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더 이상 '사이버 세계'는 없다

정길준 기자
입력일 2020-03-30 14:36 수정일 2020-03-30 14:37 발행일 2020-03-31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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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길준 산업IT부 기자

현실 세계와 가상의 사이버 세계를 구분할 수 있는 시절이 있었다. 전화선을 이용해 온라인에 접근하면 글자뿐인 청색 화면에서도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시끄러운 연결음은 온·오프라인의 경계를 나타내는 표지판과도 같았다. 인터넷 연결을 종료하면 전화기에서는 다시 통화 대기음이 울렸다. 마치 책을 펼쳤다 덮는 것처럼 명확했다.

초고속 인터넷의 등장과 5세대 이동통신(5G)의 상용화로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온라인 메신저와 SNS로 소통하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아지고 사진과 영상 등 고용량의 데이터를 기다림 없이 전송할 수 있게 됐다. 게임이나 커뮤니티 속 아바타는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이 아닌 또 다른 자아가 된 지 오래다.

최근 미성년자 포함 성 착취 영상을 공유한 n번방 사건으로 나라가 충격에 빠졌다. 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삶에 획기적인 변화를 몰고 왔지만 동시에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큰 과제를 던졌다. 강도 높은 처벌과 국가 차원의 감시체계 구축은 물론 확실한 피해자 보호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온·오프라인의 경계가 허물어진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성숙한 시민의식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유사한 형태의 부작용을 인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상식을 벗어난 영역을 마주하면 그저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며 외면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n번방 참여자들은 자신의 어긋난 사상을 가상의 존재에 주입시키며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썼을 것이다.

조주빈은 ‘악마의 삶’이 끝났다고 언급했지만 우리는 IT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시작점에 서있다. 온라인 인격은 데이터와 마찬가지로 영원히 남는다. 이번 사건이 신기술 도입에만 몰두하다 지나친 디지털 윤리에 대한 개념을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되질 바란다.

정길준 산업IT부 기자 alfie@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