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경제의 ‘신간(新刊) 베껴읽기’] <비커밍 스티브 잡스> 브렌트 슐렌더/릭 테트젤리

조진래 기자
입력일 2019-10-18 07:30 수정일 2020-05-29 11:46 발행일 2019-10-17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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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채 몰랐던 ‘독불장군 천재’ 스티브 잡스의 인간적인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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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평 >

이 책은 신간이 아니다. 2017년 4월에 한국에 첫 출간이 되었으니 2년도 훨씬 넘었다. 그럼에도 국내에 그리 널리 소개되지 않았고, 유명한 월터 아이작슨의 전기 ‘스티브 잡스’를 뛰어넘는 책이라고 판단해 소개한다. 이 책을 우연히 발견한 것도 한 고속도로 휴게소 가판대에서 였다. 저자들, 특히 포춘의 기자 브렌트 슐렌더는 “그와 인터뷰하려면 방탄조끼를 꼭 입고 가라”고 할 정도로 까칠하고 공격적으로 알려져 있는 잡스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취재했다. 때로는 기자와 취재원의 관계로, 때로는 속마음을 털어놓는 친구이자 반려자의 관계로 그는 잡스의 죽음 직전까지 함께 했다. 우리가 몰랐던 비즈니스의 뒷 얘기는 물론 좌충우돌 고집불통 천재에서 탁월한 경영자가 되기 까지 그의 노력과, 그에게 힘과 지혜를 준 지인들에 관한 얘기가 풍성하다. 그가 죽어도 용서 못할 두 명의 ‘사악한 놈들’에 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대단한 역작이다.

< 베껴두면 도움이 될 내용들 >

◇ 완성되지 않았던 초창기 잡스

* 힌두교를 거쳐 불교를 섭렵한 잡스 - 잡스는 한 동안 인도에서 힌두교를 체험했다. 힌두교의 승자가 되겠다는 일종의 로맨스를 갈구했다. 하지만 금욕적인 힌두교 보다는 더 허용되는 것이 많은 불교로 옮겨간다. 불교 철학에서 인생은 종종 끊임없이 변화하는 강에 비유되는데, 모든 것과 모든 개인은 끊임없이 생성의 과정을 밟는다는 의미를 깨닫는다. 완벽의 달성을 향한 지속적인 과정과 목표, 그것이 바로 잡스의 까다로운 본성에 들어맞는 비전 임을 인식한다. 잡스는 나중에 오토가와 고분 치노라는 이름의 불교승려를 일주일에 한 차례 사무실로 초빙해 자신의 영적 감각과 사업 목표에 어떻게 균형을 맞추는 게 좋은 지에 관해 조언을 구했다.

* 수도승 ‘사두’가 될 뻔한 잡스 - 구도자들에 이끌렸던 잡스는 인도를 오랜 시간 체류할 기회가 있었다 그 때 사두(sadhu)가 되는 것에 대해 잡시 고민한 적이 있다고 한다. 사두란 오로지 영성에 집중하는 방편으로 최대한 궁핍하게 사는 수도승 같은 존재를 말한다. 하지만 그러기엔 잡스는 너무 갈망이 많았고 의욕과 야심이 넘쳤다.

* 아버지이길 거부했던 잡스 - 1978년 여자친구였던 크리스앤 브레넌 사이에서 딸 리사를 낳았지만 자신이 리사의 아버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양육비 지불도 거부했다. 법원의 명령으로 친자확인까지 했음에도 수긍을 않다가 나중에야 받아들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잡스에 대한 나쁜 선입견이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 다시 태어나는 잡스

* 누구에든 도움청하길 두려워 않았던 잡스 - 정보를 얻거나 도움을 청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는 일에 그는 전혀 거리낌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14세때 HP(휴렛패커드)의 빌 패커드에게 전화해 도움을 요청한 것을 시작으로 최초의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탈 가운데 하나인 세콰이어캐피탈의 돈 발렌타인, 아메리카은행에 신용대출까지 알선해 준 A.C. 마이크 마쿨라, 메모리칩을 버리고 인텔을 마이크로프로세서 기업으로 변화시킨 앤디 그로브 등과 끈끈한 관계를 만들어 냈다.

* 타고난 지휘자 성향 - 잡스의 가까운 지인들은 그가 타고난 지휘자 성향을 지녔다는 평가를 이미 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을 규합해 종종 자신만이 볼 수 있었던 목표를 추구하도록 설득하고, 그 목표를 향해 협력하며 나아가도록 조정하는 천부적 재능을 소유했다는 것이다.

* 잡스에게 신천지 열어준 제록스 PARC - 제록스 펠러앨토 연구센터. 훗날 중요한 기술 다수의 개념을 개발해 유명세를 탔다. 이더넷 근거리통신망(LAN), 고해상도 비디오 모니터, 레이저 프린팅, 객체지향 프로그래밍 등이 모두 이곳의 산물이다. 잡스는 여기에서 컴퓨터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고 믿었던 모든 것의 초기 기술을 목도하고 영감을 얻었다.

◇ 비즈니스에 눈을 뜨기 시작한 잡스

* 엔지니어링 귀재들의 집합소 루카스필름 - 애플에서 쫒겨나기 전에 잡스가 이사회에 인수를 권했을 정도로 애착을 가졌던 팀이다. 3차원 이미지를 조작하는 놀라운 기술에 매료된 잡스는 현금으로 500만 달러를 조지 루카스에게 지급하고 500만 달러를 추가로 산하 그래픽스 그룹에 투자 하기로 약속하고 인수했다. 당시 그래픽스 그룹의 리더가 훗날 픽사의 CEO가 되는 에드 캣멀이다.

* 잡스의 현명한 동반자 캣멀 - 에드 캣멀은 유타 출신의 컴퓨터 공학자다.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전공해 잡스의 꿈을 실현시켜 주었다. 훗날 세계에서 가장 비범한 경영자 가운데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잡스는 캣멀의 성실성과 감정의 깊이, 합리성을 존경해다. 잡스는 “픽사 팀은 내가 본 가운데, 놀라운 인물들이 가장 고도로 밀집된 무리”라고 극찬했다. 그런 조직을 만든 이가 캣멀이다.

* 3D 컴퓨터 그래픽 영화 개척한 픽사, 잡스를 키운 픽사 - 영화에 3D 컴퓨터 그래픽을 도입하고 애니메이션 스토리텔링 예술을 부활시킨 주역이 존 래스터와 에드 캣멀이다. 픽사는 이 두 사람이 형성한 조직이다. 픽사에선 잡스가 이들에게서 배운 기간이다. 배짱과 자신감에 기술과 신중함을 배가시킨 기간으로 평가된다. 래스터는 “다른 사람의 재능에 기꺼이 마음을 열고 고무되고 도전의식을 북돋게 되었고, 자신이 직접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모종의 놀라운 일을 해내도록 사람들을 고무하는 데 더욱 열정적이게 바뀌었다”고 말했다.

◇ 잡스가 사악하다고 말한 두 사람

* 잡스의 특이한 인물평가법 - 잡스는 사람들이 방에 들어오면 그들이 멍청이인지 아닌지 빠르게 진단했다. 사람들의 역량을 알아보는 방편으로 충격적인 언사를 늘어놓고 반응을 떠보며 평가했다고 한다.

* 잡스가 사악하다고 평가한 두 사람 - 애플에 몸 담았던 장 루이 가세, 디즈니의 CEO 마이클 아이즈너 두 사람이다. 가세는 1985년 봄 애플의 세일즈 및 마케팅 임원으로 있을 당시, CEO 스컬리에게 잡스의 지배권 반란 계획을 귀뜸한 인물이다. 이후 잡스가 애플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사사건건 맞섰다. 아이즈너는 잡스가 토이 스토리 대성공 이후 디즈니와의 계약 조건을 바꾸려 할 때 협상 파트너였다.

* 지친 잡스를 화나게 한 구글 - 생애 마지막 수년 동안 잡스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은 구글이었다. 2008년 구글이 애플 고유의 운영체제인 iOS를 여러 측면에서 모방한 모바일 운영체제 안드로이드를 발표했을 때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특히 구글의 CEO이자 회장인 에릭 슈미트가 수년간 애플 이사회에 참가했을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는 점도 배신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잡스가 더 참기 힘들었던 것은 구글이 안드로이드를 휴대전화 제조사들에게 무료로 제공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그는 세상을 떠나기 불과 몇 개월 전인 2011년에 삼성전자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안드로이드가 무료로 제공되었고, 구글이 직접적인 금전적 이득을 거의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글을 공격할 수 없어 휴대전화 제조업체를 뒤 쫒은 것이다. 이후 2014년에 애플은 미국 외 다른 국가에서 제기된 안드로이드 관련 소송은 모두 취하에 합의했다.

◇ 애플과 잡스의 부활 디딤돌이 된 픽사

* 디즈니와의 역사적인 협업 - 디즈니 출신의 레스터는 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 책임자인 피터 슈나이더가 그를 데려가려 찾아왔을 때, 디즈니와 픽사의 공동 영화 제작을 건의해 마침내 성사케 했다. 결국 디즈니는 <토이 스토리> 제작에 자금을 대고 이후 두 차례 더 애니메이션 영화를 제작 지원할 수 있는 선택권을 받았다. 픽사는 박스오피스 수익의 12%를 받기로 햤다. 나중에 영화가 대성공 거둬 전 세계적으로 3억6100만 달러의 흥행수입 올렸다. 하지만 픽사에 돌아온 것은 약 4500만 달러에 불과했다. 디즈니는 3억1600만 달러를 챙겼다. 게다가 픽사는 비디어 판권 지분이 전무했다. IPO로 1억3000만 달러를 손에 쥔 덕에, 픽사는 초기처럼 디즈니의 자금지원 받을 이유가 없어졌기에 계약 재협상을 추진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두 회사는 공동투자사로 바뀌게 되고, 모든 이익을 반반씩 나누고 5편의 영화를 더 만드는 것에 합의한다. 잡스의 애플 복귀를 가능케 한 여건이 만들어지게 된다.

* 픽사의 문화를 바꾸지 않는다는 전제로 디즈니와 매각협상 - 잡스는 디즈니의 신임 CEO 아이거와 매각 협상을 벌였다. 아이거 역시 디즈니가 예전의 월크 디즈니로 돌아가야 한다는 믿음으로 잡스와 의기투합했다. 아이거는 “디즈니는 애니메이션이 강할 때 순이익이나 명성이 최고조에 달했던 회사였다”고 했다. 아이거는 레스터가 작성한 픽사 문화의 시금석 목록의 75가지 조항 중 어느 것도 변경 혹은 삭제 않는다는 데 동의했다. 직원 식당의 상설 시리얼 바, 매년 열리는 종이비행기 대회, 임직원 자동차 쇼, 애니메이터들의 업무 공간 보장 등의 요구를 모두 들어줬다. 레스터와 캣멀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디즈니의 부활을 진두지휘할 위치에 올려 주었다.

◇ 쫒겨난 애플에 복귀의 꿈 잃지 않았던 잡스

* 애플과의 인연을 놓치 않았던 잡스 - 잡스는 애플을 나온 이후 10년간 애플 주식 한 주를 계속 보유하고 있었다. 주주 정보자료를 받아볼 수 있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연례 주주총회 참석도 고려했다고 한다. 1995년 잡스의 억만장자 친구인 래리 앤더슨이 애플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적 매수 제의까지 했으나 잡스는 거부했다. “내 돈으로, 내 힘으로 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 경영고문으로 애플에 복귀한 잡스 - 일단은 CEO로 복귀 않고 열심히 돕는 역할을 자임했다. 그의 첫 움직임은 이사회에서 모든 직원의 스톡옵션을 13.81달러로 값을 다시 매기는 결정을 내리도록 한 것이다. 두번째는 자신에게 사실상 이사회 임원 전체를 교체할 수 있는 전권을 달라고 했다. 오라클 창업자 랠리 앨리슨, IBM과 크라이슬러 CFO 출신 제리 요크, 인튜이트의 CEO 빌 캠벨, 그리고 본인으로 이사회를 전면 교체하려 했다.

* iCEO라는 직함을 만든 잡스 - 본인이 정식으로 애풀의 지휘권을 잡는다고 발표했을 때도 그는 ‘임시(interim) CEO’로 일한다는 데에만 동의했다. (인터넷 모바일 부문 CEO라는 의미도 부여할 수 있을 만큼, iCEO 직함이 매우 매력적이다.) 당시만 해도 빌 게이츠 조차 우려할 만큼 애플의 상황이 안 좋았기 때문에 그는 '임시'라는 타이틀을 원했을 지도 모른다.

◇ 드디어 잡스에 의해 되살아난 애플

* 애플을 살리다 - 잡스는 복귀와 함께 네 가지 조치를 취했다. 첫째는 ‘다른 것을 생각하라(Think Different)’는 광고를 제작해 애플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정체성을 보여주었다. 둘째, 일부 라이선스 계약을 폐기했다. 그는 자신의 운영체계를 남의 손에 맡기지 않고 직접 관리하길 원했다. 셋째, 1998년 3월에 재고관리의 최고 권위자 팀 쿡을 데려와 COO 자리에 앉혔다. 넷째, 또 한 차례의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1900명을 내보냈다. 잡스는 자신이 떠난 후 돌아올 때까지 직원 3분의 1에 해당하는 A에서 A플러스급 직원들이 남아 있음을 확인하고 과감히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 빌 게이츠가 본 ‘달라진 애플’ - 빌 게이츠는 잡스 복위 이후의 애플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예전의 맥 팀이나 넥스트 직원들은 스티브가 폭발하면 모두 뿔뿔이 구석으로 숨기 바빴어요. 하지만 새로운 애플의 경영팀은 되받아치면서 결속력을 보여주었어요. 여전히 성질은 불같았어도 잡스가 팀의 의견을 존중했다는 의미지요.”

* 기대치 않았던 기술적 발전이 아이폰으로 승화되다 - 아이러니하게도 휴대폰과는 전혀 관계없이 시작된 2개의 프로젝트가 애플이 다음에 추진할 제품을 잡스가 결정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나는 ‘퍼플 프로젝트’로, 잡스가 개인 컴퓨팅에 획기적인 ‘형태 요소’를 적용할 방법을 찾아보라 지시하여 개시된 모종의 비밀 실험이었다. 작은 책자나 클립보드 형태에 터치 스크린으로 상호작용이 가능한 초소형 휴대용 기기를 개발하라는 주문이었다. 키보드나 마우스 사용보다 더 직접적이고 직관적으로 컴퓨터와 상호작용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의 노력은 잡스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진척되고 있었다. 유저 인터페이스 기술이다. IBM이 1960년대에 처음 개발한 터치 스크린 기술을 터치팬 방식을 지나 혁신 기술로 꽃피웠다. 휴대폰 혹은 음악이나 동영상 플레이어일 뿐만 아니라 온전한 성능을 갖춘 컴퓨터, 다시 말하면 인터넷에 연결할 수 있는 스마트폰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 아이폰, 준비없이 먼저 공개되다 - 아이폰은 2007년 1월9일 샌프란시스코 모스콘센터에서 열린 연례 맥월드 행사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그때 까지만 해도 소프트웨어에 치명적인 결함들이 있었고 유통 단계로 넘어갈 준비도 전혀 안되어 있던 때였다. 하지만 잡스는 사전 공개를 강행했다. 이유는 아이폰 유통을 담당하기로 한 AT&T에 무언가 보여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잡스가 ‘위대한 쇼 맨’ P.T. 바넘의 화신이었다는 점도 한 이유였다. 그리고 1월에 열리는 맥월드 콘퍼런스는 잡스가 무언가를 공개하기에 최적의, 최고의 장소였다는 판단도 한 몫 했다. 여타 단말기 회사가 신제품을 공개하는 라스베이거스 CES에 쏠리는 관심을 미리 가로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자신에 주어진 환경에 감사했던 인간 스티브

* 15분의 스탠퍼드대 연설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이 인생의 전기” - “그때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일은 제 인생 최고의 시간이었습니다. 성공에 대한 중압감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초심자의 홀가분함으로 바뀌었고, 제 인생에서 가장 창의력이 넘치는 시기로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만일 제가 애플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다면, 이 많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 잡스에 있어 과거란? - 에드 캣멀은 “스티브에게 과거는 교훈이 될 수는 있어도 그 이상이 될 수는 없었다. 그저 이미 사라진 시간일 뿐이다. 그의 질문은 늘 ‘무엇을 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였다.”

*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 2003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 신장결석에 병원에 가 초음파 검사 받아보니 췌장에 암 종양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발견되었다. 잡스가 걸린 암은 미 국립암센터에 따르면 미국에서 1년에 고작 1000명 꼴로 발병하는 병이었다고 한다.

◇ 앙숙 빌 게이츠, 그리고 잡스에 대한 극단적인 평가

* 잡스에 대한 편견을 키운 아이작슨의 전기 - 잡스가 이기적이라는 평가에 아이작슨의 전기가 한 몫 한 것으로 쿡은 생각. ”스티브의 이런 면모를 세상은 잘 몰라요. 내 생각에 월터 아이작슨의 책은 스티브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 것 같아요. 그 책은 이미 글로 알려진 다수위 내용을 거의 그대로 재탕해 놓고 그의 인성의 사소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었어요. 독자들은 스티브가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며 병적으로 자기중심적이라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거예요.“ 쿡은 잡스의 친한 동료나 친구 다수가 왜 자기들이 그토록 오랜 기간 그렇게 열심히 잡스를 위해 일했는지 그 이유를 감지할 수 있는 내용이 거의 없다고 불만을 터트렸다고 전함. 쿡은 ”스티브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변화할 줄 아는 용기가 있었어요.“

* ‘앙숙’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 두 사람은 거의 정기적으로 공개적으로 종종 서로를 고소해 가며 공격했다. 잡스는 게이츠에 대해 “미적 감각이라곤 쥐뿔도 없으며, 독창성도 거의 없는 속물”이라고 묘사했다. 반면 게이츠는 직설적으로 잡스를 “자기자신의 어리석은 결정으로 별 볼일 없게 된 패자”라고 깎아 내렸다. 잡스는 특히 마이크로소프트가 애플의 아이디어를 모방해 윈도를 만드는 죄를 저질렀다고 줄곳 비판했다.

◇ 잡스를 성숙하게 만들어준 프렌드들

* 잡스에게 가능성을 확신케 해준 워즈니악 - 잡스보다 5살 위인 워즈는 잡스에게 위대한 엔지니어링의 본질적 가치를 가르쳤다. 그의 업적은 기술 천재만 옆에 둘 수 있다면, 그 무엇도 가능하다는 인식을 잡스에게 강력하게 심어준 것이다. 워즈 역시 잡스가 없었다면 자신이 결코 그렇게 눈부시게 성공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 라이벌 의식이 강했던 잡스와 워즈 - 애플 초창기에 잡스의 멘토였던 마이크 스콧은 애플 직원 모두가 착용하는 사원증을 만들었다. 워즈에게 1번이 주어졌다. 잡스가 푸념을 늘어놓았고 결국 그는 0번을 갖게 되었다.

* 신뢰로 교감한 잡스와 아이거 - 잡스는 자신의 암이 재발한 사실을 2006년 1월 디즈니와의 마지막 계약 직전에 아이거에게 실토했다. “내가 당신에게 털어놓는 이유는 당신에게 거래를 철화할 기회를 주고 싶어서”라면서. 계약 사실 공식 발표 30분 전이었다. 아이거는 이렇게 말한다. “디즈니는 픽사를 사는 것이지, 당신을 사는 것이 아니니 문제없어요.” 이후 들은 들도 없는 친구가 된다.

* 잡스와 쿡의 우정 - 잡스가 투병에 들어가면서 쿡이 잡스의 집으로 방문해 회사 문제를 논의했다. 어느 날 쿡이 자신의 혈액형을 검사하다 희귀 혈액형임을 알게 된다. 이 때 간을 잡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지 일련의 검사를 받기로 결심한다. 잡스의 간 이식 필요성이 2009년 1월부터 줄곳 제기되어 왔던 터였다. 잡스를 그냥 죽게 내벼려 둘 순 없다고 판단한 그는 검사 후 잡스에게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라 권했다. 하지만 잡스는 “안돼. 절대로 안될 일이야”라며 단 칼에 거절했다. 두 사람은 잡스 사후 애플의 운명에 대해서도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월트 디즈니 사후 디즈니의 기업문화가 침체된 아픈 전력을 따라 가지 말아야 한다고 쿡을 독려했다. 쿡은 그를 이어 애플의 CEO가 된다.

조진래 기자 jjr2015@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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