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100] 기울어진 운동장 다지기 나선 무대 위 여자들 ① 늦었지만 시도돼야 할!

허미선 기자
입력일 2020-01-31 18:00 수정일 2020-02-03 11:17 발행일 2020-01-31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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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공연계는 여성 서사극, 젠더프리 등의 경향이 심화될 전망이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화전가’, ‘잃어버린 얼굴 1895’ ‘리지’ ‘마리 퀴리’, 내년 초 서울예술단이 첫선을 보일 ‘향화’(가제)의 실존 인물 김향화, 서울시극단이 9월 무대에 올릴 ‘나, 혜석’의 실존 인물 나혜석(사진제공=국립극단, 서울예술단, 라이브, 쇼노트, 수원시)

“단순히 ‘마케팅 요소’라고 할지라도, 다소 부족하더라도 더 많은 ‘여성들의 이야기’, 젠더프리 같은 ‘다양성’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시도들이 더 많아져야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 나오지 않을까요?”

지난해 연말부터 올 초까지 국공립 극장 및 단체, 민간제작사, 공연장 등이 발표한 2020년 연극·뮤지컬 라인업에서 눈에 띄는 경향은 여성 서사 혹은 캐릭터의 부각이다. 2018년부터 꿈틀대기 시작한 이 경향에 대해 서울시극단과 연극 ‘나, 혜석’(9월 11~27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을 작업 중인 배우이자 작가 한송희는 “늦었지만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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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마리 퀴리'(사진제공=라이브)

뮤지컬 ‘마리 퀴리’(2월 7~3월 29일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의 김태형 연출은 “연극, 뮤지컬이 시대에 앞서가서 목소리를 내던 시기가 언제였나 싶다”며 “기껏해야 간신히 시대의 거울로 기능해서 당대의 목소리를 담을 뿐”이라고 의견을 밝혔다.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시대의 흐름이 조금 느린 박자로 공연에 담기는 것이 현재의 모습이죠. 공연계에서 여성서사 혹은 여성 캐릭터의 부각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그리고 너무 늦었죠. 다른 장르, 문화, 다른 서브컬처들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된 자연스런 현상이거든요.”

◇사회 진화의 반영, 그럼으로 늦더라도 시도돼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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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삼식 작가, 이성열 연출의 ‘화전가’(사진제공=국립극단)
“이전까지 공연계에는 여성 입장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작품이 현저히 적었어요. 이에 출중한 실력을 가진 여성 배우들이 주인공의 여자친구 또는 엄마 말고는 제대로 된 캐릭터를 연기할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 사실이죠.”

한송희 작가와 ‘나, 혜석’을 함께 준비 중인 이기쁨 연출의 말처럼 불과 몇년 전까지 무대 위 여자들은 소유물, 지켜야할 존재였으며 남자들의 각성, 정의구현, 성장, 역사적 기여 등을 위한 ‘기능적 캐릭터’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최근에도 쉴새 없이 잔소리를 늘어놓고 징징거리거나 결혼을 통해 반드시 남자에 속해야만 하고 보호받거나 성적 매력으로 무장한 전통적인 팜므 파탈 형 여자 캐릭터들이 여전히 적지 않다.

그럼에도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줄리엣과 줄리엣’ ‘헤카베’ 등 한송희 작가·이기쁨 연출이 함께 작업해온 연극들과 2018년 여배우 10명을 한 무대에 올렸던 ‘베르나르다 알바’, 2019년 절망 속에서도 연대하고 공감하며 살아가는 여자들의 이야기 연극 ‘메리 제인’ 등 매년 남다른 의미의 여성 서사극이 등장하거나 젠더프리로 다양성을 시도하는 극들도 늘고 있다.

2020년에도 연극 ‘나, 혜석’을 비롯해 네 여자의 이야기를 펑크록 뮤지컬로 풀어낸 ‘리지’(4월 2~6월 21일 드림아트센터 1관 에스비타운), 서울시뮤지컬단의 ‘작은 아씨들’(11월 24~20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뮤지컬 ‘HOPE: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11월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마리 퀴리’(2월 7~3월 29일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등이 공연된다.

국립극단은 배삼식 작가·이성열 연출이 꾸린 여성들의 이야기 ‘화전가’(2월 28~3월 22일 명동예술극장), 여성 파우스트를 내세운 ‘파우스트’(4월 3~5월 3일 명동예술극장)와 한강 원작의 ‘채식주의자’(5월 6~7일 소극장 판), 성 역할이 바뀐 ‘말괄량이 길들이기’(6월 2~6일 명동예술극장)를 연달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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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 2016년 공연장면(사진제공=서울예술단)
서울예술단도 명성황후를 재조명한 레퍼토리 ‘잃어버린 얼굴 1895’(7월 8~26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와 일제강점기 ‘만세’를 불렀던 기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신작 ‘향화’(가제, 2021년 1월 8~10일 경기도문화의전당)를 무대에 올린다. 이에 대해 공연 관계자들은 “전반적인 변화와 흐름”이라고 한목소리를 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책에 기술된 역사가 있고 우리가 모르는 책에 기술되지 못한 역사가 있습니다. 기술된 역사의 대부분은 남자가 주역이고 역사를 기술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남자이다 보니 역사에서 여성 대부분은 실종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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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노트에서 준비 중인 펑크록뮤지컬 '리지'(사진제공=쇼노트)

이렇게 전한 서울예술단의 권호성 예술감독은 “지금까지 스토리 작가나 이를 향유하는 사람들 모두 남성 중심의 서사를 당연하게 생각하게 됐다. 혹 여성에 대한 서사를 풀어 갈 때도 남성 중심의 시선이었다”며 “다행히 최근 이에 대해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고 그에 따르는 변화를 볼 수 있다”고 말을 보탰다. 

록 뮤지컬 ‘리지’를 준비 중인 쇼노트의 임양혁 이사는 “여성 서사 혹은 역할의 부각은 공연 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인다”며 “남성 중심의 세계관(Patriarchy)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관으로의 변화라는 큰 맥락 안에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그 큰 맥락에서 공연 분야에서도 그러한 움직임(脫-patriarchy)이 반영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송희 작가는 “연극계 뿐 아니라 문화계, 사회 전반의 흐름”이라며 “그간 여성들의 이야기는 ‘안 팔린다’고 판단했던 제작자들도 많았지만 관객들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여성 서사의 필요성이 대두됐기 때문에 시장의 선택도 움직인다고 생각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이어 “여성 작가이자 배우로서 매우 반가운 일이며 더 많은 여성의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을 보탰다.

이기쁨 연출은 “성별을 떠나 하나의 인간으로 존재하며 인간답게 대우받는 것에 대한 의식이 생겨나면서 공연계도 그 흐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고 있다고 느껴진다”며 “실제로 이런 흐름은 여성 창작자들에게서 우선적으로 생겨나고 있고 여성 관객들 중심으로 이런 작품들에 대한 요청이 생겨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더불어 “이런 흐름이 생겨났을 때 조금은 의도적일지라도 여성 서사가 중심이 되는 작품을 꾸준히 만들어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여성 서사’라는 말이 사라질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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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나, 혜석’을 준비 중인 한송희 작가. 사진은 2019년 산울림 고전극장으로 앙코르된 ‘헤카베’ 공연장면(사진=브릿지경제SB/산울림소극장 제공)

“어떤 소재든 높은 작품성과 대중의 호응을 함께 가져가는 작품은 많지 않아요. 비단 여성서사극이나 젠더프리 극만의 특성이 아니죠. 가짓수가 늘어난다면 수준 높은 만듦새의 작품들이 더 많이 늘어나지 않을까 싶어요.”

‘여성들만의 이야기’ ‘젠더프리’라는 점 자체가 마케팅 요소로 변질되거나 무분별하게 젠더프리 캐스팅을 하거나 다소 성근 만듦새로 실망을 안기기도 하는 ‘도전’과 ‘실험’이라는 평에 대해 한송희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성열 예술감독 역시 “지속적인 시도를 통해 좀더 다양한 사회이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며 “시작 단계에서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으나 앞으로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아 우리 사회를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들 것”이라고 소견을 밝혔다.

“남성 캐릭터, 남성 중심 서사에 비해 여성 중심 이야기들이 적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소외됐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또한 예술의 역할이죠. 다양한 시도, 새로운 실험과 더불어 작품 자체의 예술성과 완성도에도 변함없이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권호성 서울예술단 예술감독은 “그나마 양성평등 교육은 실시하고 있지만 남성·여성으로만 분류되지 않는 성 소수자에 대한 교육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이는 젠더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어렵게 하는 이유가 된다”고 지적했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가 보여줬던 젠더에 대한 편견은 어찌 보면 이런 무지에서 비롯됐습니다. 당연히 문화 예술계도 그런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죠. 보다 적극적으로 제도적인 개선이 이뤄져야 합니다.”

쇼노트의 임양혁 이사는 “관객들이 ‘여성 서사’ ‘젠더프리’ 자체만을 보고 공연을 보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슨 작품이든 중요한 건 작품의 만듦새와 여러 요소들 간의 시너지다. 여성 캐릭터나 서사는 그 여러 요소 중 하나”라며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특정 의도 혹은 맥락이 강요되기 보다 관객들이 스스로 해석할 여지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궁극적으로는 ‘여성 서사’라는 말도 없어 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날이 오길.”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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