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경제의 ‘신간(新刊) 베껴읽기’] <이광형 카이스트의 시간> 심재율

조진래 기자
입력일 2020-05-23 07:00 수정일 2020-05-29 10:43 발행일 2020-05-19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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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 교수'지만 카이스트를 벤처 요람으로 만든 '천사 교수' 이광형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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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 이사장을 역임했던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은 “이광형 교수는 내 사부이고 가정교사였다"면서 "이 교수 덕분에 멋지게 은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혹자는 “이광형은 미래를 위한 씨앗을 심는 사람”이라고 극찬한다. 그가 배출한 많은 벤처 사업가 제자들이 증거다. 그의 사무실에 걸린 ‘거꾸로 걸린 TV’와 ‘거꾸로 붙여놓은 카이스트 조직도’가 그의 학문적 가치관나 평생의 삶의 원칙을 그대로 보여준다. 모든 것을 뒤집어 생각해 보고, 섬겨야 할 사람을 성심으로 섬겨야 한다는 마음가짐이다. 그는 올해 정년이다. 그의 마지막 꿈은 은퇴 전에 카이스트에 미술관을 선물하고 떠나는 것, 그리고 ‘포스트 AI연구소’를 설립하는 것이라고 한다. 일간지 기자 출신으로 오랫동안 이광형 교수를 지켜봐 온 저자가, 괴짜지만 미래 혜안이 남달랐고 특히 제자 사랑이 각별했던 참스승의 한 모델을 담담하게 소개한다.

* 정문술의 515억 기부 -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은 2001년에 300억원, 2014년에 215억원 등 모두 515억원을 카이스트에 기부했다. 그 때마다 그는 이례적으로 이광형 교수가 반드시 이 금액을 집행해야 한다고 전제조건을 달았다. 첫 기부금은 대한민국에 융합교육의 씨앗을 뿌리는 바이오및뇌공학과 설립에 쓰였다. 정문술 회장은 자신이 기부한 돈으로 세워진 건물의 기공식과 준공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이 교수와 카이스트에 일임했다.

* 정치권과 거리 둔 정문술 회장 - 정 회장은 미래산업 은퇴 후에도 7% 가량의 지분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안철수가 2012년 대통령 선거 후보로 거론되면서, 그가 카이스트 정문술석좌교수였다는 한가지 이유만으로 미래산업의 주가가 덩달아 뛰었다.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 정 회장은 주식을 모두 처분하면서 미래산업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최후의 수단을 쓸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정 회장이 정치 테마주를 이용해 폭리를 취했다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작전세력이 더 이상 장난을 치지 못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 정문술과 이광형의 인연 - 두 사람의 인연은 1996년 이 교수가 석사박사 과정 학생 7~8명을 데리고 천안의 미래산업 본사를 방문하면서 시작됐다. 자식에게 회사를 물려주지 않겠다고 선언한 기술사관학교의 주인이 누구인지 보고 싶어서 였다. 이 때 주 사람은 바이오와 정보통신의 융합에 의기투합했고, 정 회장은 이 교수를 미래산업의 석좌교수로 영입하려 했다. 이것이 여의치 않자 카이스트에 거액의 기부를 결정하게 된다.

* 인공지능 퍼지 전문가 이광형 - 컴퓨터가 인간처럼 생각하려면 애매한 단어를 배워야 하는데, 퍼지 이론은 컴퓨터에 이간처럼 불확실하고 애매한 정보를 다룰 수 있게 해 주는 기술이다. LG산전이 여러 대의 엘리베이트를 통합 관리하는 그룹 컨트롤 엘리베이터를 개발할 때 퍼지 기술을 사용하면서 이광형 교수가 참여했다. 포스코와 광양제철소에서 음료수 캔 용 0.2mm 철판을 국산화할 때도 그의 퍼지 이론이 활용되었다. 그는 프랑스 중부 도시 리옹의 인사(INSA)에서 인공지능에 관한 페트리 네트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가르치는 교수 - 이광형은 항상 다른 사람과 다르게 하고 싶어하고 어제와 다르게 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는 존재하지 않는 ‘미존(未存) 수업’을 진행한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논하는 수업이다. 화성에 건축하는 기술, 로봇 노동조합 규약 만들어 오기 등이 과제다. 그는 도표를 만들 때 현재 시간을 2021년으로 1년 앞서게 표시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현재를 하나 앞서 살기 위해, 현재를 항상 1년 후로 생각하고 삽니다.”

* 이광형의 리더십 9원칙 - 하나, 꿈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라. 둘, 사심을 버리고 대의를 쫒아라. 셋, 눈 앞의 이익보다 신의를 우선시하라. 넷,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 다섯, 항상 정도를 지켜라. 여섯, 본질을 타협하지 말라. 일곱, 사람의 장점을 보라. 여덟, 30초만 본능을 참아라. 아홉, 상대에게 이로운 존재가 되어라.

* 이광형의 마음 속의 책 -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에디슨전기>를 읽고 과학자의 길을 택했다. 예일대 교수인 에이미 추아가 쓴 <제국의 미래>를 읽고는 제국으로 발전한 국가의 성공요인이 ‘관용’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시바 료타로가 쓴 <료마가 간다>에서는 공적인 일을 하면 영원히 남는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고 말한다.

*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바이오및뇌과학공학과 - 정문술 회장의 기부금이 들어오자 카이스트 내에서는 이 기금을 나눠 쓰자는 압박이 엄청났다. 하지만 이 교수는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生 必生卽死)이라는 글이 적힌 액자와 출사표(出師表)라고 쓰인 한 장의 부채를 사무실에 걸어놓고 보면서 “한 푼도 허트루 쓰이지 않도록 하겠다”고 이를 악물었다고 한다. 정 회장도 이 기부금을 탐내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 “단 1원이라도 다른 학과에서 가져가면 기부금을 전부 회수하겠다”고 엄포를 놓아 무마시켰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광형 교수 포함 세명의 교수진으로 바이오시스템학과로 출범했다가 추후 이름을 뇌과학공학과로 바꾸고 지원생도 급증했다고 한다. 현재는 교수 26명으로 늘어 대한민국에서 교수 숫자가 가장 빨리 늘어난 학과가 되었다. 삼성이나 LG도 결국 바이오를 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해 밀어붙였던 것이다.

* ‘융합’을 무시했던 카이스트 첫 외국인 총장 러플린 - 이론물리학으로 노벨상을 받은 이력 덕분에 카이스트 첫 외국인 총장에 선임된 로버트 러플린은 이 교수가 유치한 정 회장의 기부금 300억원의 집행권을 가져가려 했다. 그는 바이오와 정보통신의 융합 자체를 전면 불신했다.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가 이슈가 되자 황우석 팀을 데려오는데 이 돈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연임이 무산되면서 학과 해체 위기도 넘기게 되었다. 무엇보다 행정 경험이 없고 한국 대학 교육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당시 교수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저자는 전한다.

* 세계 일류대학을 만들기 위한 세가지 조건 - 이광형 교수는 첫째, 총장 임기를 5+5로 늘려 연속성을 갖게 해애 한다고 강조한다. 미국 MIT는 150여년의 역사에서 총장이 10여명에 불과했고 하버드대학도 20년 총장이 여럿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 자율권을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육 당국의 전문성과 함께 대학에 일관적인 정책과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문한다. 셋째, 국제 경기에 나가 싸울 자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MIT의 교수 대 학생 비율이 1대7인데 반해 카이스트는 1대17 정도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 카이스트의 개혁 - 서남표 총장은 테뉴어(정년 보장 교수) 심사를 강화해 재임용을 어렵게 하는 개혁을 추진했다. 대신 MIT의 3분위 1 수준이던 교수 인력을 400명에서 600명 수준으로 대폭 늘렸다. 입학사정관제를 제일 먼저 도입하는 대가로 정부로부터 증원 허가를 받았다. “이공계 대학은 좋은 사람만 뽑으면 부도 안납니다”라며 적극적으로 우수 교수 채용에 나섰다. 요즘도 카이스트는 한 해에 40~50명의 교수를 뽑는다. 매년 30명 정도가 은퇴하니 전체 교수 수 증가는 크지 않다고 한다. 서 총장은 또 강력한 교수 평가 제도를 마련했다. 이광형이 고무처장으로 실무를 담당했다.

* 한국과학영재고를 카이스트 부설로 - 교무처장으로 재직하던 2006년에 대학 본부에서 이광형에게 영재교육원장 겸임을 요청했다. 영재교육연구원은 과학기술부가 지정해 카이스트가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직원은 4명이었고 부산의 한국과학연재학교에 10여명의 교수를 파견하고 있었다. 이광형은 이 학교 운영을 국가로 넘기려는 의도를 알고. 각고의 설득 끝에 이 학교를 카이스트 부설로 만들었다. 지금은 매년 20~30명의 카이스트 교수들이 강의를 하고, 3학년 학생 30명은 2학기부터 대전 카이스트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연구생활을 시작한다. 이제 이 학교는 전 세계 30~40개 과학영재학교 가운데 싱가포르, 러시아와 함께 ‘빅3’에 꼽힌다고 한다.

* 벤처창업의 요람 카이스트 전산학과 - 김택진과 김창주 송재경은 서울대학교 학부 시절 같이 공부한 친구들이다. 이들을 게임업계 3인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나와 송재경과 김정주가 카이스트 전산학과로 진학하면서 기숙사에서 같이 지냈다. 전산학과에서 김정부와 이해진이 룸메이트였고, 송재경과 김영달은 옆방이었다. 이해진은 나중에 네이버를 설립했고, 김영달은 세계적인 보안카메라 회사 아이디스를 세웠다. 이런 인연으로 후에 김정주와 송재경은 의기투합해 넥슨을 만들었다. 송재경은 졸업 후 김정주와 헤어져 김택진과 엔씨소프트를 만들었다.

* 해킹 천재 김창범과 김병학 - 해킹의 선구자였던 두 사람은 인터넷을 통한 해킹 시도를 막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인젠’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지도교수였던 이광형도 이 회사에 투자했다. 그런데 회사가 번창하자 임시로 앉혀놓은 사장이 말썽을 부렸고, 이에 두 사람은 회사를 포기하고 나와 ‘해커스랩’을 세운다. 김병학은 현재 카카오에서 AI 담당 부사장으로 있다. 김창범은 김영달과 함께 카드에 인쇄해주는 산업용 프린터 생산 기업을 운영중이다. 운전면허증이나 신용카드에 글자를 인쇄하는 기계다.

* 겉돌던 김정주를 바로세워준 이광형 - 넥슨의 창업주 김정주는 카이스트 학창시절에 첫번째로 들어간 연구실에서 적응을 하지 못했다. 머리를 수시로 염색하고 신발 끈을 다른 색깔로 매고 다니는 등 통제와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 다행히 이광형 교수실로 옮기면서 하고 싶었던 게임 만드는 기술을 개발하고 게임회사까지 차릴 수 있었다. 이광형 특유의 ‘방해않기’ 교습법 덕분이었다. 비교적 자유방임형으로 학생들을 다루니 마음껏 자신의 기량을 펼칠 수 있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시장을 상상하며 인터넷 게임을 만들었던 그였기에, 정작 인터넷이 깔리게 되었을 때 당연히 선두주자가 될 수 있었다. 김정주의 특성에 대해 이광형은 돌발성, 창발성을 들었다. 김정주는 회사를 사장에게 맡기고 자신이 지은 새 사옥의 준공식에도 참석않는 등 정문술과 닮은 행보를 펼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김정주는 아이템 준비를 위해 3분의 1 시간을 해외에서 보낸다고 한다.

* 제조업으로 성공한 김영달 - 많은 카이스트 전산학과 학생들이 검색 포털 게임 등의 분야로 흩어졌지만 김영달은 예외적으로 제조업으로 시작했다. 재학 시절 이광형의 배려로 글로벌 기업이나 연구소에서 다양한 인턴 경험을 쌓았다. 덕분에 프로젝트 수행의 성과로 얻은 종자돈으로 훗날 아이디스를 설립할 수 있었다. 그는 특히 이광형 교수가 안식년 차 스탠퍼드연구소에 있을 때 제자들을 몇 개월씩 인턴으로 불러온 덕분에 실리콘밸리를 경험할 수 있었다. 다양한 분야를 섭렵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망라하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 아이디스의 독보적 기술력의 원천이 되었다.

* 대학에 특허권 부여해야 - 저자는 기술을 대학이 보유하고 각 기업에게 무상으로 실시권을 주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미국에서는 기업이 비용을 대고 대학교에서 연구하면 특허권을 대학이 갖는다고 한다. 비용을 댄 기업은 특허권을 무상으로 사용하는 권리를 갖는다. 미국 출신의 서남표 총장은 기업과 하는 모든 연구의 특허권은 카이스트가 갖고, 기업에는 무상 실시권을 주도록 했다. 이후 카이스트는 기업과 연구계약을 할 때 가장 먼저 지적재산권을 챙긴다.

* 지식재산대학원 설립 - 이광형 교수는 지식재산대학원 프로그램(MIP)을 커이스트에 설립한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는 미래에 지식재산이 국가의 핵심 자산이 되려면 이 분야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믿었다. 미국의 일류 법학전문대학원 노스웨스턴 로스쿨(NLaw)와 복수학위 과정도 만들어 냈다. 그는 특허청이 2010년부터 5년간 매년 6억원을 지원해 주기로 한 것도 3년째부터는 받지 않았다. 대학원 자립에 악영향을 미친다며 이유에서다. 이 수업에 많은 유능한 인재들이 모여 연구한 덕분에 인텔 등과의 저작권 소송에서 이길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 미래학을 개척하다 - 이광형 교수의 주도로 카이스트에 미래전략대학원이 설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2016년에는 사단법인 미래학회도 출범했다. 이광형 교수는 동료 임춘택 교수와 함께 STEPPER 미래예측법을 제시했다. STEPPER는 Science Technology Environment Population Politics Ecinomy Resource의 약자로, 미래를 변화시키는 7대 동인을 뜻한다. 즉, 미래예측을 위한 핵심동인 추출 방법이다. 우리 사회를 바꾸는 요소 가운데 주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찾아 그 요소를 중심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방식이다. 그는 정년 퇴임 전에 해야 할 일로 미래 세상을 연구할 ‘포스트 AI연구소’ 설립을 꼽는다.

* 이광형의 창의력 개발법 - 창의력 개발법이란 문제의 답을 구하기 위해 어떻게 질문하느냐를 다루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창의력을 개발하려면 질문을 잘해야 한다. 이 교수의 창의력 개발법은 무슨 주제이든 세가지 요소를 물어보라고 요구한다. 시간에 대한 질문, 공간에 대한 질문, 분야에 대한 질문이다. 이를 잘 훈련하면 누구나 어렵게 느껴지던 미래예측이 10분만에 전체적인 구도가 드러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교수는 이밖에도 ‘상품에서 배운다’는 개념의 RSP(Reverse Science from Product) 교육 등 과학교육의 흥미를 돋우는 독창적인 교육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는 은퇴 후에 이 RSP 교육을 기업들과 함께 키워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 교육을 확장시키고 ‘빅 사이언스 히스토리’를 연구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은퇴 후 꿈이다.

조진래 기자 jjr8954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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