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경제의 ‘신간(新刊) 베껴읽기’] <좌파 문화권력 3인방> 조우석

조진래 기자
입력일 2019-11-01 07:30 수정일 2020-05-29 11:43 발행일 2019-10-31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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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더 이상 ‘종북좌파’의 놀이터로 놔두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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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평 >

70년대와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에게 백낙청-리영희-조정래는 한국을 대표하는 행동하는 양심, 현실파 지식인의 표상이자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었다. 백낙청은 이 나라에 민족문학·민중문학의 기반을 다져주었고, 리영희는 막연히 괴물로만 알았던 공산주의에 대한 새로운 시작을 심어주었으며, 조정래는 태백산맥 등을 통해 이 땅의 핍박받던 민초들의 치열한 삶을 장구한 역사로 서술해 냈다. 그런데 수년 전부터 이들 세 명에 대해 꾸준히 비판하고 이들의 실체를 까발려 온 사람이 있다. 저자인 조우석이다. 기자 출신인 그는 현재의 대한민국이 좌파 민족주의에 매몰된 것이 이들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이들을 ‘좌파 세계의 뿌리이자 자궁이자 숙주(宿主)’라며 맹공을 가한다. 그리곤 치밀한 고찰과 방대한 자료를 망라해 이들의 감춰져 있던 민낯을 끄집어 낸다. 궁극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이들, 혹은 이들의 아류나 아바타에 흔들려선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386 세대들은 적지않은 혼란 속에 읽을 수 밖에 없는 책이다.

◇ 좌파 민족주의, 50년 동안 견제 없이 세력 확장

* 견제받지 않는 ‘좌파 민족주의’ - 자자는 백낙청 리영희 조정래 3인방을 ‘문화권력이자 지식권력을 가진 좌파 세계의 뿌리이자 자궁이자 숙주(宿主)’라고 비판한다. 공과가 있겠지만 이들의 가장 대표적인 과오는 ‘대한민국 증오병’을 심었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이 나라는 태어나선 안될 나라라는 인식을 심어준 원조들이라는 얘기다. 우리 국민들을 우파로 살되 좌파로 생각하게 하는 이중성을 심어준 장본인들로, 좌파 민족주의를 징검다리로 해 예외없이 친북 성향을 보이는 글로벌 시대의 미아(迷兒) 들이라고 평가했다.

* 좌파 정서에 결박된 정치권 - 2016년 한국정치학회가 20대 국회의원 300명의 이념 성향을 조사한 결과, 진보로 분류되는 금배지 수가 과반을 넘어 52.1%에 달했다. 중도가 40.1%였고 보수 성향은 7.8%에 불과했다. 92.2대 7.8로 중도 내지 좌편향 정치권 판임이 증명된 것이다. 2010년 3월 한겨레신문이 한국 여론주도층 52명의 정치 성향 분석했을 때도, 이미 온 나라가 좌파 천국 임이 확인되었다. 확실한 우파는 복거일 공병호 정도였다.

* 백낙청와 리영희 비판한 김지하 - 시인 김지하는 백낙청에 대해 ‘깡통 빨갱이’, 리영희에겐 ‘깡통 저널리스트’라고 혹평했다. 2012년 조선일보 칼럼에 ‘한류 르네상스 가로막는 쑥부쟁이’란 글에서 “자칭 한국 문화계의 원로라는 백낙청이 그 쑥부쟁이(독풀)”라고 정면 비판했다. 대한민국을 송두리째 바꿔버리자는 좌파의 ‘2013 체제론’에 대해선 “막걸리에 소주를 섞은 상태인가”라고 깎아내렸다. 그는 특히 백낙청에 대해 “내가 깡통 빵갱이라고 매도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으로 알라”고 일갈했다. 백낙청이 거대 권력이지만 공부를 안하고 무식하다고 자주 비판했다.

◇ 종북좌파 정치인들과 적폐청산 용어를 잉태시킨 백낙청

* ‘적폐청산’을 탄생시킨 백낙청 - 2000년 ‘6.15 선언’을 기점으로 평론가 타이틀을 대신해 정치판을 기웃거리기 시작해 2005년에는 6.15 선언실천남측위원장을 맡았다. 연방제 통일론의 배후이자, 문재인정부의 악명 높은 ‘적폐청산’ 구호도 그가 사실상 제시했다. 창작과 비평 2017년 봄호 ‘촛불의 새 세상 만들기와 남북관계’라는 글에서 그는 촛불시위를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드문 사회혁명’이라고 규정했다. 이 혁명이 성공하려면 분단체제에 기생하며 부정부패와 국정농단을 일삼는 자들을 응징 단죄해야 한다는 요지의 글을 썼다. 여기서 적폐청산이라는 큰 그림이 나왔다.

* 종북좌파 정치인 양산한 백낙청 - 백낙청은 이른바 ‘희망 2013 승리 2012 원탁회의’ 좌장을 맡으면서 막후 실력자로 자리매김 했다. 19대 총선에서 무려 13명의 종북좌파 통진당 소속 인사들을 국회에 진출시켰다. 이후 대한민국을 송두리째 바꿔놓기 위한 새로운 체제, 이른바 ‘2013 체제’를 주창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이야말로 좌파가 꿈꿔온 체제변혁 민중혁명의 최대 기회였다. 헌법재판소재가 통진당 해산을 결정했을 때는 원탁회의가 범 좌파를 주도하며 반대했다. 2006년에 북핵 이슈가 터졌을 때도 “군사적 억지력 확보를 위한 핵무장이라는 북측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본다”며 옹호했다. 나중에 노무현 대통령이 “북핵이 자위수단이라는 북한 주장은 일리가 있다”며 똑같이 받았다.

* ‘이면헌법 폐기론’ 앞세운 훈수정치 - 기존 헌법을 그는 ‘이면(裏面)헌법’이라고 했다. 반공과 반 북한이라는 고약한 이면헌법이 대한민국에서 사실상의 헌법 노릇을 해 왔으나, 이제 낡았으니 내버릴 때라고 주장했다. 분단체제의 산물에 불과한 반공-반북한 의식에 눌려 헌법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으므로 폐기해야 마땅하다는 논리였다. 백낙청의 수상쩍은 이념 본색의 최종본이자 결정판이라고 저자는 평가했다. 이후 문재인 대통령이 이를 이어받아 100주년 3.1절 기념식에서 “앞으론 빨갱이라는 말을 쓰지 말고, 그런 의식 자체를 지워버리자”고 말했다. 그리고 “빨갱이는 일제의 탄압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호도했다.

◇ 명문 보수 가문의 ‘돌연변이’ 백낙청

* 보수 집안의 돌연변이 백낙청 - 수원 백씨 집안은 일제시대 이래로 명문가였다. 평안북도 정주 일대의 유지로 대대로 선덕을 베푼 집안으로 통했다. 정치 이념적으론 명백한 보수였다. 부친 백붕제는 교토제대 출신으로 일제시대 고시 양과(사법 행정)에 합격한 수재였다. 총독부 관리로 군위 군수를 역임한 후 해방 후엔 변호사로 활동했다. 중일전쟁 때 군수품 공출, 국방헌금 모급 등 전시 업무 수행했다는 이유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 있다. 백낙청의 큰 아버지 백인제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종합병원인 ‘백병원’의 설립자다. 백낙청의 12살 위 친형 백낙환은 백인제와 백붕제가 함께 납북된 후 백병원을 일으켜 세우고, 훗날 인제대학 설립을 주도했다. 둘의 납북은 그만큼 북한에 눈엣가시였다는 증거다.

* 백낙청은 누구? - 명문 브라운대 영문과를 수석 졸업해 졸업생 대표 연설을 맡을 만큼 수재였다. 군 입대를 기피 않고 하버드대 석사 과정을 마친 후 일시 귀국해 복무했다. 군 장성들이 감동해 훈련소 직후 곧바로 국방부 차관실로 배려했고, 5.16 직후에는 박정희가 의장으로 있던 최고회의 사무실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이후 갓 25세에 서울대 교수로 임용된다.

* 아이러니한 백낙청의 사상전환 - 여러 분석이 있지만 대체로 박정희 체제에 대한 불만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박정희의 유신 통치에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1974년 교수직에서 해직되었다가 ‘서울의 봄’을 맞아 1980년 6년 만에 복귀했으나 뒤이어 창비가 폐간되면서 적게는 7년, 교수직 해직까지 13년 동안 고생하면서 ‘반골’이 되었다는 분석이다. 큰 형인 백낙환도 타계하기 오래 전부터, 좌파 활동을 하는 동생의 처신을 걱정했다고 한다.

◇ 문화권력이 된 창작과 비평, 그 처음과 끝

* 좌파문화운동의 사령탑 ‘창작과 비평’ - 1950년대에 ‘사상계’가 있었다면 이후는 줄곳 ‘창작과 비평’의 시대다. 백낙청이 1966년에 만든 창비가 문화권력이 되면서 거대한 좌파 세상이 복원되었다. 저자는 한국문학이 백낙청의 창비가 쥐고 흔드는 패거리 문학의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개탄해 했다.

* 문학의 옷을 입은 정치투쟁 - 한국 문단의 좌편향은 악명이 높다. 소설가 이문열은 ‘홍위병의 시대는 갔는가?’라는 2016년 1월 인터뷰에서 “문인의 열에 아홉, 열이면 열 모두가 좌파”라며 “심할 경우 문학의 옷을 걸친 정치투쟁을 펼치기도 한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특히 평론이 득세하면서 한국문학이 죽음에 이르렀다고 일갈했다. 획일적인 전체주의의 압제 속에 순수문학이 갇히게 된 것이다.

* 좌파의 ‘김수영·신동엽’ 띄우기 - 백낙청 등은 자기들이 내세우는 민족문학-민중문학의 간판스타로 김수영과 신동엽을 선택했다. 특히 김수영을 ‘한국의 체 게바라’로 만들었다. 백낙청과 그의 파트너 문학평론가 염무웅의 합작품이다. 염무웅은 미당 서정주를 친일파로 몰아 문학적으로 살해했고, 백낙청은 김수영 띄우기에 전력을 기울였다. 김수영 따라하기의 서울시장 박원순도 “광화문 광장에서 김일성 만세를 부를 수 있어야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말해 구설에 올랐다.

* 신경숙 사건에서 터진 백낙청의 민낯 - 2015년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사건이 터지자 백낙청은 표절이 아니라고 무리하게 옹호하다 된서리를 맞았다. 한 작품을 통째로 베껴 쓰다시피 한 글 도둑질인데 “젊은 날 한순간의 방심”이라는 작가의 궤변을 옹호한 결과다. 결국 그는 창비 편집인 자리에서도 물러났다. 하지만 여전히 창비 지분 31.1%를 보유한 최대주주이다. 창비의 새 발행인 주간 등도 그의 사람들이다.

◇ 운동권의 스승 리영희의 종북주의 민낯

* 1980년대 운동권의 스승 리영희 - “대한민국 현대사는 정의가 실패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했다”는 발언의 원조 중 원조가 리영희다. 그로부터 가장 영향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이가 대통령 노무현과 문재인이다. 마오저뚱의 중국, 김일성의 북한 등과 관련해 기존 반공 인식을 허물고 운동권적 인식을 심어준 장본인이다.

* ‘종북 지식인 1호’ 리영희 -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라는 책에서 “우와 좌는 동격이며 동등하고 평등한 것이다. 둘이 함께 서로 동시에 있어야 인간사회는 안전하게 진보할 수 있다”고 썼다. ‘전환시대 논리’나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로 한국 운동권의 영원한 스승으로 자리매김했다. 백낙청과는 ‘전환시대의 논리’를 창비에서 펴내주면서 본격 인연을 맺었다.

* ‘마오이스트’에서 ‘종북’으로 - 리영희는 1970년대 열렬한 마오저뚱 추종자(마오이스트)로 출발했다. 마오저뚱이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이 못한 것을 했다고 숭배했던 그는 그러나 1990년대부터 돌연 북한과 김일성을 떠받드는 쪽으로 결정적 전환을 한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사설들을 기고한 것이 문제 되어 1969년 40세에 조선일보를 퇴사했고, 이후 1988년 한겨레 창간과 동시에 논설고문으로 일하며 한겨레의 논조와 정체성을 만들었다.

* 일본 책 베낀 ‘전환시대의 논리’ - 저자는 386 세대 이후 운동권의 필독서가 된 이 책을 ‘반미에 반 대한민국적 내용으로 일관한 얼치기 국제정치 해설서’라고 평가절하한다. 알고 보면 일본의 좌경잡지 ‘세카이’ 등을 얼기설기 베끼고 거기에 좌파학자 와다 하루키의 저작을 표절한 조각보 수준의 잡문이라고 폄하한다. “오죽하면 한국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해 일본 아와나미에서 번역 출판하려 했다가 일본 학자가 표절 임을 발견해 출간을 포기했을까”라고 말한다.

* 조선일보 후배 이도형이 증언하는 리영희의 민낯 - 조선일보 외신부에서 선후배로 함께 근무하고 군 통역장교 경력도 공유한 이도형은 리영희보다 4살 연하다. 당시 외신부장 리영희의 지나친 편향성 때문에 후배들이 모두 퇴사했다고 한다. ‘홍위병 난동’이란 표현을 ‘난동’이 아닌 ‘혁명’이라고 바꾸는 등 사상적 갈등이 심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개인적인 민원에는 거침없었다고 한다. 이도형은 “체신부 출입 때는 고가의 프리미엄 전화를 집에 들여놓도록 압력을 행사하고, 국방부 출입 때는 조카가 전방에 비치된 것을 후방으로 빼달라고 청탁했다”고 털어 놓았다. “리영희는 체제가 주는 모든 혜택을 앞다퉈 선점했으면서 대한민국과 체제를 비판하고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 했다”고 비판했다.

◇ 탈북한 황장엽을 변절자로 몬 리영희

* 황장엽에게 ‘변절자’라 물아붙인 리영희 - 6.25는 민족의 독립 통일을 위한 노력이지 침략이 아니라는 논리를 펼쳤다. 북한은 민족적 자본과 사회구성원간 도덕적 생존양식 그리고 동포애가 감도는 순박한 인간형 등의 사회라고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에서 흠모했다. 급기야 북한 핵무기조차 대 민족주의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용납하자고 선동했다. 북한 인권문제 역시 미국식으로 보는 것은 위험하다는 이적성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한겨레가 마련한 황장엽과의 특별 인터뷰에서 그에게 “남북 적대감을 조장하려는 위험한 인간”이라고 폭언을 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재단 성명을 거론하면 “북으로 돌아가라”고 극언했다. 이후 대담집 ‘대화’에서도 “황장엽이 인간적으로 자아를 상실한 사람같았다”고 험담했다.

* 공산주의에 콩깍지 씌워진 리영희 - 중국 문화혁명은 명백한 ‘최악의 재앙’이었다. 하지만 리영희는 새로운 사회주의적 인간을 만드는 인간개조실험이라든가, 마오저뚱이 민중과 자신을 직결시킨 혁명이라고 칭송했다. 중국 공산당조차 문혁이 종료된 직후인 1981년에 “문화대혁명으로 당과 국가와 인민은 건국 이래 가장 심각한 좌절과 손실을 맛보았다”고 공표 했음에도.

* 리영희를 공산주의자로 이끈 김산 - 공산주의자 김산의 본명은 ‘장지락’이다. ‘아리랑’의 여류 작가 님 웨일스가 옌안에서 김산과 나눈 대화를 토대로 쓴 글이 아리랑이고, 주인공 이름이 김산이었던 까닭에 이 이름을 썼다. 갓 스물이던 1925년 중국 혁명에 참가한 후 만주 등을 누비며 독립운동을 했지만, 1938년에 일제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중국 공산당은 1983년 잘못을 인정하고 명예회복시켜 주었다. 그 김산을 국내에 알린 이가 리영희다. 1960년대 초 평범한 신문기자였던 자신을 결정적으로 의식화시킨 게 그였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 김산의 정신을 곡해한 리영희 - 리영회는 김산을 영원한 공산주의로 흠모했지만, 저자는 그가 해방 이후까지 살아 활동했다면 약산 김원봉처럼 북한 체제를 선택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단언했다. 김산은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자로 자랐고, 흥사단에 가입하기도 했고, 춘원 이광수나 도산 안창호 등과 어울려 토론을 즐겼다고 아리랑에서 술회했다. 그런 김산을 운동권과 섞이게 하거나 북한 주체사상파와 동일시하는 것은 김산에 대한 모독이라고 저자는 목소리를 높인다. 님 웨일스도 김산에 대해 ‘진리를 추구하는 순례자’라고 표현했다. 김일성 류의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 그런 리영희도 자기비판을 했다 - 1991년 6월25일 한국일보 장명수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미 객관적으로 부정된 부분(옛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몰락 등)을 사상적 일관성이라는 허위의식으로 고수하려는 것은 지식인다운 태도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1970년대 이후 지속됐던 활동이나 전환시대논리 등의 책은 마르크시즘이나 레닌이즘이 아니라, 휴머니즘 이었다”고 애써 자위했다.

◇ 잘못된 역사인식으로 역사를 파괴한 조정래

* 태백산맥에 쏟아진 찬사 -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있던 이어령 평론가도 당시 “태백산맥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쓰인 ‘신판 홍길동전”이라고 극찬했다. 11년 동안 이 작품의 이적성 여부를 수사하던 검찰이 무혐의 결정을 내리도록 유도한 결과 낳았다. 하지만 그는 세 사람 중 가장 나쁜 영향력을 미친 좌파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의 ‘태백산맥’ 이후 빨치산은 더 이상 공비(공산비적)이 아니라 순결하고 낭만적인 전사의 이미지로 탈바꿈했다. ‘정치적 괴물’ 이석기를 포함해 우리 사회 운동권은 태백산맥에서 튀어 나왔다는 게 정설이다.

* 역사 오류 투성이 태백산맥 - 태백산맥 제10권에는 박헌영을 숙청한 김일성을 대놓고 미화하는 내용이 나온다. 박헌영이 6.25 실패의 책임을 지고 김일성을 위해 처형의 길을 자진해 선택했다는 황당한 내용이다. 박헌영의 비극적 최후를 우리가 다 알고 있는데, 당과 김일성을 위해 스스로 희생의 길을 걸었다는 황당한 설정이다. 당시 빨치산들이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거나, 주민들이 친일파 출신 우익들의 횡포에 못이겨 자발적으로 입산해 빨치산이 된다는 내용도 모두 허구다. 이에 대한 진실 공방이 일자 조정래는 “마음대로 해석하라. 해석은 독자의 몫”이라고 회피했다. 그는 마지막 10권에서 주인공의 한명인 지식인 김범우의 입을 통해 “6,25는 민족해방전쟁이었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 작심하고 드러내 보인 이념 펀향 - 소설 속에 내내 중도적 입장을 고수하던 김병우의 전향은 조정래의 숨은 의도가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는 미군이 자행한 살인 방화를 보면서 6.25가 미군과 우리 민족 사이의 싸움이라고 판단해 인민군에 입대해 공산주의 노선을 걷게 된다. 결국에는 자폭하는 빨치산 염상진을 긍정적이고 낭만적으로 그려 빨치산 이미지를 곡해시켰다는 점도 문제다. 벌교지역 계염사령관 백남식 중위는 일본 관동군 출신에 부임 첫날부터 유지들과 술판 벌이는 호색한으로 그려졌다. 인민군이 저지른 대민 피해나 학살 등에 관해선 언급도 않고, 국군과 미군의 범죄만 덧칠을 했다. 빨치산이 게릴라 전을 펼치다가 지주 집을 털어 주민들에게 설 선물을 나눠주는 의적 행동까지 했다고 묘사했다.

* 조정래의 거짓말 - 이 소설 끝 ’작가의 말‘을 통해 그는 “일제 36년 동안 학살당한 동포가 300만에서 400만명”이라고 언급했다. 아리랑을 쓰게 된 것도 그걸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해서라도 얘기했다. 하지만 1910년 당시 조선 전체 인구는 대략 1600만 명 정도였다. 집집마다 한 명의 학살 희생자가 있었다는 궤변이다.

* 반 재벌 소설 ‘허수아비춤’ - 2010년에 쓴 책으로 ‘경제민주화’를 목표로 씌워졌다고 한다. 지독한 반기업 정서와 반시장경제 논리로 점철되어 있다. “이래도 재벌과 대기업을 증오하지 않을래?”라고 노골적이다. 1조 원 비자금을 무기로 정계 관계 로비를 벌이며 더러운 승리를 하고, 친위대 3인방에게 거액의 스톡옵션 건네는 등의 내용이다. 기업가는 도둑이고 도태되어야 할 존재라는 식의 부정적 논조로 일관했다. 기업인을 ‘살만 피둥피둥 찐 얼굴’ 등으로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와 함께 대기업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쌍끌이했다.

◇ 얼치기 좌파들에 대한 비판들

* 이영훈 “시바 료타료에 비하면 조정래는 2.5류’ -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료는 ’료마가 간다‘를 집필하면서 “트럭 한대 분의 자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의 역사소설은 사실의 치밀한 고증에서 독자들이 찬탄을 불러 일으킨다. 러일전쟁을 소재로 한 ‘언덕 위의 구름’에 대해 일본인들은 “소설 형식으로 된 메이지 일본의 제일가는 역사서”라고 찬사를 보낸다. 이영훈 교수는 조정래의 ‘아리랑’을 읽은 후 분을 참지 못해 ‘광기어린 증오의 역사소설가 조정래’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소설에 나오는 지시마공사판에서의 조선인 인부 1000명 몰살 등은 역사에도 없는 허구라며 조정래의 의도된 역사 파괴를 비난했다.

* 고은의 ‘만인보’ - 1986년 첫 발표 이래 시집 30권에 수록 시 총 4001편으로 구성된 방대한 연작 시집이다. 만인의 삶에 대한 기록이란 뜻이다. 하지만 이 시를 정상인의 눈으로 보면, 현대사에 대한 무한 저주와 다름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태어나선 안 될 나라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등 좌익 인물은 대놓고 찬양 칭송하면서, 대한민국 건국에 앞장 선 우익은 예외 없이 ‘인간 말종’으로 묘사하는 우를 범했다.

* 좌편향 도올 김용옥 - 타고난 자기현시욕에 더해 대책없는 좌편향 인식으로 똘똘 뭉친 환자라고 저자는 도올을 공격한다. 2019년 초 TV에서 “이승만을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는 섬뜩한 강연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인터뷰한 뒤, 스스로를 소인(小人)이라고 낮춰 말하며 민망함을 던져주었다.

* 위험한 강남좌파 홍정도 - 아버지 홍석현 회장조차 “내 아들은 좌파다”라고 말할 정도다. 2015년 10월 공유한 카드뉴스에는 한반도가 불타는 사진 위에 커다랗게 ‘지옥 같은 조선 땅’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같은 해 9월에는 ‘헬조선 대한민국을 떠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이 붙은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미디어워치가 고발 기사를 쓰자 곧 페북을 닫았다. JTBC 사장 취임 직후에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도 가치있는 정보”라는 궤변 언론학으로 논란을 부른 바 있다. 저자는 오너의 이런 생각과 행동이 결국 JTBC에 조작방송의 날개를 달아준 셈이라고 일갈한다.

* ‘분단시대’ 용어를 만든 강만길 - 이른바 ‘민중사학’으로 국사학계가 통일되는 시점에서 분단시대라는 역사 용어를 처음 구사했다. 백낙청이 민족문화론과 분단체제론으로 분위기를 잡아가자, 그 화두를 국사학계에서 크게 키운 인물이 강만길이라는 평가다.

조진래 기자 jjr2015@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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