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해 공연계의 눈에 띄었던 현상은 ‘여자’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극들이 주목받았다는 것이다. 10명의 여자로만 꾸린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의 주인공 정영주는 제3회 한국뮤지컬어워즈(1월 14일 블루스퀘어)에서 생애 처음으로 여우주연상에 도전한다.

여자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데서 나아가 젠더프리(Gender-free, 성에 대한 제약을 배제하는) 캐스팅도 잦아지고 있다. 2017년 11월 영국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햄릿’에서는 여자배우 미셸 테리(Michelle Terry)가 햄릿을, 남자배우 서브햄 샤리프(Shubham Saraf)가 오필리어를 연기하며 이슈가 되기도 했다.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유쾌함과 눈물을 동시에…‘광화문연가’ 구원영의 월하 한국 역시 2017년 말부터 젠더프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 중 전면에 나선 작품들이 뮤지컬 ‘광화문연가’(1월 20일까지 디큐브아트센터)와 ‘더 데빌’(3월 17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이다.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깊은 밤을 날아서’ ‘소녀’ ‘가을이 오면’ ‘붉은 노을’ ‘그녀의 웃음소리뿐’ ‘옛사랑’ ‘사랑이 지나가면’ 등 故이영훈 작곡가의 히트곡들로 꾸린 주크박스 뮤지컬 ‘광화문연가’는 시간여행가이드 월하(구원영·김호영·이석준, 이하 관람배우·가나다 순)를 젠더프리 캐스팅했다.

 

2017년 말 이지나 연출, 고선웅 작가, 김성수 음악감독이 리뉴얼해 새로 선보인 지난 시즌 ‘광화문연가’부터 차지연과 정성화가 번갈아 연기한 월하는 죽음을 앞둔 작곡가 중년 명우(강필석·안재욱·이건명)를 시간여행으로 이끄는 존재다.

그대들(나하나·육현욱·이한밀)을 이끄는 구원영의 월하는 재기발랄하고 유쾌하며 개구진가 하면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기도 한다. 젠더프리 캐스팅의 난관은 태생적으로 다른 남녀의 음역대다. 하지만 구원영은 폭발적인 가창력과 쇼맨십으로 명우와 그대들은 물론 관객들마저 단박에 사로잡는다.

젠더프리에 이은 캐릭터 프리…‘더 데빌’ 차지연의 X블랙·화이트

‘더 데빌’의 차지연은 남녀 성에 상관없는 젠더프리 캐스팅을 비롯해 캐릭터까지 넘나든다.

‘더 데빌’은 괴테 ‘파우스트’의 오마주로 미국 역사상 최악의 주가 폭락 사태를 맞은 1987년 ‘블랙 먼데이’ 월스트리트를 배경으로 한다.

주식 브로커 존 파우스트(송용진·신재범·장지후·정욱진)를 두고 내기를 벌이는 X화이트(이충주·김다현·임병근·조형균·차지연)와 X블랙(차지연·김찬호·박영수·이충주·임병근), 그로 인해 스러지는 존의 아내 그레첸(이하나·이예은)의 이야기다.

2014년 초연, 블랙과 화이트로 분리된 2017년의 재연에서 남자배우들이 연기하던 X는 세 번째 시즌을 맞아 차지연을 캐스팅했다.

2017년 여름 ‘알앤디웍스 콘서트’에서 ‘더 데빌’의 넘버 ‘X’와 ‘그 이름’을 부르며 출연을 예고하기도 했다. 초연 당시 그레첸으로 분했던 그는 그간 남자배우들이 연기하던 X로 캐스팅된 데 이어 블랙과 화이트를 넘나드는 파격행보를 예고하고 있다.

12월까지 X블랙으로 다크 카리스마를 발휘했던 차지연은 25일부터 X화이트로 무대에 오른다. 유난히 감정이 끓어오르는 X블랙을 연기했던 차지연이 과연 어떤 X화이트를 보여줄지, 미국의 레나 홀처럼 ‘헤드윅’으로 분할 수 있을지, 그가 그토록 하고 싶다던 ‘스위니 토드’로 무대에 설 수 있을지…선택의 폭이 넓지 않은 여배우의 한계를 넘고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차지연의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다.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