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다우 2만포인트, 저주인가 축복인가? 증시역사 속에 답이

김희욱 국제전문기자
입력일 2016-12-22 10:30 수정일 2016-12-22 10:37 발행일 2016-12-22 99면
인쇄아이콘
99년 바이코리아 열풍 '새록새록'
clip20161222093914
1972년 11월15일 뉴욕타임즈지 1면 캡처

트럼프 대통령 당선 후 파죽지세로 신고점을 갈아치우는 뉴욕증시, 이제는 역사적 신기록 다우지수 20000p를 눈 앞에 둔 상황이다.

‘트럼프랠리’로 이름 붙여진 미 증시역사상 보기 드문 달러와 주식의 동반랠리 속에 올 해 내로 다우 20000p 달성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이렇게 기념비적인 지수대를 달성하고 나면 이것이 차익실현의 ‘트리거(방아쇠 효과)’로 작용한다는 우려도 만만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정치·사회·문화와 마찬가지로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진리를 바탕으로 다우지수가 사상 처음으로 1000p 를 넘었던 당시의 사례를 면밀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44년전, 때는 미국의 닉슨 대통령 시절 그러니까 베트남전쟁이 한창이고 결국 대통령 하야로 매듭지어진 ‘워터게이트’ 사건이 수면위로 올라 온 직후였다. 이렇게 대내외적인 불안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갑작스레 달러와 주식가치가 동반상승하는 이변이 연출된 것이다.

당시 11월15일자 뉴욕타임즈는 다우지수가 1003.16p로 신기록을 달성했다는 기사를 1면 하단에 조그맣게 실었다.

당시 기사에는 다분히 ‘심리적’ 효과로 다우지수가 1000p를 넘겼고 여기에는 닉슨대통령의 경기부양의지가 지렛대 역할을 했다는 내용이 언급됐었다.

심지어 현지 애널리스트들은 6개월 가량 경기를 선행하는 증시의 이 같은 기념비적인 성과를 실물경제에 대한 자신감이 확고해진 증거라며 후행적인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정확하게 10개월 하고 보름 후 다우지수는 정확히 598.48p에 가 있었다. 1000p 신고점을 기록한 후 1년도 채 안돼 44%가 급락한 것이다.

한국 증시역사에는 이 같은 기록이 있을까?

IMF구제금융 발표직 후 277p까지 하락했던 코스피는 1999년 마침내 봄을 맞게 됐다. 당시 IMF 극복과 함께 모처럼 강세장이 찾아오고 코스피는 단 1년만에 외환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이어 심리적 고점으로 인식되던 1000p를 단 숨에 돌파한 배경에는 바로 ‘유동성’이라는 스테로이드의 작용이 있었던 것이다.

clip20161222102342
바이코리아 CF, 유투브캡처

당시 한국증시라는 작은 연못을 큰 저수지로 바꿔놓았던 ‘바이코리아’라는 펀드에는 1999년말 당시 무려 10조원의 자금이 몰렸다.

지금은 가입이 중단된 이 펀드를 판매했던 당시 H증권은 코스피가 5년내 6000p까지 간다고 호언장담하며 투자자들을 끌어모았다.

하지만 1000p를 돌파한 코스피는 2000년 1월 1059p를 최고점으로 역시 10개월만에 반토막인 500p까지 급락하고 만다.

역사적으로 주식시장만큼 심리적 분석이 잘 통하는 대상도 없을 것이다.

100년전 ‘돈,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다루어라’의 저자 앙드레 코스톨라니(1906~1999) 시절부터 유행했던 ‘소문에 사서 뉴스에 팔아라’는 증시격언은 지금도 Fed(연방준비제도) 회의를 비롯, 크고 작은 기업들의 실적발표 때도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투자자들의 반응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고 다우지수 20000p를 반드시 ‘저주’ 혹은 ‘축복’ 같은 이분법적인 사고로 접근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다만 과거나 현재, 비록 구성원은 달라졌을지라도 여러 다양한 사람들의 심리가 충돌하는 시장에서 ‘일정한 패턴’이 반복된다는 점은 알아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김희욱 국제전문기자 hwkim@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