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팅" 외치며 '벌컥'…"잘가라" 동기들 보내며 '울컥'

최상진 기자,서희은 기자
입력일 2014-11-06 16:35 수정일 2014-11-06 17:44 발행일 2014-11-07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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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생이다] ③ 술잔 두번 기울이는 인턴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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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드라마 ‘미생’. 드라마속 주인공 장그래(인턴)는 가장 먼저 출근해 가장 늦게 퇴근한다.(사진제공=tvN)

“수많은 경쟁자를 제치고 인턴으로 합격했을 때만 해도, 입사 첫날 동기들과 맥주 한잔 걸치며 ‘파이팅’을 외치던 때만 해도, 대리님을 따라 이곳저곳 돌아다니고 배우며 OJT를 거칠 때만 해도 나는 이 회사의 일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PT면접장에 들어서자 이 모두가 철저하게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유통 중심 대기업의 대리 승진을 앞두고 있는 김모(29)씨는 드라마 ‘미생’에 등장하는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꼭 자신의 이야기와 같다고 말했다. 인턴으로 한 차례 호된 신고식을 치른 그녀는 “대기업인 만큼 인턴 프로그램이 만족스럽게 짜여있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남의 옷을 입고 남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미생’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가장 큰 요인은 직장인들의 고단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는데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인턴시절 복사와 커피 심부름 하나에도 쩔쩔매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아련한 추억에 잠기는 직장인도 많지만, 청년 구직자에게는 ‘미생’ 속 등장인물들이 바로 현실 속 자신의 모습이다. 최근 들어 정규직 전환을 전제로 한 인턴 채용규모는 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을 통해 정식 사원증을 목에 거는 이들은 채 절반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3~6개월간 소비되다 회사를 나서는 나머지 절반은 다시 수십통의 이력서를 들고 발을 동동 굴러야 한다.

인턴의 활용도는 직종과 기업 규모에 따라 판이하게 다르다. 현장 일손이 하나라도 더 필요하고, 기업 규모가 클수록 인턴에 대한 체계적인 시스템과 정규직 전환 절차가 잘 마련돼 있다.

공연 기획사에 근무하는 이모(30)씨는 “공연 홍보나 마케팅은 일손이 하나라도 급한 실정이다. 때문에 ‘처음에 잘 뽑아서 제대로 키워쓰자’는 생각이 강하다”고 말했다.

대기업일수록 인턴사원의 시스템은 철저하게 자리잡고 있다.

인턴과정을 통해 입사한 지모(27)씨는 “입사 초기부터 멘토·멘티 시스템을 활용하고 OJT 프로그램도 체계적으로 짜여진 상태라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업무 적응에 문제가 없었다”면서도 “인턴과정에서의 업무평가, PT를 통해 절반가량만 정직원으로 선발했다는 점은 선택받지 못한 이들의 노력을 평가절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 인사담당자들은 “선택권은 회사에도 있지만 인턴 당사자에게도 있다”고 항변했다.

중견기업 인사팀에 근무하는 이모(33)씨는 “젊은 층일수록 입사 후 충성심을 보이기보다는 업무강도, 처우를 먼저 계산하는 경우가 많다”며 “막상 신입사원을 뽑아놓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는 인력이 많다. 이런 사례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인턴제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면 중견·중소기업에서 현재 근무하거나 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청년구직자들의 반응은 상당히 비판적이다.

아웃도어 업체에서 근무하는 김모(25)씨는 “법정 최저임금보다 조금 많은 급여를 받으면서도 개같이 일한다. 이렇게 부려먹었으면 제대로 된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했고, 전자업체에서 인턴을 마친 허모(27)씨는 “직원이 아니라 아르바이트생 같았다. 인턴을 관리·교육하는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회사에 입사하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말했다.

최근 청년인턴제를 악용하는 기업이 늘어나면서 이들을 지칭하는 ‘블랙기업’이라는 용어도 생겨났다. 지난 9월 중소기업중앙회에서 계약기간을 쪼개는 일명 ‘쪼개기’ 방식으로 2년간 근무하다 정규직 전환 불가 통보를 받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권모(25)씨의 사례가 사회적 분노를 촉발한 것.

청년유니온 김민수 위원장은 “권모씨 사례에서 나타나듯 청년의 삶을 소진시키고 파괴하는 기업들의 행태를 묶어 ‘블랙기업’이라 정의하고 대응에 나서려 한다”며 “11월부터 장시간 노동, 인턴, 계약직에서 나타나는 부당행위 사례를 접수하고 관련연구를 거쳐 내년부터 본격적인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최상진·서희은 기자 sangjin8453@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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