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칼럼] 자유주의 시각의 페미니즘

황수연 전 경성대 교수
입력일 2022-05-16 09:00 수정일 2023-04-17 13:01 발행일 2022-05-15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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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연 전 경성대 교수

지난 대선 후보 토론에서 이재명 후보는 윤석열 후보에게 “후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뭐냐?”고 물었다. 이에 윤 후보는 “저는 페미니즘이라는 것은 휴머니즘의 하나라고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이 후보는 답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고, 심상정 후보도 윤 후보가 “페미니즘이 휴머니즘의 일부라는 놀라운 말씀을 했다”고 동조했다. 이어서 이 후보는 윤 후보에게 구조적 성차별이 거의 사라졌다는 윤 후보의 언론 인터뷰와 관련하여 “여전히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이어갔다. 토론을 시청하면서 필자는 ‘윤 후보는 자유주의 시각의 페미니즘을 이해하고 있지만, 다른 후보들은 전도(轉倒)된 페미니즘을 옳은 페미니즘으로 받아들이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휴머니즘은 복합적인 개념으로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넓은 개념 안에는 개인의 존엄을 긍정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한다는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페미니즘은 여성이라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는 사회 운동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이 휴머니즘의 하나라는 점은 당연하고 옳은 이야기다. 그리고 페미니즘이 대상으로 삼는 문제는 여성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는 문제이지, 여성 집단에 이익을 제공하는 문제가 아니다. 페미니즘을 여성 집단의 문제로 보고 접근하면 개인으로서 여성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과 무관한 중대한 문제가 야기된다. 특히 구조적 성차별의 문제가 해소된 상황에서 그렇다.

종종 최초의 영국 페미니스트라 불리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는 자유는 성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페미니즘이 휴머니즘의 일부로 여겨지는 대목이다.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성에 따른 차별을 반대하는 운동이 있었고, 특히 19세기 후기와 20세기 초기 페미니즘은 생명력을 가진 사회 운동이 되었다. 이때의 페미니즘은 성에 따른 차별 없이 남녀 똑같이 개인으로서 자유와 권리를 획득하게 하려는 사회 운동이었다. 이렇게 미국에서 첫 번째 물결의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의 일부였다.

미국에서 여자들은 1920년까지 투표할 헌법적 권리를 얻지 못했고 남자들과 동등한 재산 소유권을 갖지 못했다. 그 당시까지 법은 성과 같은 비개인적 특성들에 근거하여 한 집단, 남성들에게 특권을 부여했다. 법에 따른 제도적, 구조적 성차별이 있었다. 그러한 성차별에 대한 개선책은 차별적인 법을 폐지하여 모든 사람이, 성에 따른 차별 없이, 자유와 권리를 누리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유주의 개선책이다. 그러한 첫 번째 페미니즘 물결은 투표할 권리와 같이 여자들에게 새로이 인정된 정치적 권리로 20세기 초에 정점에 도달했고, 계약을 맺을 권리와 재산을 소유할 권리가 여자들에게 부여된 것과 같이 19세기와 20세기의 민권을 강화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1960년대 중반 존슨 대통령 시대부터 페미니즘은 과거 성차별에 대한 보상을 위해 집단으로서의 여성들에게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이것은 남성들이 이용할 수 없는 특권을 여성들에게 줄 것을 주장한다는 점을 의미했다. 법으로 여성들에게 새로운 제도적 특권을 주자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남성들에 대해 제도적 차별이 행해진다.

첫 번째 물결의 페미니즘이 역사적으로 남자들에게만 부여되었던 법적 특권을 똑같이 여자들에게도 부여할 정치적 및 시민적 권리를 얻는 데 집중했다면, 페미니즘의 후속판은 법 아래서의 특권을 여자들에게만 줌으로써 소위 과거의 불의를 시정하자는 데 집중했다. 과거에는 법은 남자들에게 이용 가능한 일정 권리들을 여자들에게 거부했다. 그래서 첫 번째 물결의 페미니즘이 제도적 차별을 철폐하는 운동을 했고, 그 결과 남성이건 여성이건 모든 ‘개인’이 똑같이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전도된 페미니즘이 대두된 후에는 한 집단, 남성들에게 이용될 수 없는 일정 특권들을 다른 집단, 여성들에게 보장하려고 했다. 그 결과 새로운 제도적 차별을 만들어 내었다.

예를 들어, 전도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중역이 적으니 기업이 여성들에게 일정 비율의 중역을 할당하도록 법으로 강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성 중역이 적다는 것은 남녀 개인의 경력 결정과 생애 결정에서의 차이, 생산성의 차이, 인적 자본 생산성의 차이 등 다양한 요인이 상호 작용한 결과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이런 것들을 무시하고 인위적으로 여성 중역 비율을 높이도록 요구하는 것은, 개인으로서의 여성의 권리와는 상관없이, 여성들이라는 집단에 특권과 특혜를 주는 잘못된 결정이다.

다른 예로, 주로 여자들이 담당하는 직업들에 대한 임금이 주로 남자들이 담당하는 비교 가능하지만 다른 직업들에 대한 임금과 같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전도된 페미니스트들은 이렇게 남녀 두 집단의 결과를 비교한 후 같게 할 것을 주장하는데, 결과를 인위적으로 같게 하는 것은 여성 개인에 대한 권리 보호가 아니라, 여성들이라는 집단에 대한 특혜이고 특권이다. 이렇게 집단 결과가 다른 것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강조하듯이, 다른 행위자들의 결정들에 대응하여 분산된 경제 행위자들이 내린 수백만의 분권화된 결정의 결과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이런 점들을 무시하고 인위적으로 같게 하려고 하는 것은, 개인으로서 여성의 권리와는 상관없이, 여성들이라는 집단에 특권·특혜를 주는 제도적·구조적 성차별이다.

남성들에게만 선거권과 재산 상속권이 부여되고 여성들에게는 그런 권리들이 부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구조적 성차별이다. 그리고 그러한 구조적 성차별은 폐지되어야 한다. 다행스럽게, 오늘날 영국과 미국은 물론이고 우리나라도 그러한 구조적 성차별은 첫 번째 물결의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노력 덕분에 거의 사라졌다. 따라서, 역설적이지만, 오늘날 페미니스트들이 할 일이 있다면 여성들에 대한 특혜 · 특권을 폐지하고 여성이나 남성이나 개인으로서 똑같이 권리를 향유하게 하자고 사회 운동을 벌이는 것이다. 전도된 페미니스트들이 그런 일을 할 것 같지 않으므로, 남은 일은 자유와 권리의 침해로부터 개개 여성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페미니즘의 문제가 아니라 치안과 사법(司法)의 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가족부를 폐지하자는 주장은 타당하다. 여성의 인권이 침해된다면 인권의 침해를 막고 처벌하는 일은 해당 정부 기관에서 하면 되지, 굳이 여성가족부에서 할 일은 아니다. 여성가족부는 남성들에게 부여되지 않는 혜택을 여성들에게 부여하기 위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남성과 똑같은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게만 특별한 혜택을 주기 위해 그 부서가 존재한다면, 그러한 특혜를 주는 것이 옳지 않으므로, 여성가족부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덧붙여서, 할 필요가 없는 일을 하는 정부 부서가 적어진다는 점에서도 여성가족부의 폐지는 바람직하다.

황수연 전 경성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