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경제의 ‘신간(新刊) 베껴읽기’] <논어 여행> 남민

조진래 기자
입력일 2020-03-10 10:57 수정일 2020-05-29 11:03 발행일 2020-03-09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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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한국적 인문 여행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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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가 ‘공자의 말씀을 따라 떠나는 우리 땅 그랜드 투어’다. 공자는 맹자가 “세상에 사람이 태어난 이래로 공자보다 더 뛰어난 성인은 아직 없었다”고 얘기했을 만큼 위대한 성현이다.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다. 춘추 5패 사이 작은 나라 노나라에서 출생해 자랐다. 55세 이후 전국을 주유할 때, 따르는 제자들이 많아 공문십철(孔門十哲), 72현(賢)이라고 불렀다. 이들 제자가 공자 사후에 스승을 기려 남긴 책이 논어다. 저자는 이러한 공자의 가르침을 실천한 우리나라 역대 선조들을 선정해, 그들의 고향과 인연 있는 지역 등의 유적과 역사를 소개했다. 직접 발로 뛰어 쓴 책이다. 인물과 관련한 지역 명소들이 따로 소개되어 있다. 발 품 팔아 만든 의미 있는 인문 여행서라 할 만 하다.

* 공자와 손자 ‘자사’ - 공자의 아들이 이(鯉), 그 아들이 급(伋)이다. 공자의 손자인 급의 자가 자사(子思)다. 그는 대학과 중용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자사는 공자와 안자 증자 맹자와 함께 ‘유교 5대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 청년 공자에게 준 노자의 한 마디 - 공자가 젊은 시절 타국을 여행하다가 초나라 사람 노자를 만난다. 노자는 당시 공자에게 “자식으로서 부모 앞에 내세우지 말고, 신하로서 군주 앞에서 함부로 나서면 안된다”는 교훈을 주었다고 한다.

* 정조와 사민이시(使民以時) - 공자는 논어 학이편에서 ‘천하의 패권을 쥐고자 한다면 일을 신중하게 처리해 백성의 믿음을 얻어야 하며, 씀씀이를 줄여 백성을 아껴야 하며, 백성에게 일을 시킬 때는 시기를 가려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선시대 이를 실천한 인물이 정조대왕이다. 1794년 수원화성 공사를 시작하면서 흉년에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이해해 공사를 쉬게 하는 애민 사상을 실천했다. 사도세자 무덤인 현륭원 앞 저수지 만년제를 백성 한 사람 동원 않고 단기간에 완성한 것을 기뻐했다고 한다. 그는 “노약자나 부녀자, 귀머거리까지 이 나라의 모든 백성이 나의 적자가 아닌 이가 없다”고 했다. 정조는 화성 외곽에 동서남북으로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장안문 밖 송죽동의 만석거(萬石渠)가 대표적이다. 만석이나 되는 쌀을 생산하려는 목표를 정했을 만큼 애민 사상이 컸다.

* 이황의 온고지신(溫故知新) - 논어 위정편에 공자는 ‘옛 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알아내면 스승(군자)가 될 수 있다’고 설파했다. 이황은 46세 때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내려왔는데, 이 때부터 호를 퇴계라 불렀다. 율곡 이이와 고봉 기대승 등 후학들과 깊은 교류 나누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성현들의 이론을 바탕으로 ‘성학십도’라는 책을 썼는데 이것은 준비안된 선조의 성군 교과서였다. 퇴계 사망 후 후견인들이 도산사원을 지었는데, 공자의 77세 적손이자 마지막 연성공(衍聖公. 황제가 내려준 작위)이었던 고 공덕성 선생이 방문해 쓴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는 비석을 세웠다. 안동을 공자의 후손도 ‘공자 맹자의 고향’ 같은 곳으로 인정한 것이다. 퇴계 선생 묘소 근처에는 시인 이육사 문학관이 있고, 안동에는 유교문화박물관, 하회마을에는 병산서원 등이 있다.

* 송준길의 회덕회토(懷德懷土) - 공자 왈 “군자는 베풀 덕을 생각하고, 소인은 편히 살 방도를 추구한다”고 했다. 공자는 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덕으로 다스리면 백성은 절로 따라온다는 뜻이다. 공자는 또 5가지 미덕과 4가지 악덕을 설파했다. 5가지 미덕이란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되 낭비하지 않고, 일을 시켜도 원망을 사지 않으며, 뜻을 이루되 탐욕스럽지 않고, 넉넉해도 교만하지 않으며, 위엄을 갖추되 사납지 않은 것을 말한다. 4가지 악덕은 가르치지 않고 죽이는 잔혹함, 사전 주의없이 결과만 따지는 포악함, 명령은 느슨하게 하고 기일을 재촉하는 사악함, 나누어 주어야 할 것을 주지 않는 인색함이라고 했다. 동춘당 송준길은 병자호란 후 어수선한 때에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즉각적으로 세금을 탕감해 주고, 각 고을의 창고를 개방해 백성을 구제하라고 청했다. 송시열에 가려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송준길은 효종과 현종의 스승이자 숙종의 원자 시절 스승이었다. 서인 계열이었지만 남인 퇴계 이황이 흠모할 정도였다.

* 이순신의 선난후획(先難後獲) - 어려운 일은 앞장서 하고, 이익을 챙기는 일은 나중으로 돌리라는 뜻이다. 논어 옹야편에 나온다. 공자는 선사후득(先事後得)이란 말로도 가르쳤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바로 직전에 모든 준비를 맞았다. 임란 1년 2개월 전 전라좌수사로 오자마자 성벽과 해자를 정비하고 여수 앞바다에 걸 쇠사슬을 준비하고 판옥선과 거북선을 건조했다. 임란 보름 전 거북선의 시범운행을 성공리에 마쳤고. 하루 전에 거북선에서 지자총통 현자총통 시험발사에 성공했다. 이순신 장군은 제갈량을 흠모했는데, 이순신 사후 신도비명을 쓴 윤증이 제갈 승상의 시호가 충무(忠武)임을 고려해 이순신 장군의 시호도 충무로 적었다. 결국 그의 시호로 결정됐다. 통영에는 박경리 유치진 김춘수 윤이상 등 문화예술계 거목들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 정약용의 불욕부절(不欲不竊) - 논어 안연편에 윗 사람이 탐욕을 버리면 백성은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공자는 계강자를 포함해 삼환을 정권을 훔친 자로 규정하고, 군자라면 이러한 나라에 출사해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고 설파했다. 정약용은 정조의 최측근 인사조차 단죄해야 한다는 건의를 올린다. “법을 적용할 때는 마땅히 임금의 최측근부터 시작해야 한다”며 결국 단죄를 이끌어 냈다. 다산 정약용의 정치 인생 목표가 ‘정조의 요순 임금 만들기’였다고 한다. 다산이 사도세자 죽임을 당했던 임오년 생임을 알고 정조가 그를 더욱 아꼈다는 후문이다.

* 조헌의 살신성인(殺身成仁) - 공자는 인(仁)이 물이나 불보다 중요하다고 늘 강조했다. 인은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말라고 가르칠 정도였다. 일본이 한양에 와 통신사 파견을 요구하자 일본 사신의 목을 베여야 한다고 간언하기도 했다. 남쪽 백성들을 북방 국경선으로 이주시키려하자 대궐 문 앞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논시폐소 지부상소(論時弊疎, 도끼를 메고 상소올리는 것)를 올리기도 했다. 선조가 잦은 상소에 “조헌은 간귀(奸鬼)”라며 크게 화를 낼 정도였다고 한다. 일본이 호남 바다가 아닌 동남 해안(부산 일대)으로 상륙해 조령과 죽령 추풍령을 통해 한양으로 진격하리란 것을 미리 예견해 대비할 것을 청했으나 그마저도 배척됐다. 율곡 이이와 성혼, 토정 이지함을 스승으로 둔 덕분이었다. 조헌은 임란이 일어나자 지체없이 의병을 일으켜 죽기로 맞섰다. 협공하기로 했던 권율의 지원군이 오지 못하는 바람에 결국 금산전투에서 700명이 몰살을 당했다. 제자들이 시신을 수습해 한 무덤에 묻고 ‘칠백의총’이라 이름 지었다.

* 정탁의 군이부당(群而不黨) - 공자는 중용의 덕을 중시했다. 군자는 사람들과 화합하지만 이익을 위해 부회뇌동하지 않고, 소인은 이익을 위해 부회뇌동 하지만 화학하지 못한다’고 했다. 중용에서는 이를 화이불류(和而不流, 어울리되 휩쓸리지 말라)로 강조했다. 정탁은 이순신이 선조의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게 되었을 때, 72세 병환 속에서도 임금에게 글을 올려 이순신 구명에 나섰다. 어떤 파벌에도 속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의 후손들은 정탁 대감의 제사에 매년 참가해 오면서 그를 ‘약포 할아버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정탁은 명나라 이여송이 벽제관 전투에서 패하자 휘하의 풍수 전략가 두사충에 죄를 뒤집어 씌워 참하려 했을 때도 살려 냈다.

* 이이의 견득사의(見得思義) - 공자는 군자가 늘 생각해야 할 9가지가 있다고 가르쳤다. 보는 것은 명확한지, 듣는 것은 분명한지, 안색은 온화한지, 몸가짐은 공손한지, 말은 치우침이 없이 충실한지, 섬김은 정중한지, 의문점은 물어보려 하는지, 분노엔 뒤탈이 없는지, 이득을 보면 옳은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율곡은 마지막 ‘견득사의’를 ‘의를 좋아하는 자는 나라를 위하고, 이를 좋아하는 자는 자기 집을 위하기 마련’이라고 해석했다. 율곡이 사망한 후 남은 재산이 없어 장례조차 문하생들과 친구들이 모아 치렀다고 한다. 율곡의 자경문(自警文) 11개 조항도 참고할 만 하다. 성인에 이를 때까지 부지런히 노력한다, 마음이 안정된 사람은 말이 적으니 말을 적게 한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노력을 한다, 혼자 있어도 삼길 줄 알아야 한다, 옳고 그름을 분간해 실천한다, 해야 할 일이라면 정성껏 한다, 옳지 못한 일을 행해 천하를 얻는다 해도 해선 안된다, 상대를 감화하도록 해야 한다, 공부에 힘쓰되 효과를 빨리 보려 보채지 말자 등이다.

조진래 기자 jjr2015@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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