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유고] 시민운동가에서 보궐 서울시장, 그리고 잠룡까지…격정의 정치 여정

표진수 기자
입력일 2020-07-10 08:40 수정일 2020-07-10 20:47 발행일 2020-07-10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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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시장 민주통합당 입당 모습
박원순 시장 민주통합당 입당 모습(연합)

9일 밤 유명을 달리한 박원순 서울시장은 시대를 대표하는 인권변호사이자 시민운동가였다. 이종걸 전 의원과 함께 서울대 조교 성추문 사건을 맡은 이후 40년 가까이를 국내 시민운동의 대부로 명성을 쌓았다. 이런 경력을 기반으로 차기 대선에선 유력한 후보자 중 한 명이었다. 

시민운동에 평생을 천착해 온 박원순 변호사가 탈 시민운동가로 변신한 것은 지난 2011년 치러진 10·26 시장 보궐선거가 계기가 됐다. 당시 무소속이었던 그는 인권 운동가로서의 높은 지명도에 비해 일반의 지지율은 5%에도 못미칠 정도로 정치 초년병이었다. 

하지만 이 때부터 그는 특유의 정치력을 발휘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 전격 회동 끝에 자신이 서울시장이 되어 하고 싶은 정책 포부로 안 후보를 설득해 전격적으로 단일화를 이루었다. 안 후보는 출마를 포기하고 박 후보 지지를 선언했고 이는 그대로 민주당과의 야권 단일화 경선 승리로 까지 이어졌다.

박 시장은 이어진 본 선거에서도 당시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30만표의 큰 표 차로 따돌리고 기어이 서을시장 자리에 오름으로써 향후 사상 첫 3선 서울시장의 시작을 알렸다. 안 후보와의 약속을 지켜 그는 상당 기간 동안 민주당 입당 대신 서울시장 업무에 집중하는 등 기성 정치권과 거리를 두며 자신만의 커리어를 착실히 쌓아갔다.

박 시장은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도 당시 대선 후보급 경쟁자였던 새누리당 정몽준 후보와 맞서 63만 여표 차로 재선에 성공했다. 이 때부터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의 반열에 올랐고. 이후 각종 여론조시에서 톱 5에 오르며 '잠룡'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평생을 시민운동에 헌신해 온 경력 탓에 그에게는 조직적인 당내 기반이 부족했다. 서울시정의 총 책임자로서 때로는 중앙정부와 정책적으로 맞설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중앙 정치 세력과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고, 이 점은 늘 대선 후보 박원순의 발목을 잡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마련된 19대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도전했으나 약힌 당내 기반 탓에 지지율이 좀처럼 오르지 못했다. 결국 그는 중도에 당내 경선 참여를 포기하고 불출마 선언과 함께 문재인 후보 지지를 선언함으로써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에 일조했다.

3선 서울 시장에 오른 후에는 나름 자신만의 계보를 만드는 등 다음 대선에 대한 도전 의지를 내비치는 듯 했다. 실제로 올해 4·15 총선에서 그의 측근이던 기동민, 박홍근 등 10여명의 이른바 박원순계가 원내 진입에 성공하며 여당 내 한 계파를 구성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코로나19  긴급재난지원금 논란과 부동산 대택과 관련해 중앙정부와 맞서 자신의 소신을 거침없이 개진하는 등 자신만이 목소리를 내며 큰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박 시장은 그를 따르던 많은 지지자들을 외면하고 결국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다.

표진수 기자 vyvy@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