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익도의 White Cube] 英TV쇼 '스피팅이미지' 되살린 안나 폭스의 설치미
“이 시대 저명인사 한 분의 영상을 보시겠습니다.”
(에드 밀리밴드 영국 노동당 대표가 연설을 하고 있는 영상이 나오고)
“어떤 저명인사요? 어딨죠? 아! 저 여자요?” (웃음소리)
오는 5월 7일 총선을 앞둔 영국. 영국 BBC방송의 ‘해브아이갓뉴스포유’ 패널들은 현시대 정치인들을 신랄하게 비꼰다. 카리스마가 부족하다고 평가받는 에드 밀리밴드 노동당 대표가 순식간 여자가 돼있다.
BBC의 ‘러셀하워드굿뉴스’도 풍자로 유명한 프로그램이다. 지난해 9월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한 영국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버럭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들러리를 서고 있는 영상을 슬로우 모션으로 돌려가며 비꼬았다. 우리나라였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영국인들의 정치 냉소주의는 최고다. 영국의 각종 토크쇼와 코미디 프로그램은 정치인물이라는 주된 재료에 ‘풍자’라는 레시피를 더해 맛있게 요리한다.
영국의 정치 풍자는 어디서부터 비롯됐을까. 1984년부터 11년 넘게 방영된 스피팅이미지(Spitting Image)라는 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 프로그램은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엘리자베스2세 여왕 등 유명 인사들을 빼 닮은 인형으로 ‘희대의 풍자’를 감행했다. 영국 주간잡지인 브로드캐스트는 이 프로그램에 ‘때로 노동당보다 더 효과적인 대안’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주기도 했다.
이 시리즈는 1996년에 종방했지만 이후 방송을 포함한 영국 대중문화, 예술 등에 ‘정치 풍자’라는 핵심적 DNA를 심고 풍자극의 봇물을 일궈냈다. 영국의 정치 풍자는 바로 이 스피팅이미지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부와 신분에 따른 아우라(Aura)가 사라진다. 쓰다 버려진 것 같은 인형들이 나뒹굴 뿐이다. 풍자로 한껏 물들인 캐릭터들은 사실상은 우리 시대의 한 획을 그은 정치인들이다. 현재도 무수한 정치적 이미지 잔해들이 사회 곳곳에서 기생하고 있음을 되새겨보자는 취지다” - 안나 폭스
세실 파킨슨, 에드워드 히스, 마가렛 대처, 마이클 헬스타인, 노먼 테빗, 레온 브리탄, 더글러스 허드, 마거릿 대처. 꽤나 한 지위 했을 법한 이들이 쓰레기 더미처럼 쌓아 올려져 있다. 얼마 후 쓰레기차가 와서 이들을 휩쓸어 갈 것 같은 쓸쓸한 느낌을 준다.
사진 속 인형들처럼 정치적 이미지나 권력은 시간이 흐르면 시들어버린다. 제 아무리 대처 총리라 해도 시간이라는 ‘서사적 프레임’을 벗어날 수 없다. 언젠가는 인형들의 모습처럼 ‘권력 누수’가 생기고 대중들에게서 잊혀진다. 실패를 맛보기 전에 물러나는 정치인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사진을 보면 ‘모든 정치인의 경력은 실패로 끝난다’는 영국 정치인 이노크 파월의 말이 끝없이 되새김질된다.
세실 파킨슨 전 영국 장관의 작품은 한없이 초라하다. 진홍색 배경을 뒤로 하고 참수형을 당한 사람처럼 머리만 모노포드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파킨슨은 여비서가 임신을 하는 바람에 영국의 각료직에서 물러난 ‘희대의 불륜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인형들은 불길하면서도 초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나조차도 인형들 하나하나가 괴물 같아 보이는 게 사실이다. 세실 파킨슨은 작품들 중 유일하게 장식 없이 머리만 있는 분이다. 사진으로 작업한 이미지들은 스피팅이미지 방송에서의 모습보다 훨씬 더 파격적으로 다가 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안나 폭스
마이클 헬스타인 영국 전 국방장관은 길다란 스탠드 위에 독일 야상을 길게 늘어뜨린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의상이 미처 감추지 못한 부분에는 스탠드에 묶여 있는 선 몇 가닥이 있다. 폭스는 겉으로는 알 수 없는 그의 속마음을 표현했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화려한 정치적 이미지, 허울 속에 허무함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파워드레싱(자신의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입는 격식적이고 값비싼 복장)을 들춰보면 언제나 인간 그 자체로서 취약함이 있기 마련이다.”-안나 폭스
◇ 아직도 풍자에 배고픈 영국…현대판'스피팅이미지'가 온다
권익도 기자 kid@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