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100] 그리스로마 신화 속 여자들의 재해석? 지금 우리 이야기!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아르테미스’

허미선 기자
입력일 2020-03-03 17:00 수정일 2020-03-03 13:41 발행일 2020-03-04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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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왼쪽부터 아르테미스 김희연, 헤라 한송희, 아프로디테 이주희(사진제공=창작집단 LAS)

그리스로마 신화 속 인물들은 현재까지 해온 이야기, 상상력, 창의력 등의 근간이었고 영감의 원천이었다. 고대 희랍극(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발달한 고대 그리스극의 대표적 형태) 역시 두고두고 변주되곤 한다.

그 그리스로마 신화 속 여자들이 다시 한번 변주되고 재해석된다. 창작집단 LAS(라스)의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3월 29일까지 콘텐츠그라운드)는 사랑과 질투의 여신이자 결혼의 수호신 헤라,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냥·숲·달·처녀성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이야기다.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 ‘헤카베’ 등 고전명작이나 고대 신화 속 인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온 이기쁨 연출과 배우이기도 한 한송희 작가의 콤비작으로 2016년 산울림고전극장으로 초연돼 해마다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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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사진제공=창작집단 LAS)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 ‘헤카베’ ‘비클래스’ ‘올모스트메인’ 등과 영화 ‘도리화가’ ‘마돈나’ ‘허삼관’ 등의 한송희, ‘손’ ‘인터뷰’ 등의 이주희, ‘대한민국 난투극’ ‘손’ 등의 김희연이 초연에 이어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로 무대에 오른다.

더불어 초연부터 제우스를 비롯한 아폴론, 헤르메스, 아도니스, 오리온 등을 연기했던 장세환·조용경, 2017년부터 합류한 이강우가 함께 한다

제우스의 소집으로 12신이 모이던 날 신전에서 만난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는 내숭 없는 속내를 풀어낸다.

아름답고 도도했던 헤라는 제우스의 끈질긴 구애로 결혼했지만 여전한 바람기를 숨기지 않고 여자들과 질펀하게 놀아나는 남편에 ‘질투의 화신’이라는 오명을 덮어썼다. 남편의 외도에 집착하느라 스스로가 가진 큰 리더십, 의지, 합리적 사고, 행동력, 권력 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무가치하게 만들어버린다.

미와 사랑의 여신으로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아프로디테는 추남 헤파이토스와 부부였지만 여러 남자를 전전하다보니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욕정의 여신으로 전락했다. 아프로디테와는 반대로 아르테미스는 처녀성에 집착한다. 오리온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서도 그 처녀성을 지키겠다고 ‘사냥의 여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 남자들을 해치고 살해까지 저지른다.

그런 이들에게도 세상의 편견과 스스로의 선택으로 비틀리고 왜곡된 속사정이 있다. 남편에 대한 불신, ‘걸레’ 취급을 해대는 세상의 힐난,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실망에 의한 상처를 털어놓는 세 여신의 대화는 서로에 대한 비난으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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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사진제공=창작집단 LAS)

하지만 이내 사랑과 욕정의 차이, 남자의 본능과 권력의 문제, 상처받았다는 이유로 저지르는 폭력의 정당성 그리고 오롯이 있는 그대로의 나와 특정한 관계 속에 위치한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방법 등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인다. 

대화에서 만져지는 일상성, 적절하게 배치된 위트와 유머, 현대 가정의 거실을 연상시키는 단출한 무대 등으로 무장하고 진짜 자신을 대면하는 여정을 따르는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편견, 부조리, 불평등 등의 뿌리를 파고든다.

마음은 없고 욕정만으로 가득한 섹스와 마음만 있는 금욕적 사랑, 질투와 집착, 인내로 점철돼 지켜지고 있는 결혼…주체와 시대를 빼버리고 나면 고스란히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지금 우리의 이야기다.

사회에서는 여전히 ‘여자’라는 이유로 많은 희생과 감내를 강요하고 편견과 차별의 잣대를 들이댄다. 여혐과 성폭력 등도 여전하다. 여자 뿐 아니다. 빈부, 권력의 유무 등에 다른 사회 부조리와 불균형, 차별과 폭력 등은 시대와 성별을 유연하게 넘나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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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사진제공=창작집단 LAS)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속 여신들 역시 표면적으로는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극적인 각성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 각자의 길로 떠나는 여신들의 마음 속에는 치열한 토론과 연대를 통해 얻은 작은 변화의 씨앗을 품었다.

그 변화의 씨앗은 여신들에게도, 무대에서 펼쳐지는 그들의 토론을 지켜보는 관객들에게도 저마다 다르다. 그 꽃의 모양새, 종류 등도 역시 저마다 다르다. 변화의 씨앗이 싹을 틔워 꽃을 피울 때까지의 속도, 방법, 마음가짐 등 역시 저마다 다르다.

결국 변화의 씨앗은 저마다의 종착역이 아닌 출발점인 셈이다. 그렇게 고전의 변주는 섣부르게 결론을 내리거나 방향을 제시하기 보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함께 이야기하고 고민하자고 ‘지금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 뿐이다.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