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칼럼] 공공은 신성한 것이 아니다

김성준 경북대학교 교수
입력일 2023-04-03 09:10 수정일 2023-04-03 09:12 발행일 2023-04-03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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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준
김성준 경북대학교 교수

오래 전에 <공공의 적(2002)> 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설경구, 이성재 등 당대 내로라하는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역시 영화는 약자가 강자를 복수하는 것만큼 재미있는 게 없는 듯하다. ‘복수’라는 듣는 것만으로도 통쾌한 말과 함께 나는 영원히 강자가 될 수 없을 거라는 일종의 ‘패배의식’이 절묘하게 결합된 탓이 아닐까?

필자와 같은 사람들이 많았는지 이 영화는 크게 히트했다. 각종 영화부문에서 큰 상들을 수상하고 그 후속 작품들 역시 많은 인기를 누렸다. 이후에는 비슷한 주제의 영화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이제는 한국영화부문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영화 제목인 공공의 적에서 ‘공공’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한국사회에 공공이라는 말 보다 더 거룩한 말로 오용, 남용되는 말이 있을까 싶다. 공공이란 말이 붙으면 누구도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없는 신성한(sacred) 것으로 받아드릴 정도다.

필자가 행정학계에 종사하고 있어서 인지 유난히 공공이란 말을 많이 사용한다. 공공정책, 공공예산, 공공시설 등 정부에서 하는 일은 모두 공공성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공이라는 개념을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를 어떤 관점에서 보는가, 어떤 분야나 이론적 입장에서 보는가에 따라 가지각색으로 해석된다.

공공의 영어는 public으로 일반사람들(의) 혹은 공유하는 사람들(의)라는 뜻이다. 구글에 검색해보니 “국가나 사회의 구성원에게 공동으로 딸리거나 관계되는 것”이라고 나온다. 경제학과 정치경제학의 방법론적 개인주의 관점에서 공공은 개인들의 합이라고 해석된다. 여러 정의를 요약하면, 공공이란 간단하게 ‘(무언가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타인들과의 끊임없는 관계를 통해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인간은 혼자서도 살 수 있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혼자 자급자족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집단, 공동체, 사회를 이루고 살까?

그 이유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모여 사는 것이 홀로 사는 것보다 개인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각자에게 주어진 재능과 운이 달라서 여러 사람들과 서로 교환하는 게 유리할 때가 많다. 혼자는 해결하기 힘든 일을 여럿이 힘을 모아 해결해야 할 때가 종종 있다. 어떤 재화나 서비스를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때가 있다.

결국 공공이라는 말의 근본적인 뜻에는 특별히 좋고 나쁨 혹은 옳고 그름이라는 가치판단이 개입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공공은 본래의 뜻과는 매우 다르게 해석되고 사용된다. 우선, 공공은 ‘좋은 것’으로 생각한다. 공공재, 공공사업, 공기업, 공공부조, 공공임대아파트 등 공공이라는 이름은 다 좋은 것처럼 여겨진다. 나아가 공공은 ‘옳은 것’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문득 이탈리아 파시즘의 “무솔리니는 항상 옳다”가 연상된다. 그래서 공공의 목적과 이익을 위해서는 개인의 목적과 이익은 언제든 희생될 수 있고, 공공 안녕과 질서 유지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로운 행동은 서슴없이 제한되기도 한다.

그럼 공공의 대응관계에 있는 말은 무엇일까? 그것은 개인이고, 개인이 소유하거나 사적인(private) 것이다. 공공이 좋은 것이기 때문에 공공의 이익(공익)은 개인의 이익(사익)보다 우선시된다. 공익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사익추구는 나쁜 것이다. 공공이 옳은 것이기 때문에 사적인 것은 그른 것이 된다. 그 결과 공공의 일과 개인의 일이 부딪치는 경우 사적인 일은 포기되어야 한다.

우리 일상을 보면 이 같은 주장이 결코 과장되거나 억지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어느 사회든 개인의 이해관계와 공공의 이해관계는 자주 충돌한다. 그런데 “우리”라는 문화가 유난히 강한 한국은 개인보다 공공이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고 필자가 공공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을 덜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공공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좀 더 배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공공은 늘 좋고 옳은 것이기 때문에 정부를 비롯한 공공부문이 하는 일에 대해 평가하고 비판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공공을 위해 일을 하는데 무슨 효율성이니 효과성이니 하는 잣대를 대기 불편하게 느낀다. 그래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평가를 하더라도 형식적인 수준에 머물게 된다.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정부가 하는 일에 책임을 묻기 어렵다. 나아가 정치인과 관료는 업무와 정책의 성과를 공공이라는 이름으로 책임을 떠넘기려는 유혹에 빠진다.

코로나19가 한창 창궐하면서 감염 유행이 좀처럼 잡히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 이에 대해 정부 당국은 그 이유를 방역책임이 아니라 정책에 제대로 따라 주지 않은 시민들(공공)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했다. 게다가 감염방지를 위한 공공의 알권리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사생활권은 쉽게 침해되었다. 잘 되면 정부 덕이고 안 되면 공공 탓이다.

제 아무리 대단한 학자들이 난해한 말로 어렵게 정의하더라도 본질적으로 공공은 개인들의 모음이다. 따라서 개인이 없는 공공은 없다. 개인의 이해관계를 배제한 공익이란 신기루에 지나지 않다. 개인이 행복하지 않은 공공의 복지란 있을 수 없다. 공공은 신성한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개인과 공공 사이에 균형을 잃고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김성준 경북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