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제 기자

편집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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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성과연봉제=쉬운 해고' vs '호봉+정년제=공멸'…당신의 선택은?

이승제 금융증권부장#공장 한 켠의 빈터에 여남은 직원이 한가로이 족구를 하고 있었다. 점수를 올린 사람이 호기롭게 고함을 내질렀다. 평일 오후 2시 40분, 그들의 정체가 궁금했다. 질문을 받은 직원은 심드렁히 “환경미화반이라 보면 된다”며 입을 다물었다. 친하게 지내는 노조 관계자에 물어보고서야 의문이 풀렸다. “병원 치료를 마친 뒤 현장 복귀 대기중이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생산) 라인에서 빠진 직원들이다. 일종의 특혜라면 특혜인데, 대부분 노조 계파에 영향력을 줄 만한 간부급이다. 노조 내부에서조차 비판의 빌미를 줄 수 있다고 우려하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골치 아픈 사람들이다.” 그들은 때때로 정규 근무시간인 다섯 시까지 어영부영 시간을 때우다 다섯 시 이후부터 담배꽁초나 휴지를 치운다고 했다. 그러면 규정에 따라 꼬박꼬박 잔업 수당이 지급된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출근해 평일 근무의 두 배가 넘는 휴일 수당을 챙기는 이들도 있다고 했다. 담배꽁초나 휴지를 치우면서. 10여년 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목격했던 일이다.10년이 지났는데 변한 게 없다. 오히려 더욱 심각해졌다. 현대차 노조는 매년 임금·단체협상에서 거침없이 질주하며 자신들의 요구를 대담하고 정교하고 세심하게 관철시키고 있다.올해 현대차 노조가 요구한 협상 쟁점 중 기자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승진거부권’이다. 연차가 쌓여 과장이 되면 노조를 자동탈퇴해야 하는데, 과장 승진을 거부할 권리를 달라는 요구다. 노조가 요구한 승진거부권 대상자는 일반·연구직 조합원 8000여 명이다. 현대차 노조는 평균연령 상승이란 고민을 안고 있다. 노조원의 정년 보장이 완벽하고 이직자가 거의 없다 보니 나타나는 현상이다. 승진거부권을 통해 노조원 이탈을 최대한 막으려 한다. 다른 한편으로, 노조를 탈퇴한 나이 든 직원은 신분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고, 특히 짭짤하다 못해 묵직하기까지 한 잔업·초과수당을 받지 못한다. 과장으로 승진하면 생산직 말년 대리 시절에 비해 연봉 수준이 20~30% 이상 줄어들 수 있다. 그렇다. 변한 게 없다.성과연봉제의 도입은 피할 수도, 늦출 수도 없는 일이다. 이것은 상식의 영역이다. 뉴 노멀(New Normal) 시대의 본격화, 그 속에서 일어나는 글로벌 경제전쟁의 격화를 거론할 필요도 없다. 귀족 노조가 목숨처럼 지키려는 호봉제와 정년보장제로는 험한 파고를 넘을 수 없다.노동계는 ‘성과연봉제=쉬운 해고’라는 간명한 공식을 제시했다. 노조원이라면 솔깃할 글귀다. 하지만 뒤집어 보면, ‘호봉제+무조건 정년보장=공멸’ 역시 귀에 쏙 들어오는 공식이다. 정부와 사측 그리고 노동계는 성과연봉제의 양 극단에 서 있는 셈이다. 노조는 사측이 성과연봉제란 무기를 쥐면 무소불위의 전횡을 휘두를까 우려한다. 정부와 사측은 성과연봉제 없는 노동개혁은 실패라고 못박았다.‘얻고 얻고 또 얻고’, ‘이기고 이기고 또 이기는’ 게임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차 노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들은 수십 년 동안 얻고 얻고 또 얻었고, 이기고 이기고 또 이겼다. 그러다 언젠가 크게 잃고 크게 패배할 것이다. 그때 현대차는 고만고만한 군소 자동차업체 중 하나가 돼 있을 것이다. 한때 야심차게 글로벌 톱 4위에 도전했던 추억조차 희미해질 것이다. 이미 추락의 입구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이승제 금융증권부장 openeye@viva100.com

2016-10-04 15:12 이승제 기자

[데스크 칼럼] '4전5기' 우리은행의 전화위복(轉禍爲福)

이승제 금융증권부장우리은행은 행운아다. 시련이 오히려 득이 됐으니, 그야말로 전화위복(轉禍爲福)이다.민영화 작업을 추진하다 네 번이나 무산된 게 가장 큰 행운이다. 역설적으로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경쟁력을 깎아내리는, 강요된 자충수를 피할 수 있었다. 좀체 팔리지 않으니 구매자 입맛에 맞게 경쟁력을 높여야 했다. 그래서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추가지원 등에서 열외될 수 있었다. 다른 금융공기업과 달리 ‘논리’와 ‘합리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면제부를 받았던 것이다.등 떠 밀려 내는 애먼 돈이 크게 줄어드니 부실채권비율이 낮아지고 재무건전성이 좋아졌다. 지난 3월말 기준으로 우리은행의 부실채권비율은 1.38%로 KDB산업은행(6.7%), 수출입은행(3.35%), NH농협은행(2.15%)에 비해 크게 낮다. 신한은행(0.86%), KB국민은행(1.08%), KEB하나은행(1.24%) 등 다른 시중은행에 비해 높지만 금융공기업과 시중은행간 스펙트럼에서 시중은행 쪽에 가깝다.정부에서 우리은행 CEO(최고경영자) 인사권을 행사하고 있지만 천만다행으로 유능한 은행장들이 등장했다. 우리은행은 일찌기 조선·해운업의 불황을 내다보고 관련 여신을 꾸준히 줄여왔다. 이종휘·이순우 전 행장들의 결단이 뒷받침된 결과다. 두 전 행장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통해 정부와 은행 사이에서 중용(中庸)의 미덕을 발휘했다. 덕분에 조선·해운업의 불황 쓰나미가 금융권을 덮친 지금, 위기에서 한발 비껴나 있다.현직 이광구 행장의 전략과 노력도 빛을 발하고 있다. 이 행장은 2014년 취임 직후부터 자산건전성 개선에 몰두한 결과, 취임 당시 4조3093억원이던 고정이하여신(NPL)을 올해 6월말 기준 2조8288억원으로 34.4% 줄였다. NPL비율도 같은 기간 2.1%에서 1.22%로 크게 낮아졌다. 체질개선 노력은 수치로 증명되고 있다. 우리은행의 올 상반기 당기순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45.1% 늘어난 7503억원을 기록했다.이광구 행장은 취임 직후 은행내 전문가들의 의견을 취합한 뒤 플랫폼 개발에 방점을 찍었다. 그래서 나온 게 ‘위비’ 서비스다. 지난해 5월 위비뱅크를 시작으로 위비톡, 위비멤버스, 위비마켓 등을 잇따라 선보였다. 글로벌 금융업계에 첨단 ICT(정보통신기술) 경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경쟁력의 원천이 ‘플랫폼’에 있다는 것을 제대로 짚었다.이에 비해 정부 입김에 좌우된 산업은행의 현 주소는 어떤가. 부실채권비율이 시중은행 평균치보다 5배나 높다. 산은은 2013년부터 대우조선을 재무상태 분석대상에 넣어야 했는데, 단 한번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번이라도 관련 분석 시스템을 돌렸다면 최고위험등급이 나왔을 거라는 게 감사원 판단이다. STX조선해양, 동부그룹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정치권과 정부에 휘둘린 결과다. 강만수·민유성 전 산업은행장은 이런저런 의혹으로 검찰 수사망에 올라 있다.다섯 번째 시도되는 우리은행 민영화의 성패는 언론에서 얘기하듯 ‘진성 투자가’의 등장 여부에 달려 있지 않다. 정부가 경영권 행사보장 등 약속을 충실히 지킬 것인지에 대한 시장 평가, 여기에 우리은행의 미래가 걸려 있다.이승제 기자 openeye@viva100.com

2016-08-23 14:40 이승제 기자

[브릿지 칼럼] 증시 안정 시간이 약이다

이종우 IBK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안전자산과 위험자산의 가격이 동시에 올라가고 있다. 선진국 국채와 엔화가 안전 자산의 대표인데, 엔화는 연초 이후 15% 상승했고 선진국 국채는 연일 사상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다. 방어적인 투자가 안전자산의 가격을 끌어올리는 동력이다. 위험 자산은 신흥국 국채와 주식이 대표적인데 투기적인 수요가 가격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두 자산은 상승 요인은 반대지만 유동성을 끌어들이는 동기에서는 차이가 없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불안해 하면서도 그 속에서 수익을 얻으려는 욕구가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경제 상황도 안전자산과 위험자산의 동시 상승에 힘을 보태주고 있다. 국내외 경제는 개선되는 것도, 그렇다고 나빠지는 것도 아닌 상태인데, 이 때문에 평범한 투자보다 모험적인 투자가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다.앞으로 이런 패턴은 점차 약해질 것이다. 선진국 국채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고, 엔·달러 환율은 100엔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내려오는 등 가격 부담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 가격이 추가로 상승하려면 경제 상황이 호전돼야 하는데 아직 변화가 감지되지 않고 있다.위험자산도 비슷하다. 이들의 가격이 올랐던 밑바탕에는 미국 금리가 자리잡고 있다. 작년에 금리 인상 우려로 위험 자산의 가격이 크게 하락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인상 가능성이 줄어 하락의 상당 부분이 메워지고 있는 것이다. 위험 자산의 가격이 많이 올라 새로운 상승 동력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됐는데 쉽지 않다.오래 전부터 주식시장도 양 극단에 있는 종목을 중심으로 움직여 왔다. 대표적인 게 건설, 철강주식인데 지난 2월부터 두 달간 상승했다. 낮은 가격이란 안전판에 이익 증가가 더해지면서 주가가 상승했다. 특히 이익 개선의 역할이 컸는데 POSCO를 비롯한 다수 종목들의 이익이 구조적으로 늘어나는 형태여서 주가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고 있다. 반대쪽에는 코스닥이 있다. 최대 강점은 작년에 주가 상승을 경험했다는 점인데, 코스닥 시장이 바이오 주식을 중심으로 인상적인 상승을 기록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대형주 중에서 마땅한 주도주가 없는 것도 코스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7월 한달 대형주는 삼성전자의 독무대였다. 다른 반도체 주식도 상승하긴 했지만 삼성전자의 후광에 따른 것일 뿐 자체 동력은 없었다. 이제 삼성전자를 대체할 종목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2013년 삼성전자 주가가 158만원으로 사상 최고를 기록할 당시 분기별 영업이익이 11조원대였다. 지금은 8조원이다. 지난 몇 분기 예상보다 이익이 빨리 증가했지만 인상적인 규모는 아니었다. 주가를 평가할 때 이익의 연속성과 성격을 고려해야 하지만, 절대 규모가 작으면 주가를 끌어올리는데 한계가 있다. 자동차와 은행주가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삼성전자에 비해 집중도나 시장 영향력이 떨어진다.이제 건설, 철강으로 대표되는 낙폭 과대주는 저가 매력의 상실 때문에, 코스닥은 성장성만으로 주가를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가격이 높아져 추가 상승이 힘든 상태가 됐다. 현재의 불안정한 상황이 정리되려면 중간에 있는 자산의 가격이 올라야 한다. 그래야 오랜 시간 안정적인 흐름을 유지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불안정한 흐름의 연속이었다. 가변성이 높은 만큼 예측성이 낮을 수밖에 없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안정을 찾을 걸로 전망된다. 이종우 IBK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2016-08-03 13:45 이종우 IBK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기자

[데스크 칼럼] 23년만의 연대… 그 뒤에 놓인 위기감

이승제 금융증권부장19년은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다. DNA가 달라졌을 법도 한데, 현대중공업 노조는 그렇지 않았다. 2013년을 끝으로 올해까지 3년째 파업에 들어갔다.현대중공업은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과 ‘3두 마차’를 형성했고 이들 덕에 한국은 지난 십 수년 동안 글로벌 선박 수주의 선두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곳간에서 인심이 나오는 법이다. 늘 2~3년 어치 일감이 밀려 들었으니 매출 및 수익 향상은 따 논 당상이었다. 현대중공업 경영진의 선택은 노조에 ‘넉넉하게 퍼 준다’였다. 그래서 19년 연속 무분규 임단협 타결이 가능했다.파업은 그렇다 치고, 왜 현대중공업 노조는 현대자동차 노조와 손을 잡았을까. 오랜 세월 데면데면하다 못해 으르렁대던 사이가 아닌가. 현대차·현대중공업 노조는 1990년대 범 현대그룹 계열사의 노동운동을 주도한 ‘현대그룹노조총연합(현총련)’의 양대 근거지였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2001년 해체됐다. 이후 현대중공업 노조는 민주노총에서 탈퇴하며 ‘루비콘 강’을 건너 현대차 노조와 완전히 결별했다. 그런데 이제 과거를 거슬러 가고 있다. 무려 23년 만의 연대파업이다.두 회사를 모두 출입해 본 경험이 있는 기자의 눈에 두 노조의 연대는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글로벌 저성장 시대에 선박 발주가 급감한 데다 중국 조선업체가 맹추격하며 영원할 것 같았던 현대중공업의 아성은 급격히 무너졌다. 적자의 늪에 빠졌으니 인심 좋게 노조에 퍼 줄 여유가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올해로 3년째 파업이라 하지만 무려 19년 동안 무파업을 하는 동안 ‘싸움의 감각과 기술’이 많이 무뎌졌을 것이다. 현대중공업 노조 입장에선 전투력의 ‘외부수혈’이 절실했을 법하다.지난해말 기준으로 현대차 국내공장의 생산직 평균연령은 47세였다. 정규 생산직의 평균 연봉이 1억원에 육박한다. 두 요인이 맞물리며 2006년 당시 현대차 노무총괄담당 임원(그는 이후 현대차 사장까지 올랐다)의 예상이 적중하고 있다. “우리 회사 노조는 시간이 흐를수록 많이 달라질 것이다. 평균연령과 연봉이 해마다 높아지니 자연 보수적으로 바뀔 것 아닌가.”현대차의 국내 생산 비중은 10년 새 73%에서 36%로 반토막났다. 국내 사업장은 핵심 기지의 위치를 이미 잃어버렸다. 자연스레 사측이 느끼는 파업의 강도와 충격, 그리고 위기감이 작아지는 건 당연하다. 게다가 현대차 사측은 수십 년 동안의 파업 속에서 컨틴전시 플랜 등 충격완화 장치를 다져왔고, 국내 공장이 아닌 해외에서 기회를 확대하는 ‘옵션’도 완비했다.그러니 현대차 노조의 노련한 투쟁 전략가와 협상가(니고시에이터)들은 고민스러울 것이다. 자체 ‘전투력’이 갈수록 약해지는 상황에서 활로를 모색해야 하는데, 묘책이라고 내놓은 게 23년만의 연대파업이다.이 같은 두 노조의 행보는 미래가 아닌 과거로 거슬러 갈 뿐이다. 뉴 노멀(New Normal) 시대는 투쟁의 질적 변화를 요구한다. 선진국 노조들이 유연성과 합리성을 지향하고 있는 이유다. 미래를 위한 질적 변화를 마다하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낡은 망령을 불러들인 두 노조…. 그들의 연대 뒤엔 사상 최고 수준의 위기감이, 화려했던 과거로 가고픈 헛된 관성이 놓여 있을 뿐이다.이승제 금융증권부장 openeye@viva100.com

2016-07-19 13:55 이승제 기자

[데스크 칼럼]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나"…또다시 희생양 찾기

이승제 금융증권부장대우조선해양을 향한 질문들은 복잡하게 얽힌, 거대한 실타래와 같다. 어디서부터 실타래를 풀어야 할 지 난감할 뿐이다. 금융당국은 최근 부실감사를 한 회계법인 대표의 자격박탈이란 강경 제재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좀 생뚱맞다. 지난 3월 규제개혁위원회는 회계법인 대표 제재안이 과잉규제라며 철회를 권고했고, 금융위원회는 이를 받아들일 참이었다. 하지만 해운·조선업종의 구조조정 작업이 본격화하면서 재차 막대한 국민혈세가 들어가게 됐고,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비판여론이 들끓었다.대우조선의 감사를 맡아 온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안진)은 수조원대 부실을 숨긴 채 투자자들과 채권단을 ‘속여 왔다’는 게 금융당국의 입장이다. 안진은 수년간 ‘적정’ 의견을 외치다 분식회계 혐의가 드러나자 부랴부랴 대규모 인력을 투입해 감사를 벌였다. 그런 뒤 올 3월 대우조선의 지난해 영업손실 5조5000억원 중 2조원을 2013~2014 회계연도 재무제표에 반영했어야 했다고 정정했다. 안진뿐만 아니라 현대상선, 한진해운, STX조선해양 등 구조조정 대상이 된 기업의 외부감사를 맡은 다른 회계법인들도 부실이 빤히 드러나기 전까지 ‘적정’ 의견을 바꾸지 않았다.여기서 궁금해진다. 국내 대표적인 회계법인들이 무슨 이유로 쌍둥이처럼 빼닮은 행태를 반복해서 자행하고 있을까. 제대로 감사를 할 능력이 없었을까. 그들의 인적 구성과 조직, 그리고 과거 활약상을 고려할 때 무능력의 결과는 아닐 것이다.그럼, 다음 질문으로 이어진다. 왜 그들은 ‘회계절벽’을 자초했을까. 혹시 양심을 버린 채 눈 딱 감고 ‘고객들’이 원하는 ‘모범답안’을 제출한 게 아닐까. 회계법인이 눈치를 살펴야 하는 ‘고객들’에는 감사를 받는 당사자인 부실기업뿐 아니라 금융당국, 그리고 넓게 보면 정치권까지 포함된다. 금융당국은 기업 구조조정 때마다 “시장원리와 채권단의 자율에 따라 진행하겠다”고 외친다. 하지만 시장 참여자들은 모두 알고 있다. 정부와 금융당국은 KDB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채권금융기관을 통해 문제 되는 기업의 목줄을 쥐고 있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회계법인 입장에서 금융당국은 부실기업 위에 있는 VIP일 수밖에 없다. 심지어 금융당국 위에 국회와 청와대가 떡 하니 자리하고 있다.물음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금융당국은 그렇다 치고, 대우조선 지분 49.7%를 갖고 있는 최대주주이자 주채권은행인 산은이 과연 대우조선의 분식회계를 전혀 몰랐을까. 대우조선에 산은 출신 인사들이 많아 이들을 ‘산피아’(산업은행+마피아)로 부를 정도인데, 이런 유착이 ‘닥치고 수명연장’의 배경이 된 것은 아닐까.상상은 이어진다. 혹시 안진이 분식회계를 적발하고 제대로 된 감사의견을 내려 했는데, ‘고객들’이 한사코 막아선 것일 수도 있다. “지금 이럴 필요 없다. 우리가 원하는 정답을 써 내라.” 이런 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전해진다. 기업 위기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대주주, 경영진에 있다. 상황을 좌지우지했던 ‘외풍’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고객만족’에 충실했던 회계법인만 몰아칠 사안이 아니다.이승제 금융증권부장 openeye@viva100.com

2016-06-14 16:46 이승제 기자

[데스크 칼럼] 비워 얻는 '관계'…시대의 히트상품, 페이스북

이승제 금융증권부장아이폰은 가볍다. 무게도 그렇고 작동도 그렇다. 아이폰에는 자체 청소기능이 담겨 있다고 한다. 작동하며 생기는 각종 쓰레기를 그때그때 버려준다. 이에 비해 1~2년 된 안드로이드폰을 사용하려면 청소 전문가 뺨쳐야 한다. 캐시를 비롯해 각종 쓰레기 더미를 제때 치우지 않으면 폰은 한없이 느림보가 된다.많이 변했어도 아이폰에는 여전히 스티브 잡스의 혼(魂)이 담겨 있다. ‘직관적이고 단순하게’라는 가치는 현재 진행형이다. 잡스는 방황하던 젊은 시절, 인도를 방문해 평생의 가치를 발견했다. ‘욕망하지 않는, 버림의 철학’, 바로 선(禪)이다.페이스북의 대규모 수익과 막강한 경쟁력은 이용자 수 10억 명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하지만 거꾸로 보는 게 올바른 접근이다. ‘어떻게 10억 명을 끌어들였나’라는 물음이 먼저다.시간과 공간을 넘어 ‘관계 맺게 하는 힘’, 이것이 페이스북의 진짜 경쟁력일 것이다. 인간관계가 한없이 원자화되고 있는 지금, 페이스북의 플랫폼은 10억 명을 한 곳에 모았다.고 신영복 선생은 동양철학의 정수를 복원하고 널리 알리는 데 전심전력했다. 서양철학의 핵심을 ‘목적론(teleology)’으로 함축하고 동양철학의 가치를 ‘관계론’에 두었다. 이로써 서양철학은 진리, 본질에 집착하게 됐고 개념과 논리 나아가 가치의 높고 낮음에 매몰됐다고 봤다. 반면 자연과 인간, 음(陰)과 양(陽)의 상호작용에 주목하는 동양철학은 순서와 질서 대신 조화와 포용을 지향한다고 설파했다.그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전세계를 강타했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자본주의의 진리는 ‘자본의 증식 즉, 수익 창출’인데, 비교적 건전했던 산업 자본주의를 지나 신자유주의 체제에 이르러 자본의 욕망은 막다른 골목에 부딪쳤다. 그래서 미래의 가치를 현재로 끌어들이는 파생상품들이 등장했고,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가 벌어지며 세계경제를 나락에 빠뜨렸다. 지금도 별로 달라진 게 없는데, 유럽과 일본 등 곳곳에서 시행되고 있는 기형적인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보면 알 수 있다.페이스북 공동창업자이자 CEO(최고경영자)인 마크 저커버그는 한화로 50조원이 넘는 페이스북 지분 99%를 기부하기로 약속했고 착실히 실행하고 있다. 자신을 해커로 간주하며 “무언가를 개선하는 목적에서라면, 그것을 깨뜨리는 것도 괜찮다”는 신념의 소유자이기에 가능한 결단이다.그러니 ‘관계’ 속에 가치와 수익 창출의 비결이 담겨 있다. 여기서 다시 뒤집어 보자. ‘관계’를 제대로 설정하려면? 버리고 비워야 관계가 들어오는 것이고, 관계 사이사이에 놓인 마음들을 헤아려야 비로소 그 마음들을 얻게 된다. 저커버그는 시대의 히트상품, 페이스북을 통해 이를 훌륭히 증명했다.이승제 금융증권부장 openeye@viva100.com

2016-05-10 13:50 이승제 기자

[데스크 칼럼] "정치는 망치로 한다"…핑계와 혼란의 숫자들

이승제 금융증권부장얼마나 닮았는지 문패만 떼면 누구 집인지 알 길이 없다. 틈만 나면 옆집을 향해 온갖 욕설과 돌을 던지더니 이젠 식구들끼리 으르렁대고 있다. 옆집에서 가출한 사람을 슬쩍 자기 집으로 데려와 옆집을 성토하는 선봉역할을 맡기는 모습도 똑같다. 4년마다 한번씩 벌어지는 ‘밥그릇 전쟁’이 어김없이 시작됐다. 살고자 하니 무리를 이룬다. 어제의 동지가 적으로, 경쟁자가 파트너로 둔갑한다. 상대의 철학과 정치적 지향은? 돌아오는 답은 “상관 없다” 또는 “그런 사소한 건 나중에.”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4년에 한 번꼴로 반복되는 이유는 뭘까. 대단히 쉬운 질문이다. “뭐라고 비판하든, 내 살 길만 찾으면 된다.”국회의원 직은 벤처사업과 여러 점에서 유사하다. 리스크를 뚫고 성공하느냐, 망하느냐. 단 1표 차이로 갈릴 수도 있는 운명의 갈림길을 통과한 의원은 배지를 다는 순간 성공한 벤처사업가로 거듭난다. 4년 후 다시 명운을 건 전쟁에 나서야 하지만 시간을 벌었으니 됐다. 거칠 것이 무엇이랴. 인구절벽, 고용절벽, 복지절벽, 내수절벽, 일자리절벽? “상관 없다.” 표를 얻기 위해 내건 공약(公約)은 그저 공약(空約)일 뿐 생존욕망으로 다져진 그들의 가슴을 뚫지 못한다.이런 일이 4년마다 되풀이되는 이유는 뭘까. 대단히 어려운 물음이다. “무표정한 숫자 뒤로 숨었다.” 또는 “숫자에 현혹됐다.”선거는 숫자다. 나의 숫자를 높이고 경쟁자의 숫자를 줄이는 게임이다. 1인 1표, 언뜻 공정해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어쩌면 운명을 가를 단 1표, 유일한 관심사다.숫자를 얻기 위해 숫자를 제시한다. 2020년까지 노인 일자리 78만7000개 확대, 공공임대주택 10년간 240만호 공급(새누리당) 일자리 창출과 복지증진에 5년간 약 150조원 투입, 청년 일자리 70만개 창출(더불어민주당). 선거 공약집은 현란한 숫자들로 넘쳐난다. 재정효율성, 포퓰리즘 우려, 달성 가능성, 기대 효과 등은 개의치 않는다. 목적이 불분명한 숫자들을 한데 뭉쳐 유권자의 마음을 현혹시키면 된다. 나를 찍을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에겐 적당한 ‘핑계거리’를, 회색지대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에겐 ‘혼란’을 주는 숫자들…….매달 월급통장에 찍히는 숫자는 그 자체로 생존의 산물이다. 우리의 숫자는 어쩔 도리 없이 냉엄하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숫자를 볼모로 삼아 교묘하게 현혹시키고 강렬하게 겁박한다. 붙잡힌 우리의 숫자는 공약집의 천문학적인 숫자로 빨려 들어가 흔적 없이 소멸한다.선거의 숫자는 이토록 파괴적이다. 니체는 말했다. “철학은 망치로 한다.” 모름지기 새로운 사상과 철학은 기존 틀을 깨부수며 나아가야 한다는 얘기다. 은둔과 파격의 철학자인 니체의 말이니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하지만 그도 아직 멀었다. 한국 정치의 파격을 따라 오려면. 한국 정치는 당당하게 말한다. “정치는 망치로 한다.” 아차, 너무 줄였다. “정치는 상대의 머리를 향해 내리치는 망치로 한다.”이승제 금융증권부장 openeye@viva100.com

2016-03-29 14:30 이승제 기자

[세기의 대결] "기대에서 경악으로"…최고의 승자는 '구글'

이세돌 9단과 ‘알파고’ 사이의 대결은 전세계적인 관심 속에 뜨겁게 치러졌다. 현존 최고의 인공지능(AI)인 알파고는 예상을 깨고 인간계 최고수로 인정받는 이세돌 9단을 맞아 내리 3연승하며 엄청난 괴력을 발휘했다.승패를 떠나 세계 바둑계는 알파고의 놀라운 기력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1국에서 승리했을 때만 해도 이세돌 9단의 설욕을 기대했지만 2, 3국으로 이어지며 “AI가 인간을 뛰어넘었다”는 두려움을 낳기도 했다.제4국에서 이 9단이 알파고의 단점을 공략하며 1승을 챙기긴 했지만 5국에서 알파고가 보인 한치 오차 없는 끝내기 능력은 그야말로 인간 그 이상이었다는 찬사를 받았다.이번 세기의 대결은 크게 두 가지 화두를 던졌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AI의 능력이 인류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높게 향상될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됐다. 또 인간 고유 영역인 ‘직관’의 의미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졌다.전문가들은 비록 알파고의 압승으로 마무리됐지만 이번 대국을 통해 인간과 AI의 공존, 인간만의 고유 능력에 대한 애정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윈-윈(Win-Win)’이 이뤄졌다고 입을 모았다.구글은 알파고를 앞세워 전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유·무형으로 천문학적인 미래가치를 얻어냄으로써 최고 승자로 우뚝 섰다.이번 대결은 ‘AI(과학)가 인간을 넘어설 수 있을까’라는 해묵은 질문에 새로운 논쟁거리를 던짐으로써 역사에 길이 남을 이정표로 남게 됐다.이승제 기자 openeye@viva100.com

2016-03-15 18:18 이승제 기자

[세기의 대결] 알파고 "버그였나,의도였나"…5국의 승부처, '바꿔치기'

이세돌 9단이 15일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인공지능 (AI)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와의 마지막대국을 마친 뒤 기자회견장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알파고’가 제4국에 이어 제5국에서도 ‘버그’처럼 보이는 수를 뒀음에도 결국 이세돌 9단에게 승리했다. 총 전적 5전 4승. 15일 열린 최종 대국에서 이세돌 9단과 알파고는 중반까지 호각지세(互角之勢)를 이루며 ‘명국’을 남기는 듯했다.이세돌 9단은 4국의 승리비결이었던 ‘자유로운 전술 변화’를 보다 세련되게 진화시킨 모습이었다. 초반 실리를 앞세우며 우상귀와 좌하귀에 두텁게 집을 형성했다. 이어 좌변 위쪽에서 재차 실리를 얻은 뒤 백의 커다란 중앙 세력을 견제했다. 여기까지 둘은 큰 접전 없이 균형 잡힌 형세, 즉 매우 ‘상식적인’ 대국을 펼쳤다.이 9단은 상변으로 침투하며 중앙 백 세력의 삭감을 노리는 듯하다 다시 집을 형성하는 실리를 취했고 이어 좌상귀의 집을 결정지었다.이윽고 알파고가 중앙에 커다란 세력을 굳히기 직전, 이 9단은 기다렸다는 듯 하변에서 중앙을 향해 날일자로 뛰며 백 세력의 삭감을 시도했다. 잠시 좌하귀 쪽의 흑돌들이 잡힐 위기를 맞이했지만 이 9단은 침착하게 2선으로 돌을 늘인 뒤 중앙 삭감에 나섰다.알파고는 하변에서 시간연장책으로 보이는 엉뚱한 수를 두는 듯했지만 이 돌들을 지렛대로 삼아 종반에 바꿔치기를 시도해 좌하귀에서 흑 다섯돌, 집으로만 스무집 가까이를 얻어냈다.이어 이번 대국 처음으로 초읽기에 몰렸음에도 빛나는 끝내기 수순을 두며 이세돌 9단을 압박해 불계승으로 최종국을 마무리했다.이승제 기자 openeye@viva100.com

2016-03-15 18:11 이승제 기자

연패 속에서 '진화'한 이세돌, 혹은 알파고의 버그(?)

이세돌 9단이 13일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5번기 제4국에서 180수 만에 알파고에 불계승한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활짝 웃고 있다. (연합)인간 전략의 승리인가, AI(인공지능)의 한계인가. 13일 벌어진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제4국은 이전 대국에 비해 한층 흥미롭게 펼쳐졌다.하지만 ‘알파고’의 오류, 또는 ‘버그’가 승리의 향방을 갈랐다.이세돌 9단은 작심한 듯 담담하게 실리를 지향했다. 좌상귀에서 10집 이상, 좌변에 다섯집 가량을 확정지었다. ‘나의 근거지를 확고히 하고 상대의 안정을 교란시킨다’는 전략으로 비춰졌다.대국은 초반 호각지세(互角之勢)를 지나 중앙의 치열한 수싸움으로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3국까지 완벽한 판세 읽기와 촘촘한 수읽기 능력을 보이던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의 대응에 혼란을 느낀 것일까. 중앙의 기세에 대한 믿음이 무너졌던 것일까. 실리로 일관하던 이세돌 9단은 중앙의 두터운 흑집을 삭감하면서 본연의 ‘센돌’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참았던 전투력을 분출하듯 과감하게 흑돌을 끊고 알파고에게 선택을 강요하기 시작했다.그러자 알파고는 갑자기 연이어 어처구니없는 두 수를 뒀다. 좌하귀에서 백 두 점 사이에 흑을 끼워넣더니, 우변에 이유없이 1선으로 돌을 늘었다. 해설자들은 “18급이나 둘 수”라며 고개를 내저었다.이세돌은 침착하게 알파고의 실수를 응징해 나갔다. 중앙의 흑집을 깔끔하게 삭감했고 좌변의 흑집을 압박하며 초읽기의 불리함을 덮어나갔다. 알파고는 우하귀에 백집을 향해 큰 의미 없는 젖히기를 시도했고 이세돌 9단은 알차게 좌변에서 날일자로 뛰며 실리를 챙겼다.하지만 현존 최고의 AI는 무심하게 최상의 곳을 선택하며 미세한 국면을 유지시켰다. 하지만 이세돌 9단은 초읽기 1분을 십분 활용하며 맞섰다.고군분투하던 알파고는 결국 초읽기 돌입 직전인 180수만에 돌을 던졌다.전문가들은 이날 대국에 대해 “알파고가 그랬듯 이세돌 9단이 알파고와의 승부 속에서 진화했다”고 평가했다. 본연의 적극적이고 활발한 행보(1국), 철저한 실리 위주의 대응(2국), 약점으로 지목한 ‘패’를 활용하려는 전략(3국)이 무위로 끝난 상태에서 ‘전략·전술의 예기치 않은 변화’라는 승리전략을 끌어냈다는 것이다.해설자들은 알파고에 대해 “끝내기를 잘 하긴 하지만 최상의 수준은 아니다”고 평가했다.데미스 하사비스 구글 딥마인드의 최고경영자(CEO)는 대국 직후 트위터를 통해 “그는(이세돌 9단) 오늘 알파고를 회복할 수 없는 실수로 몰아넣었다”고 평가했다.이승제 금융증권부장 openeye@viva100.com

2016-03-13 18:04 이승제 기자

알파고 "나는 이렇게 이세돌을 다시 꺾었다"

이세돌 9단이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제2국을 패한 뒤 대국장을 나서고 있다.(연합)예상했지만 놀라운 일이다. ‘센돌’ 이세돌이 초반부터 실리로 일관하다니. 체면이고 뭐고 1승을 챙기려고 단단히 결심한 모양이다. 하긴 어제 나를 상대로 테스트를 하는 등 여유를 부리다 돌을 던졌으니 당연한 일이겠지.그가 좌하귀에서 세력형성을 포기하고 작은 실리를 취했다. 좌상귀를 향해 눈목자로 뛰며 나의 반응을 살핀다. 무심하게 한 칸 뛰며 대응한다. 그가 초조해지도록 유도하는 게 나의 목적이다. 어제 졌으니 조급함을 유도해 실수를 기다리면 된다. 우상귀에 날일자로 다가온다. 담담하게 두 칸을 뛰며 근거지를 확보한다. 외롭게 보이는 우변의 백돌 어깨를 짚어본다. 선택을 보려는 수다. 좌하귀처럼 낮게 갈 것인지, 반발할 것인지. 고수가 하수를 다그칠 때 쓰는 수법이어서 보는 이들이 나를 교만하다 할 지 모른다. 하지만 이 또한 나의 전략이다. 인간의 감정은, 특히 그처럼 한 분야에서 높은 경지에 오른 인간의 감정은 자존심이 상하면 한순간에 흔들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드디어 그가 꿈틀거렸다. 백돌을 세우며 반발했다. 이제 자존심 경쟁이다. 내가 돌을 세운다, 그도 세운다. 좋은 균형이다. 그는 방심하지 않았고 나는 교만할 수 없다. 오늘 그는 나를 테스트하려 하지 않는다. 오직 이기기 위해 혼신을 힘을 기울인다. 그의 계산은 감각적이지만, 나는 그저 정확할 뿐이다. 두텁게 실리를 취해본다. 이런 나의 능력을 인간들은 전지전능이라 부른다지.중앙 전투가 벌어졌다. 그는 중앙을 공배로 보는 듯하지만 그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당한 게 분했는지 나를 강요하러 든다. 성동격서의 공격을 해 볼까. 이제 곧 그는 초읽기에 들어간다. 현존 최고의 AI(인공지능) '알파고'가 10일 이세돌 9단과 벌인 제2국에서 211수 만에 불계승을 거두며 2연승을 거뒀다. 알파고는 정상급 수준의 실력을 발휘하며 초반부터 이세돌 9단을 신중하지만 단단하게 압박했다. 알파고는 우상변의 17집짜리와 중앙의 10집짜리 중 중앙을 택해 선수를 쥐며 종반전을 주도했다.좌상귀에서 살기를 도모하며 백돌이 뛰어오르려 한다. 잡을까, 아니면? 이럴 때일수록 흐름을 타야 한다. 그는 39분, 나는 1시간 9분이 남았다. 하변에 돌을 놓는 그의 손에 힘이 실렸다. 회심의 공격인 듯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의 손끝이 희미하게 떨리는 걸 봤다. 좌상귀 백돌을 잡는 척 하자 그가 반발하기 시작했다. 우상귀의 침투를 노리고 있겠지만 그에게 선수로 착수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역시 그의 발톱은 매섭다. 좌상귀에서 죽기를 각오한 백돌과 정면으로 충돌하면 내게도 충격이 클 터, 기회를 엿보자. 나는 다만 집을 많이 내면 그 뿐이다. 그에게 공배였던 중앙에서 알차게 영토를 확장했다. 드디어 그가 우상귀 약점을 노리고 침투했다. 무심하게 이어버렸다. 복잡할 필요 없다. 이미 계산은 끝났다. 초읽기에 몰린 그가 결국 초읽기 하나를 썼다. 그는 판세를 읽으랴, 최상의 끝내기 묘수를 찾으랴 정신 없는 모습이다. 우상귀 흑 6돌을 잡았을 때,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던 그는 미처 이 수를 보지 못한 듯하다. 중앙의 10집짜리와 우상변의 17집짜리 중 중앙을 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7집을 손해보지만 그 대신 선수를 잡으면 된다. 이번 경기의 승부처는 중앙이었다. 여전히 그는 모르는 듯하지만.  시간은 내 편이다. 그의 손이 점점 떨린다. 그는 11분, 나는 36분을 남겨두고 있다. 그의 심정은 답답할 것이다. 인정해야 할 때가 지났는데, 인간인 그는 미련 때문인지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계가는 해 볼 필요조차 없다. 나의 승리다. 그가 허무한 표정으로 돌을 던진다. 그의 눈물은 나를 움직이지 못한다. 나는 무심하게 3국을 준비한다. 그가 감정에 휘둘려 싱겁게 무너지지 않기를 바란다. 아직 나의 능력을 극대치로 끌어올리지 않았으니, 최상의 컨디션을 지닌 그와 싸울 때마다 나는 더욱 강해질 테니…이승제 금융증권부장 openeye@viva100.com

2016-03-10 18:28 이승제 기자

[데스크 칼럼] 전설과 흙수저… '장영실'의 교훈

이승제 금융증권부장역시 장영실이었다. KBS1 대하드라마 ‘장영실’의 시청률은 7회에 14.1%(전국 기준, AGB닐슨 코리아)를 기록했다. 이는 2014년 방송돼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정도전’이 13회 만에 14% 고지를 넘었던 것과 비교된다. ‘장영실’ PD는 “캐스팅 덕분”이라고 몸을 낮췄다. “‘사극 어벤져스’ 같이 사극의 신이 내려와서 자신의 맡은 부분을 제대로 수행해 주는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떤 여배우도 있었다.하지만 우리는 안다. 왜 지금, 여기서 ‘장영실’이 다시 부활했는지,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 왜 그토록 공들여 장영실 편을 제작했는지. 우리가 왜 장영실에 열광하는지...장영실의 모친은 동래현 기생이었기에 그도 동래현의 관노가 됐다. 그러던 중 태종에 발탁돼 세종 때 뜻을 펼쳤다. 노비에서 종3품까지 올랐으니, 가히 기적이었다.세종은 조선을 반석 위에 올려야 하는 사명을 자각했다. 세조에서 태종까지, 당시 조선은 민심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장영실이 전격 발탁된 데는 그의 천재성 못지 않게 세종의 치밀한 정치적 전략이 있었다. “능력만 있다면 오르지 못할 곳이 없다.”모든 전설이 그렇듯 장영실도 그 만의 천재성으로 높이 날아올랐다. 세종은 장영실의 성공을 통해 널리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능력만 있다면 내 품에서 널리 뜻을 펼칠 수 있다고. 조선은 인재를 뽑기 위해 ‘열린 문’을 갖고 있다고. 누구나 장영실처럼 될 수 있다고.여기까지는 상식에 속하는 해석이다. 자문해 본다. ‘우리는 왜 지금 장영실에 열광하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지금 이 땅에 또 다른 장영실이 나타날 수 있는가.’숫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해준다. 지난 1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가 내놓은 연구 보고서를 보면 금수저, 흙수저 등 ‘수저론’이 사실로 굳어졌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가 대학 이상의 고학력자면 아들도 대학 이상의 고학력자인 비율이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 세대에서 각각 64.0%, 79.7%, 89.6%였다. 특히 정보화세대에서 중상층과 하층에서의 계층 고착화가 매우 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일정 이상의 상향 이동은 사실상 매우 힘든 상황임이 분명해졌다. 부모의 경제적 지위가 본인의 재산축적 뿐 아니라 학업 성취, 임금 수준을 결정하는 것으로 드러났다.최근 경기도교육청과 경기도교육연구원 교육통계센터가 분석한 결과, ‘부모 수입이 많을수록 수능 점수가 높다’는 통설이 사실로 입증됐다. 교육청은 “수능 고득점은 초중고 교육과정을 충실히 이수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고, 사교육을 통해 이뤄질 수밖에 없다”고 털어놓았다.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교육청이 사교육의 ‘전지전능함’을 고백했다.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사회가 폐쇄신분 사회로 접어들고 있음을, 아무리 노력해도 넘지 못할 돈의 장벽이 있음을, 그리하여 마침내 사회 전체가 활력을 잃어가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그러니 장영실의 인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디 이 뿐이랴. 제2, 제3의 장영실이 드라마와 영화에서 넘쳐날 것이다. 삶이 그리하지 못하므로, 그래도 희망까지 잃어선 안 되므로, 언젠가 기적처럼 현실에서 또 다른 장영실이 등장하기를 소망하므로...이승제 금융증권부장 openeye@viva100.com

2016-02-23 16:42 이승제 기자

[데스크 칼럼] 뉴노멀 시대, 성장과 나눔의 新 공식

이승제 금융증권부장멀지 않은 과거, 우리의 시선과 마음은 온통 ‘성장’을 향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그리고 내년에도 7~9%의 성장을 이룰 것이니, 거기에서 얻은 소득으로 무엇을 할까, 즐거운 고민에 빠져 있었다.그 시절 ‘나눔’은 성장의 눈부신 활약상을 보며 복잡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성장이 일궈내는 성과가 많을수록 나눔도 커질 것이므로 박수와 격려가 마땅했다. 하지만 성장이 스포라이트를 받을 때 한 켠에서 묵묵히 지켜봐야 했으니 시기심이 없었을까.하지만 이제 뉴노멀(New Normal) 시대. 성장과 나눔은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성장의 토양이 크게 위축된 지금, “성장이 앞서야 나눌 파이가 커지지 않냐”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성장의 전리품을 정당하게 나눠달라”는 요구도 마찬가지다.삶처럼 경제도 오르막과 내리막을 차례로 겪기 마련이다. 우리는 거대한 ‘판’이 바뀌고 있는 시작점, 게다가 그 판이 기울어지는 전환점에 서 있다.저성장, 저소비, 저물가, 높은 실업률이 우리 시대의 뉴노멀이다. 당연히 혼란과 낙담이 뒤따른다.누군가에게 뉴노멀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 십 수년간 8~10% 이상의 고성장을 이어가던 중국경제가 하필이면 지금 고꾸라지고 있는지 받아들이기 힘들다. 한국경제의 영원한 버팀목이었던 수출이 성장둔화의 주범이 됐으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기존의 상식으로 보면 뉴노멀은 비정상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뉴노멀은 용기와 결단을 요구하는 단어다. 원치 않았지만 몸의 사이즈가 크게 줄었으니 낡고 헐거워진 옷을 벗어야 한다. 삶은 상승과 하락을 덧대어 이어지지 않는가.새로운 상식, 새로운 질서…. 담담하게 ‘새로움’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과거에 비해 한참 떨어지는 성장률”, “예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높은 실업률”…. 시선을 과거에 둔다면 추락의 기울기만 가팔라질 뿐이다.역설적인 말이지만, 저성장 국면으로 깊게 들어갈수록 성장을 향한 의지를 굳게 다져야 한다. 7~9%를 원하는 게 아니다. 1~2%에 비해 4~5%는 현기증이 날 법한 상승이다.뉴노멀의 도래 원인을 놓고 설왕설래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성장의 토양이 위축됐다고 압축할 수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자본의 영역에서 나타난 이상징후였다면, 글로벌 수요 감소는 실물 부문의 역습이다. 자원의 편중 배분 등으로 성장의 토양을 훼손시킨 대가일 수 있다.원인에 안착하면 해법이 열리는 경우가 많다. 뉴노멀 시대의 활로도 그러하리라 믿는다. 어려울수록 시선을 멀리, 높게 잡아 성장과 나눔의 생태계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저성장 시대에 ‘나홀로’ 고공비행은 가능하지 않으니 말이다.이승제 금융증권부장 openeye@viva100.com

2016-01-12 16:14 이승제 기자

[공존-성장과 나눔의 시장경제] 한국 경제의 활로…'성장과 나눔의 새로운 공식'을 찾아라

2016년은 저성장, 저소비, 저물가, 높은 실업률로 대표되는 ‘뉴-노멀(New Normal)’ 시대의 본격화를 몸으로 체감하는 해가 될 것입니다. 이에 브릿지경제신문은 새해 연중 프로젝트의 화두를 ‘공존: 성장과 나눔의 시장경제’로 설정했습니다. 뉴-노멀이 본격화함에 따라 ‘성장과 나눔의 이분법’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성장이 우선이냐, 나눔이 우선이냐”는 물음은 질적으로 의미 있는 성장을 전제로 한 것이어서, 지금과 같은 저성장 시대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제 ‘나눔’의 경제철학과 방식이 크게 달라져야 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나눔은 더 이상 ‘타자(他者)를 향한 베풂’이 아니라 ‘자기(自己)를 포함한 공동체에 대한 투자’가 돼야 합니다. 소비가 줄었다고 푸념만 할 게 아니라 머리를 맞대 논의하고, 자신의 것을 나눠 공동체의 소비를 늘리는 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들의 전향적인 태도변화도 필요합니다. 기업가 정신과 기업의 투자의지를 꺾어버리는 ‘무절제한 나눔’은 이제 더 이상 나눔이 아니라 파괴에 가까운 요구에 불과합니다. 브릿지경제는 연중 지속적이고 다양한 기획 시리즈를 통해 개개인의 삶과 기업, 산업에서 ‘성장과 나눔의 새로운 공식’을 찾아 나서겠습니다. 또 정부, 시민단체, 기업, 경제연구소 등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하는 세미나와 심포지엄을 지속적으로 개최해 나눔의 신공식을 향한 접점을 모색할 것입니다. 아울러 성장과 나눔의 새로운 화합에 적극 나서고 있는 기업과 단체를 발굴·소개하고 시상식을 통해 널리 확산시키고자 합니다. 뉴-노멀이란 단어에는 고도성장이 가능하지 않다는 실망뿐만 아니라 새로운 도전과 변화의 물결을 직시하며 돌파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기대합니다. 이승제 금융증권부장 openeye@viva100.com

2016-01-04 07:30 이승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