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100] ‘수정의 인사’ 김서령 작가 “데이트 폭력 피해자들의 아픔을 기억해주세요”

조은별 기자
입력일 2021-12-07 18:00 수정일 2021-12-07 18:00 발행일 2021-12-08 11면
인쇄아이콘
[책갈피] 수정의 인사
김서령작가
김서령 작가가 3일 서울 마포구 가우초에서 브릿지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사진=이철준PD)
연인이 다퉜다. 화가 난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에게 장우산을 던졌다. 여자친구의 미간에 박힌 우산꼭지가 뼈를 부수고 눈 안쪽 6센티까지 파고 들었다. 여자친구는 끝내 사망했다. 이 사건의 피의자는 징역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폭력을 휘두르고 사람을 죽인 남자친구는 집에 갈 수 있지만 숨진 여자친구는 영영 집에 갈 수 없게 됐다. 
한국은 ‘데이트 폭력’에 관대한 나라다. 양기대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2016년 이후 5년간 접수된 데이트 폭력 신고는 8만1056건, 이 중 75.4%(6만1133건)가 살인, 성폭력, 폭행·상해, 체포·감금·협박 등의 강력범죄였다. 그러나 사람이 죽어도 우발적인 사고였다든가, 합의를 하면 형을 유예받는 게 대한민국이다.
2021120801010003544
수정의 인사

김서령 작가의 신간 ‘수정의 인사’(폴앤니나)는 데이트 폭력으로 허망하게 숨진 은행원 한수정씨의 이야기를 담았다. 지난해 출간된 옴니버스 단편집 ‘당신의 떡볶이로부터’에 실린 ‘어느 떡볶이 청년의 순정에 대하여’를 다듬고 발전시킨 책이다. ‘수정의 인사’를 집필한 김서령 작가는 마포구 합정동 가우초에서 진행된 본보와 인터뷰에서 “우연한 기회에 데이트 폭력의 형량문제를 다룬 한 언론 기사를 접한 뒤 충격을 받았다”며 “소설의 얼개를 다시 잡고 쓴 책이 ‘수정의 인사’”라고 설명했다.

책의 내용은 주제만큼 무섭고 무겁지 않다. 제목도 그렇지만 고양이와 함께 대청마루에 앉아 정원을 응시하는 소녀가 그려진 표지는 순정소설을 연상케 한다. 1인칭 시점으로 쓴 문체도 가볍고 발랄하다. 수정 주변 인물들과 시장 사람들의 생활을 엿보는 전반부는 마치 소설판 ‘응답하라’ 시리즈를 읽듯 흥미진진하다. 
주인공 수정은 가상의 소도시 연정의 한 은행에서 일하는 평범한 20대 청년이다. 은행 일이 바쁘면 동료들과 인근 시장 떡볶이집에서 끼니를 때우며 소박하지만 행복한 생활을 꾸려간다. 은행 고객이기도 한 떡볶이 집 사장 철규는 대놓고 수정에 대한 호감을 표시하지만 수정은 은행원으로서 업무상 미소를 지을 뿐 싫은 티는 내지 못했다. 철규는 수정이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망치로 그녀의 정수리를 가격해 숨지게 만든다.
“나는 그 때 죽었거든요”라는 수정의 고백으로 이어지는 책의 후반부는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현실의 반영이다. 말 좋아하는 시장 사람들은 “은행 아가씨가 지나치게 튕기면서 사장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어”라고 수군댄다. 언론은 그들의 이야기를 받아쓰며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한 가정을 도륙했다. 김 작가는 이같은 후반부 구성에 대해 “변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서령작가
김서령 작가가 3일 서울 마포구 가우초에서 브릿지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사진=이철준PD)
“우리나라에서는 유난히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조하곤 해요. 피해자는 사생활을 탈탈 털어 깨끗하고 순결하다는 걸 증명해야 하죠. 피해를 입어도 가해자의 보복이 두렵고 앞으로 남은 삶이 수치스러워질 수 있다는 생각에 신고를 못하기도 하죠. 명확하게 싫다는 표현을 하지 않으면 대중은 빌미를 줬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얘기하곤 해요. 이런 변하지 않는 시선들, 현실이 시스템이 대중을 만드는 게 아니라 대중이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현상이죠.”
자료를 수집하고 다듬어 세상에 내놓기까지 약 1년의 시간이 걸렸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93학번인 작가는 책을 쓰며 과거 학내 만연했던 성폭력 그리고 얼마 전까지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문단 내 성폭력 문제에 대해 “나도 방조자”라며 마음 아파했다. 그는 “선배 작가들이 그럴 때마다 정색하고 말리지 못했다”며 “문단 내 성폭력 문제는 수치스러운 사건이고 우리 모두 당당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수정의 인사’를 읽은 독자들이 뉴스에서 한줄 단신 처리되던 데이트 폭력 피해자 A씨 행간의 서사를 기억해주길 바란다”는 소망을 전했다. 
김서령작가
김서령 작가가 3일 서울 마포구 가우초에서 브릿지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사진=이철준PD)
‘수정의 인사’는 김 작가가 직접 차린 독립출판사 폴앤니나의 소설시리즈 중 여덞 번째 신간이다. 그는 2019년 11월 폴앤니나를 설립해 작가라는 ‘본캐’ 외 출판사 대표라는 ‘부캐’의 삶도 살고 있다. 김 작가의 책에 앞서 폴앤니나에서 발간된 소설 ‘옥토’는 영화 ‘부산행’ 제작사 레드피터로에 영상 판권이 팔려 드라마화를 준비 중이다. 
“본캐와 부캐, 어느 한곳에만 비중을 두기 힘들어요. 작가는 저의 본캐이고 출판은 막 재미를 붙여 달리는 중이거든요. 꼰대가 되는 게 싫어 변하는 모습을 소설에 담으려고 했는데 잘 안되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작가들을 잡아 편안한 소설을 만드는 사람이 되려고 했죠. 이렇게 많이 책을 낼 계획은 아니었는데 재미있는 책이 너무 많이 보여서 큰일이에요. 당분간 ‘본캐’와 ‘부캐’가 모두 활동할 계획입니다.”

조은별 기자 mulgae@viva100.com

사진=이철준 기자 bestnews2018@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