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필품 사재기·뱅크런…러시아, 전쟁방불

김효진 기자
입력일 2014-12-17 17:24 수정일 2014-12-17 18:12 발행일 2014-12-18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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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16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에 위치한 한 옷가게가 고객들의 발길이 끊겨 스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는 중앙 은행의 파격적인 기준금리 인상에도 루블화 가치가 하락하면서 식료품부터 가구까지 생필품을 포함한 거의 모든 제품 가격이 한없이 오르고 있다.(AP=연합)

“지갑 속 루블화가 전부 없어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다”

휴지조각이 되고 있는 루블화를 가진 러시아 시민들이 던지는 씁쓸한 농담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 등 주요외신은 16일(현지시간) 서방의 제재 및 유가하락 등으로 사재기 현상, 뱅크런(대규모 예금인출 사태) 등 러시아 국민들이 실제로 전쟁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 모스크바 중심부의 예프로페이스키 쇼핑센터의 한 가전제품 매장 점원은 “루블화보다 가치가 높다고 생각되는 TV, 노트북 등 가전제품들을 한 번에 많이 사가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며 “식료품부터 가구까지 생필품을 포함한 거의 모든 제품 가격이 한없이 오르고 있다”고 전했다.

신문은 러시아인들의 주식인 메밀 가격이 올해 들어 65%나 올랐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소매기업연합회에 따르면 식품 가격 상승률도 올해 평균 25%까지 치솟았다.

보석방이나 명품브랜드 상점들이 밀집한 도시 인근 쇼핑몰에는 가방이나 보석과 같은 내구재 구매를 늘리는 시민들이 몰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석방을 운영하는 알랴는 “최근 보석을 구매하려는 사람들도 늘어난데다 현재 상황이 최악이라고 여겨 가족 모두 2년 전부터 예금해 온 돈을 유로화로 바꿔놨다”고 전했다. 그는 “우리는 러시아에서 일하고 루블화로 임금을 받고 있다”며 “아무래도 서방국이 러시아를 일부러 다치게 하려는 것 같다”고 언급했다.

신문은 루블화를 가진 시민들이 새벽부터 환전소 앞에 줄을 서는 등 한시라도 빨리 돈을 바꾸기 위해 자리 다툼을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 일부 은행은 외화잔액이 100달러(약 10만원) 밖에 남지 않은 곳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러시아 최대 은행인 스베르방크 쿠르스키역 지점에서 대기열에 선 한 여성은 “연금을 인출해 달러로 바꾸려고 한다”며 “사람들이 환전을 한 뒤 재빨리 가게로 물건을 사러간다”고 설명했다.

경제가 악화됐음에도 불구하고 지난달 차량 판매량은 증가했다. 러시아 무역단체 유럽기업연합(AEB)은 12월 자동차 판매가 더욱 늘 것으로 전망했다.

엔지니어 안드레이 마트로소프는 “애널리스트가 최근 자동차나 아파트 같은 실물자산을 구매하는 게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며 “지금 상황에서 얼마나 더 경제가 나빠질지 아무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류보프 스테페나야는 “지난 주에 환전했으면 200유로(약 27만원)정도 받을 수 있었는데 지금 바꾸고 나니 150유로(약 20만원)정도 밖에 안 된다”며 실망했다.

정부에서 지급하는 연금 수급자 류드밀라 고르바쵸파는 “새해를 맞아 손주들한테 어떤 선물을 줄지 알아보고 있지만 다 너무 비싸서 엄두가 안 난다”고 전했다. 그는 “내년이 되면 지금보다 물가가 10% 더 오를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면서 “내가 자랄 때는 가난했지만 그래도 행복했는데 지금은 행복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김효진 기자 bridgejin100@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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