대 초반 석유파동 때 이나모리 회장은 고용을 사수하겠다고 약속했고, 노조는 상급 단체의 29% 인상 요구 압박을 견뎌내고 임금인상을 1년 간 보류하는 것으로 보답했다.

* 교세라만의 독특한 회식문화 ‘콤파’ - 교세라 직원들은 1000~2000엔 씩 갹출해 회식 모임을 연다. 맥주와 정종 같은 가벼운 술을 마시되 술을 먹지 못하는 사원은 청량음료요를 마시게 한다. 임원이나 간부가 요리를 만들어 부하들에게 나눠주는 역할을 한다. 상사와 부하 직원들이 진솔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돕는 자리다.

* 이나모리의 ‘아메바 경영’ - 아메바는 단세포 생물로 일정한 형태 없이 끊임없이 변한다. 교세라는 아메바의 이런 특성을 감안해 아메바 경영기법을 도입했다. 아메바라는 이름의 소집단을 중심으로 시간당 채산성을 관리하는 것이 아메바 경영의 핵심이다. 따라서 거의 대부분의 권한이 현장 매니저에게 위임된다. 영업부터 생산 판매까지 스스로 책임지라는 것이다. 현재 교세라에는 3000여개의 아메바 소집단이 운영되고 있다. 그는 손오공의 분실술에서 착안해 아메바 경영기법을 만들었다고 한다.

* 마쓰시타 고노스케 회장과의 인연 -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기업의 목표를 인간의 행복에 두었다. 이나모리와 같았다. 1989년 마쓰시타 회장이 사망하기 직전에, 그는 이나모리 회장이 쓴 <일심일언>에 따뜻한 추천서를 붙여 주었다.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을 기리는 기념관을 교토에 건립해 두 사람이 이사장 직책을 이어받기도 했다. 마쓰시타가 사망한 후 파나소닉이 경영난에 휘청이자 이나모리는 파나소닉의 사내보에 ‘내 마음 속에 남아있는 마쓰시타’라는 글을 기고하면서 파나소닉이 아메바 경영의 모델이었던 사업부제를 폐지한 것을 맹비난하기도 했다. 창업자의 훌륭한 가르침을 버렸다는 것이었다.

* 이나모리의 ‘세 가지 인간’ - 그는 인간을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먼저 스스로 불타는 자연성 인간, 다음으로 불을 붙이면 타오르는 가연성 인간, 마지막으로 불을 지펴도 타오르지 않는 불연성 인간이라고 했다. 그는 불평불만과 트집잡기만 하는 불연성 사원을 가장 싫어했다. 자연성 인간이면 가장 좋겠지만 최소한 가연성 인간이 되어야 함께 일할 수 있다고 말했다.

* “내 최고 업적은 통신사업 성공” - 이나모리는 교세라를 창업해 세계적인 회사로 키웠고, JAL을 도산 작전에서 구출해 명성을 얻었지만 정작 KDDI를 세워 통신사업에서 성공한 것을 자신의 최고 업적으로 꼽았다. 그의 핵심 전략은 역시 가격 인하 정책이었다. 당시 압도적인 1등 기업 NTT를 공격하기 위해 KDDI는 전화 기본요금을 30% 싸게 서비스했다. 가격 인하로 반격해 오면 다시 가격인하로 받아 치며 시장을 잠식해 들어갔다. NTT가 한번은 21.4%나 가격을 내려 공세를 펴기도 했으나 잘 버텨내고, 지금은 일본 내 2위 통신회사로 자리매김했다.

* 이나모리의 ‘회계경영 7원칙’ - 첫째, 현금 베이스 원칙이다. 현재 손에 쥐고 있는 현금만 중시하라는 것이다. 둘째, 일대일 대응 원칙이다. 돈과 상품이 움직이는 순간 즉각 전표를 작성하라는 것이다. 셋째, 금육질 원칙이다. 사람과 돈 설비 재고에 여유나 과잉을 금지한다는 원칙이다. 넷째, 완벽주의. 회계에서 사소한 실수나 불량, 애매한 처리는 불허된다. 다섯째, 더블 체크 원칙이다. 물건이나 돈의 움직임은 꼭 복수의 사원이 허가하도록 했다. 여섯째, 채산성 극대화다. 조직별 목표 달성 여부를 매일 점검케 했다. 일곱째, 유리알 경영의 원칙이다. 모든 재무상황을 사원들에게 공개해 투명성을 확보한다.

* 관료사회에 적대적 - 그는 자서전에서 관료세력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감추지 않았다. 관료들은 도무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며, 반성도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질서나 업계 질서는 완전한 것이라고 하며, 개혁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 일본이 이나모리에게 JAL을 맡긴 이유 - 일본 정치권은 이나모리에게 JAL의 회생 작업을 일임했다. 정치인들은 경영에 간여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한국의 경우 부실 대기업이 나오면 공무원과 은행가 출신을 앞세워 회생작업을 추진하면서 온갖 수단을 동원해 경영에 개입하려 했지만, 일본은 달랐다. 일본 정치권은 산전수전 다 겪은 최상의 프로 경영인에게 회생을 맡기는 결단을 내렸다. 이나모리에게 처음 이 일을 맡아달라고 한 이는 마에하라 세이지 건설교통부장관이었다. 이나모리는 그의 후원회장을 맡았던 인연으로 그의 청을 뿌리치지 못했다.

* 이나모리의 JAL 출사표 - 이나모리는 대의명분을 중시했다. 그는 자신이 JAL 경영을 책임질 수 밖에 없는 명분을 3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JAL을 회생시켜 국가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겠다는 것이었다. 둘째, JAL에 남아있는 3만2000명 사원의 일자리를 지켜주겠다는 것이었다. 세번째는 JAL 붕괴로 오랜 경쟁회사인 ANA가 항공시장을 독점하는 상황을 막겠다는 명분이었다. 그는 “독점은 국민을 불편하게 만드는 독”이라고 믿었다. 그는 단체교섭 같은 형식을 포기하고 직접 노조를 찾아가 대화했다. 조종사 출신의 우에키 요시하루를 창사 이래 처음으로 사장으로 올리는 파격을 선택해 책임을 맡겼다.

* 정경유착을 끊어내다 - 공기업으로 출발한 JAL은 60년 동안 자민당의 주요 자금줄이자 자민당 정권의 대미 로비창구였다. 무역흑자를 줄이라는 미국의 압박이 있을 때마다, 당장 필요하지 않은 보잉사 비행기를 앞당겨 사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오로지 보잉 항공기만 보유할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임원들은 정치인이나 관료들과의 관계로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경영은 사라지고 정치가 횡행했다. 그 종착역이 파산이었다. 이나모리는 정치권의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해 공적자금을 우선적으로 갚아나갔고, 경영에서 물러나기 직전에는 당시 카탈로그 가격으로 1조엔에 달하는 에어버스 31대 구매계약을 맺어 보일 일변도의 구매 관행을 무너트렸다.

* 가족의 그룹 경영 관여를 차단하다 - 그는 가족들을 돕기 위해 일찌감치 가족회사를 설립했다. KI흥산은 현재 코콘카라스마빌딩 외에 교토 시내에 3곳의 빌딩을 더 소유하고 있다. 이나모리의 남동생이 경영하다가 지금은 큰 사위가 사장직을 물려받았다. 교세라 지분을 1.96% 보유해 비상장 회사로는 최대주주지만 경영에는 일체 관여 않고 있다. 다른 동생은 가고시마의 유명 고기만두 체인점 ‘교자노 오쇼’ 점포 8곳을 운영하고 있다. 이나모리재단도 교세라 지분을 2.59%나 갖고 있지만 역시 경영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 세습에 거부감이 강한 이나모리 - 이나모리 회장은 세 명의 딸을 두었는데 딸이나 사위 등 가족 누구도 교세라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애초부터 경영권 세습을 포기했다. 그는 정치든 경영이든 세습에 거부감을 강했다. 일본 정치가 엉망이 된 이유가 세습 의원들이 국회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54세의 나이에 일찌감치 사장직을 창업 동지에게 물려주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 상장 이익도 거부한 경영인 - 그는 교세라를 증권 시장에 상장할 때 창업자에게 돌아가는 이익을 모두 포기했다. 상장 전 지분을 늘리는 방식으로 창업자 몫을 챙겨주겠다는 제안을 여러 증권사로부터 받았으나 거부했다. KDDI 창업 때나 상장때도 임직원들에게는 주식을 배분했지만 자신은 주식을 전혀 보유하지 않았다. JAL 재건 때는 3년간 무급으로 봉사했다. 이나모리스쿨이나 시민 포럼 등에는 강의료도 한 푼 받지 않았다.

* 교세라 기업 묘 - 교세라 창업 20주년이던 1979년에 교토 주변 도시 야외타의 엔복사에 사원들을 위한 기업 묘를 조성했다. 고령이나 사고로 사망한 사원들을 이곳으로 모셔 위령제를 지낸다. 이 역시 존경하는 파나소낙의 마쓰시타 회장에게서 배운 것이다.

* 불가에 귀의하다 - 이나모라는 엔복사에 사원 묘를 건립한 데 이어 낡은 본당 건물을 재건축해 주었다. 교토 불교계와 교토시가 대립했을 때는 중재 역할도 수행해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 냈다. 그는 65세 나이에 아예 삭발하고 출가를 감행했다. 가족과 친지, 기자들이 보는 가운데 엔복사에서 출가 의식을 마치고 큰 스님으로부터 ‘다이와’라는 법명까지 받았다. 다른 지방 도시에서 신도들 집을 돌며 쌀을 시주받는 탁발 수행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 이나모리가 월급쟁이들에게 남긴 5가지 어록 - 첫째, 지금 맡은 일을 사랑하라. 그것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 둘째, 열등감과 격투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여라. 셋째, 인생의 행복은 내 마음이 그리는대로 나타난다. 넷째, 노동이란 스님의 수행과 같다. 회사원도 맡은 일에 빠지면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다섯째, 시련을 기회로 여기는 사람이 잘 풀린다.

* CEO들에게 남긴 5가지 어록 - 첫째, 회사는 CEO의 그릇 이상은 크지 못한다. 회사가 성장하려면 최고경영자의 그릇이 더 커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자신을 희생할 용기가 없는 리더는 조직을 이끌어갈 수 없다. 총수가 사욕을 드러내면 사원 전체가 그대로 배운다고 경고했다. 셋째, 기업 경영에 꼭 필요한 한 글자는 ‘덕(德)’이다. 기업이 장기적으로 번영하려면 덕치(德治)가 필수라는 얘기다. 넷째, 사람을 움직이는 유일한 원동력은 무사(無私) 이타(利他)의 정신이다. 그는 인수 대신 합병이라고 썼고 동등한 대접을 해 주었다. 다섯째는 ‘사업 구상은 낙관적으로, 계획은 비관적으로, 실행은 낙관적으로’였다.

* 이나모리가 가르친 5가지 불황 극복 비법 - 첫째, 불황은 성장의 챤스다. 둘째, 전 사원이 영업하라. 셋째, 최소 인원으로 줄여 생산성을 높여라. 넷째, 신제품 개발에 투자하라. 다섯째, 좋은 인간관계를 구축하라.

조진래 기자 jjr8954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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