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에 꽂힌 '치프라스의 번개'

김효진 기자
입력일 2015-01-27 16:56 수정일 2015-08-18 13:47 발행일 2015-01-28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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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무탕감 주장' 그리스발 유럽위기 본질은 '국가간 경제 운용방식의 차이'‧‧‧ EU '공동체 꿈' 균열

“유럽연합(EU)이라는 하나의 공동체의 심장이 직격탄을 맞았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26일(현지시간) 그리스 급진좌파연합인 시리자의 총선승리가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에 걷잡을 수 없는 위기를 확산시키고 있는 현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신문은 “EU의 최대 재정강국인 독일을 포함한 부유국과 그리스, 이탈리아 등 재정압박에 시달리는 이른바 ‘유럽의 문제 국가들’ 사이의 해묵은 갈등이 본격화됐다”며 “그리스 총선 결과는 본질적으로 EU 공동체 내에서도 경제를 운영하는 방식과 관점이 다를 수 밖에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계기”라고 분석했다.

그리스를 통해 유럽의 위기가 표면화되자 근본적인 구조개혁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유러피언 드림’은 없다고 신문은 강조했다.

‘유러피언 드림’의 저자 제러미 리프킨은 개인을 강조하는 ‘아메리칸 드림’과 달리 유러피언 드림은 ‘공동체’라는 키워드로 대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개인의 자유보다 공동체 내의 관계, 문화적 획일성보다는 다양성, 일방적 무력행사보다는 다원적 협력을 강조하는 유러피언 드림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이 10년 전 리프킨의 주장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그리스 총선을 시점으로 ‘유럽연합’이라는 하나된 공동체가 붕괴 조짐을 보이면서 ‘삶을 추구할 가치가 있게 해주는 꿈’인 유러피언 드림이 위기를 맞고 있다는 분석이 EU 안팎에서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

26일 총리에 취임한 치프라스는 긴축정책 폐지 등 국가 채무탕감을 요구하는 주장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선거 운동 기간 채권단인 ‘트로이카(국제통화기금, EU, 유럽중앙은행)에 채무 탕감 등을 요구하면서 구제금융 재협상을 벌이겠다고 끊임 없이 공언해 왔다.

이에 대해 유럽중앙은행(ECB) 최대 주주이자 그리스 최대 채권자인 독일은 강경한 입장을 바꾸지 않고 있다. EU 내에서 ‘잘나가는’ 독일, 핀란드, 네덜란드 등은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한 나라의 빚을 대신 갚아주는 것을 거절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신문은 “그리스가 계속해서 구제금융 재협상을 추진할 경우 유럽 연합의 존속자체가 위협될 수 있다”면서도 “독일이 주장하는 독트린(정책)만이 강조된다면 그리스 뿐만 아니라 EU 전체가 위기에 빠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유로존 재무장관들은 그리스 총선 직후 그리스의 구제금융 프로그램 논의를 위해 26일 급거 벨기에 브뤼셀에 모였다. 치프라스 총리에게 국제 채권단과의 약속을 지킬 것을 촉구하는 자리였다.

유로존 재무장관 회의인 유로그룹 의장 예룬 데이셀블룸 네덜란드 재무장관은 “그리스에 대한 채무 상환 조건을 완화시키는 의견에 대한 지지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대변인 스테펜 사이베르트는 “독일은 그동안 그리스 정부가 지켜온 조건들이 총선 뒤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믿고 있다”고 못박았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도 “특정 국가를 위해 예외적인 규칙을 만들어줄 수 없다”고 긴축정책 폐지에 대한 시리자 정책을 반대했다.

현재 유러피언 드림이 흔들리는 원인으로는 EU와 유로존 내 획일적인 정책구조가 지적되고 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독일을 중심으로 떠오른 해결책은 ‘긴축’이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무작정 경기부양에 나서기에 앞서 긴축과 구조조정에 먼저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반면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등은 “긴축보다 재정지출을 확대해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시급하다”고 맞섰다. 청년 실업률이 10%를 훨씬 밑도는 독일과 실업률이 심각한 이들 국가들이 처한 상황이 크게 달랐지만 ECB는 똑같은 금융정책 방향을 적용했다. 19개 나라에게 통일된 금융정책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이들 국가의 경제가 긴밀히 통합돼야 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이런 구조적인 모순으로 인해 공공 복지 및 연금, 일자리 제공 등과 관련된 현실의 고통을 덜어주겠다는 정치세력이 선택받을 수 밖에 없었고 ‘상호 의존 관계’에만 집중하던 유럽 국가는 분열의 수렁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도 “이번 그리스 총선에서 촉발된 위기의식을 통해 유로존 경제상황이 1930년 세계 대공황 때와 유사한 면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며 “유럽 경제가 구조적 장기침체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26일 경고했다.

신문은 현재 유럽 국가들은 서로 다른 위기 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하나된 유럽(United States of Europe)”만을 고수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19개의 유로존 국가들이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이 이질적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잣대만을 들이대면 유럽 국가의 조직적 동맹이 끊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신문은 “아이러니하게도 유로화는 경제적인 목적으로 도입된 것이 아니라 평화와 통합을 상징하는 정치적인 장치였다”면서 “유럽의 경제위기 때문에 유로화가 휘청대는 것이 아니라 유로화 때문에 유럽의 경제위기가 더욱 심각해졌다고 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김효진 기자 bridgejin100@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