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영화계 노동환경 개선이란 도돌이표

이희승 기자
입력일 2020-08-30 15:06 수정일 2020-08-30 15:23 발행일 2020-08-31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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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승 문화부 차장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예전 충무로에는 연봉 300만원이 허다했다. 상업 영화 스태프로 들어가야 그나마 저 정도 수준. 저예산이나 독립영화는 ‘재능기부’에 가까웠다. 당시만 해도 같은 영화학도끼리 조명, 스크립터, 분장, 동시녹음 혹은 조연출부터 보조출연까지 하는 일이 허다했다.

영화는 정해진 기한에 한편을 만들고 개봉하는 하나의 ‘프로젝트’로 여겨졌다. 이에 노동에 대한 대가도 ‘임금’으로 정확하게 계산되지 않았다. 팀 단위로 계약이 관행처럼 굳어져 계약금과 잔금을 받는 방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 ‘저임금’마저도 체불되는 일이 잦았다. 그나마 작품이 흥행하거나 감독이 유명해지면 ‘그때의 고생’은 술안주로 여겨진다. 좀더 예산이 큰 영화로 추천받아 경력을 쌓을 수 있고 그 상태로 계속 ‘존버’(기다리기 힘든 상황을 빗대어 기다리다라는 말)하다 보면 ‘창작자로서의 꿈’에 한발 다가선 뿌듯함마저 느끼게 된다. 예전엔 그렇게 영화계에서 자리잡는 게 영화계의 관행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영화진흥위원회 조사결과 표준근로계약서로 계약한 경험이 있는 영화 스태프 비율이 지난해 75%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 2014년(35%)에서 2배 이상 급증한 수치다. 영화계 표준근로계약서는 스태프들의 장시간 근로나 부당 처우를 막기위해 노사가 약정한 사항을 담은 계약서다.

영화 스태프들의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2011년 5월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 권고안으로 처음 발표된 뒤 2013년 4월부터 영화업계 노사 합의에 따라 활용되기 시작했다. 최근 거장 감독의 지원금 횡령과 스태프 임금 체불에 대한 뉴스가 터졌다. 그와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작가의 고발이라 더욱 충격을 준다. 제작사측은 “그때는 근로계약서가 도입되기 전이고 인센티브 방식이라 액수가 적었다. 그러나 사적으로 유용한 사실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법정에서 가려질 사안이지만 현실은 여전히 도돌이표다.지난해 영진위 ‘2018년 표준계약서 활용현황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순제작비 4억원 이하(2018년부터 10억원으로 상향 조정)의 저예산 영화와 다큐멘터리·애니메이션 등이 빠져있다. 그해 652편의 영화가 개봉했지만 이 가운데 조사 대상 영화는 63편, 영화 스태프들이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한 영화는 49편에 불과했다. 그 수많은 영화의 스태프들은 왜 침묵해야 했을까.

이희승 문화부 차장 press512@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