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그라운드]게르하르트 리히터가 컬러차트를 만났을 때…에스파트 루이비통 서울 ‘4900가지 색채’

허미선 기자
입력일 2021-03-12 18:00 수정일 2021-03-13 20:28 발행일 2021-03-12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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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스 루이비통 서울의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4900가지 색채’ 전경(사진=허미선 기자)

직접 찍은 사진의 윤곽을 흐릿하게 처리하거나 블러링함으로서 자신의 주관성을 배제하고 객관성을 추구하던 작가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전혀 다른 추상작품을 만날 수 있는 ‘4900가지 색채’(4900 Colours, 7월 18일까지 에스파스 루이비통 서울)가 12일 개막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故이건희 회장이 소장하고 있던 ‘두 개의 촛불’(Two Candles, 1982)과 대형 추상화들의 작가이자 ‘계단을 내려오는 여인’(Woman Descending the Staircas. 1965), ‘하이드씨’(Herr Heyde, 1965), ‘도시 풍경’(Townscape, 1968~1973) 연작, ‘추상화’(Abstraktes Bild, 1990), ‘강’(The River, 1995) 등으로 유명한 독일의 현대미술 작가다.

전시명이자 작품명이기도 한 ‘4900가지 색채’는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 소장 작품으로 에스파스 루이비통 도쿄, 베네치아, 뮌헨, 베이징, 서울, 오사카에 소개하는 ‘미술관 벽 너머’(Hors-les-murs) 프로그램 일환이다.

1960년대 초부터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던 리히터는 활동 당시 주류를 이루던 추상 표현주의, 팝아트,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신만의 예술적·철학적 이데올로기를 투영한 작가였다. 사진을 기반으로 다양한 시도를 한 초상화, 풍경화, 정물화, 제스처 회화, 모노크롬 추상화 등을 통해 주관성의 배제, 우연과 즉흥성, 사실주의와 추상 등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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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스 루이비통 서울의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4900가지 색채’ 전경(사진=허미선 기자)

‘4900가지 색채’ 역시 동일한 맥락의 추상작품이다. 1966년 페인트 가게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컬러차트 그 자체를 예술로 인식하면서 진행된 ‘색채’(Farben) 연작 중 하나다.  

초창기에는 컬러차트 그대로의 색과 흰색 그리드(격자형 무늬)를 그대로 캔버스로 옮겨 사용했던 ‘색채’ 시리즈는 작품 수를 늘려가면서 변화를 맞았다. 최신 버전들은 3온색, 4온색으로 리히터가 직접 색을 조합해 사용하기도 했다.

이번에 에스파스 루이비통 서울에 전시된 ‘4900가지 색채’는 흰색 그리드를 없애 저마다의 색상들이 조우하면서 만들어내는 색다른 느낌과 확장 가능성에 주목했던 리히터의 ‘색채’ 연작 중 2007년 작품이다.

리히터의 ‘색채’ 연작은 가로세로 5개씩, 25개의 컬러박스를 하나의 패널로 설정해 큐브처럼 다양한 구성으로 조합한 작품들이다.

패널을 어떻게 조립하느냐에 따라 버전이 달라지는 작품으로 총 11개 버전이 존재한다. 한개의 패널을 각각 전시한 것이 ‘버전 1’, 네개의 패널을 조합한 것이 ‘버전 2’로 이번 에스파스 루이비통 서울에 전시된 ‘4900가지 색채’는 196개의 패널을 조합한 ‘버전 9’다.

지극히 수학적이고 객관적인 동시에 우연하게 조화를 이루는 ‘색채’ 연작을 통해 리히터는 “색채 간 위계가 없는 탈 권위적인 관계를 보여주고자 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작품은 쾰른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인 ‘돔펜스터’(Domfenster)다. 2차 세계대전으로 파손된 쾰른 대성당의 남쪽 창문에 대한 디자인 의뢰를 받아 진행한 작업으로 72개색을 조합한 1만1500장의 수공예 유리조각으로 구성됐다.

이 또한 페인트 컬러차트에서 영감을 받은 ‘색채’ 연작 중 하나인 ‘4096가지 색채’를 활용한 작품으로 창문으로 햇살이 쏟아질 때면 장관을 이룬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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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스 루이비통 서울의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4900가지 색채’ 전경(사진=허미선 기자)

72가지 색의 조합이다 보니 지나치게 알록달록해져, 리히터의 표현을 빌자면 ‘색 소음’이 발생하자 첫 번째와 3번째, 4번째와 다섯 번째, 가운데 맞붙는 부분을 데칼코마니 방식으로 미러링해 일정한 규칙을 부여하기도 했다.

‘색채’ 연작의 초기작품들의 특징이 유화의 붓질이라면 최근작들은 직접 고안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활용해 랜덤하게 색을 배열하고 에나멜 스프레이로 채색하는 방식으로 작업한 것으로 알려진다.

어떤 색도 너무 차갑거나 뜨겁지 않게 혹은 열등하거나 뛰어나지 않게 표현하면서 주관성의 배제, 중립성과 객관성의 확보, 우연성 등으로 점철되는 ‘색채’ 연작은 “주관성이 전혀 개입되지 않게, 관객들이 어떤 메시지도 읽을 수 없게”하려던 리히터의 의도와는 달리 들여다 보면 볼수록 그의 생각이, 메시지가 궁금해지는 작품이다.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