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100] 주문 깜빡해도 호호… '격리' 치매환자 '격려' 동료로

채현주 기자
입력일 2018-04-02 07:00 수정일 2018-04-03 15:20 발행일 2018-04-02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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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주의 닛폰기] '치매 노인이 서빙하는 식당'이 가져다 준 변화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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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의 한 식당. 함박스테이크를 주문했는데 만두가 나오고, 식사도 하기 전에 디저트를 갖다 주는 실수를 연발하는데도 손님들은 웃으며 “괜찮다”고 한다. 주문을 하는 손님이나 실수를 하는 종업원이나 화를 내거나 미안해하기보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이 상황을 즐기는 분위기였다.

이날 서빙을 맡은 종업원들은 모두 치매 환자들이다. 식당의 이름도 ‘주문을 틀리게 하는 식당’이다.

방송국 PD로 일하는 오구니 시로(小國士郞·39) 씨가 ‘치매 환자들도 보통 사람처럼 활동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 주기 위한 취지로, 지난해 6월 3일부터 이틀 동안 한시적으로 문을 열어 일본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오구니 씨는 “이 식당을 통해 치매 문제들을 푸는 실마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작은 실수들을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함께 즐기자는 관용이 주변에 퍼진다면 치매 환자들도 보통사람과 어울릴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을까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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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을 틀리게 하는 식당’에서 치매 환자들이 고객들과 어울려 일하는 모습 (mKeCpng8YLs 유투브 캡쳐)
◇“실수해도 괜찮아” 미소로 가득찬 식당

그리고 3개월 뒤, 이 식당은 ‘세계치매의 날(21일)’을 맞아 지난해 9월 16일부터 이틀 간 도쿄 롯폰기에서 다시 열렸다. 두번째 오픈에서는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행사를 준비했고, 목표액 800만엔(약 8160만원)보다 많은 1291만엔(약 1억3200만원)의 자금이 모였다. 이날 하루에 300명 이상의 방문객이 몰리는 등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고객들의 90%는 식당을 또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이날 18명의 치매 환자가 종업원으로 참여했고, 이중 6월에 참여한 이들도 있었다.

이 식당 종업원으로 일을 했던 미용사 출신인 요시코(74) 씨는 일하는 내내 휴식도 취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실수를 하긴 했지만 그녀는 일이 생겼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주문을 틀리게 하는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했던 직원들은 그동안 치매로 자신감도 상실하고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틀리면 다시 하면 된다”는 인식이 허용된 이 곳에서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고, 활력도 넘쳐보였다.

이 식당 프로젝트가 성공하기까지는 치매 간병 전문가인 와다 유키오(和田行男·61) 씨의 큰 노력이 있었다. 와다 씨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20곳 이상의 시설을 총괄하는 매니저이다. 그가 목표로 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평범하게 사는 모습을 뒷받침하는 간병”이다. 그러기 위해선 그는 치매 노인들도 일할 장소가 필요하다며,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는데 누구보다도 앞장서왔다. 기획자 오구니 씨는 “앞으로 일본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이 같은 프로젝트가 확산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이 프로젝트는 전국적으로 조금씩 확산되어 가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전시장 세차부터 화단 가꾸기까지...

‘주문을 틀리게 하는 식당’에 영향을 받아 도쿄도 마치다(町田)시에서도 ‘주문을 틀리게 하는 카페’가 개최되는가 하면 치매 환자들이 일을 하는 곳들도 생겨났다.

자동차 판매점의 전시장에서 세차 일을 하는 65세 이상의 치매 환자들. 이들은 누구보다 전시된 차를 열심히 씻고 닦는다. 이들의 꼼꼼한 일 솜씨가 소문이 나면서 다른 판매점에서도 잇따라 세차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이 소식은 일본 언론을 통해 전해졌고 치매 환자들에게 화단 가꾸기, 아동 보육 도우미 등 다양한 일거리들이 맡겨지기 시작했다.

고령자 보호센터인 데이케어센터는 이 같은 치매 환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적극 나서고 있다. 데이케어센터 측은 “가벼운 치매 증상으로 신체는 멀쩡한데 일을 포기하는 것이 안타깝다”며 “일하는 것은 치매환자 증상완화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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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을 틀리게 하는 식당’ 스태프들의 기념사진 촬영 모습 (mKeCpng8YLs 유투브 캡쳐)
◇‘생활 속 케어’ 정책으로 재정비

고령화 나라 일본의 치매 환자는 약 520만명(2015년 기준, 日경찰청)이다. 고령자 7명 중 1명이 치매로 고통을 겪고 있다. 2050년까지 700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일본 정부도 국가 치매 대응 전략에 나섰다. 치매 환자를 단순히 보호 대상으로만 대응할 것이 아니라 환자와 그 가족들의 의견 등을 반영해 치매 정책을 펼치기로 했다. 특히 치매 환자도 사회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환경을 정비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 같은 국가 정책에 맞춰 각 지역에서도 치매 카페 설치, 치매 서포트 배치, 치매 교육 등 치매 환자들과 친화적 환경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펼치는 곳들이 늘고 있다.

오키나와현 우라소에(浦添市) 시에서는 얼마 전 초등학생들에게 치매 환자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교육과 연극 등을 펼쳤다. 교육을 접한 한 초등학생(11살)은 “치매에 걸린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말을 걸어 주고 싶다. 화내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부드럽게 대응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의 치매 환자는 약 72만5000명(2017년 복지부)으로, 2024년에는 1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됐다. 이에 한국 정부도 치매 환자를 국가가 책임지고 관리하겠다고 밝혔지만, 요양 병원 등에서의 단순 돌봄 대상으로만 인식해서는 해결책을 내놓기 쉽지않아 보인다. 빠른 고령화가 진행되는 한국도 사회적 인식을 바꿀 수 있는 정책들을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채현주 기자 chjbrg@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