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100] ‘지워지는 것도 사랑입니까’ 황경신X김원 "영혼시요? 사실은 요정이 썼답니다"

이희승 기자
입력일 2018-10-17 07:00 수정일 2018-10-18 09:23 발행일 2018-10-17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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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잡지 'PAPER'에서 팬들에게 '영혼시'로 불렸던 주옥같은 글과 사진 한 권의 책으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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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몇 장을 본다. 노을이 지거나, 창문에 빗방울이 달려있는 혹은 꽃망울이 터질 듯한 찰나의 순간들이다. 그 위에 쓰인 문장들은 길지 않다. 사랑의 반짝임과 이별이 남긴 스산함 혹은 연인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들이 대부분이다. 과거 잡지 ‘페이퍼’(PAPER) 독자들에게 ‘영혼시’(영혼을 위로하는 시)라 불렸던 글을 썼던 황경신 편집장과 김원 사진 작가의 결과물이 ‘지워지는 것도 사랑입니까’라는 제목의 책으로 엮였다. 월간 ‘페이퍼’는 1990년대 중·후반 인기를 끌었던 거리 잡지의 시초이자 그 시대를 살아간 젊은이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첫장은 지친 영혼을 위로하는 사진과 글이, 코너명도 없이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켰다.믿을 수 없게도 사실 이 책은 요정이 썼다. 저자 황경신은 “어떤 문장을 생각하다 사진을 안고 잠이 들면 그때 꿈속에서 요정이 나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 준다. 아침에 눈을 뜨면 사진 위에다 그 글을 쓰곤 했다”고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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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황경신. (사진제공=본인제공)

책 속 모든 사진을 찍은 김원 작가와는 한때 직장 상사(월간 ‘행복이 가득한 집’)였다가 ‘페이퍼’를 함께 창간한 동료였다. 이제는 과거 ‘나는 하나의 레몬에서 시작되었다’를 시작으로 두 번째 책 ‘지워지는 것도 사랑입니까’를 내놓은 인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아직도 두 사람의 호칭은 “이사님”과 “황 편집장”일 정도로 친근하다. 하지만 책 제목에 있어서 만큼은 첨예하게 대립했고 서로 가지고 있던 자료가 달라 벌인 해프닝 등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란 없었다.

“황경신이란 사람은 글에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요.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해야 하는 인간이라 책을 낸다고 할 때 걱정은 딱 한가지 뿐이었어요. 잡지가 1995년에 시작했어요. 올해로 23년이 됐는데 그걸 책으로 만드는 거잖아요. 어느 글귀에는 원래 실렸던 사진이 있는데 어느 건 없어서 새로 찍기도 했죠. 그런데 황 편집장은 그것까지 세세하게 다 기억해요. ‘이사님 이 시에는 파란 하늘에 갈매기가 날아가는 사진이었잖아요’라는 식이라 힘들었죠.”(김원)저자 황경신은 10권이 넘는 책을 내면서 절대 타협하지 않는 확고한 기준이 있었다. 그냥 넘어갔던 상황이 끝내 후회가 된 경험이 있기에 ‘지워지는 것도 사랑입니까’의 경우도 예외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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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인 ‘The 3rd Place’ 앞에서 김원 작가. (사진제공=본인제공)
“제목을 정할 때 이사님과 이견이 있었는데 젠더의 차이였어요. 여자인 저는 존재했으므로 지워진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남자들은 울분에 차서 듣는 질문 같다고 하더라고요. ‘나를 사랑하긴 했어?’라고 따지는 것 같다고. 편집부에서도 50 대 50으로 의견이 팽팽했는데 결국엔 손 글씨로 결정 났어요. 직접 써놓고 보니 글이 밀고 올라오는 느낌이 좋았죠.” (황경신)

캘리그라피라는 예술적 분야가 자리잡았지만 김원 작가야 말로 ‘손으로 쓴 아름답고 멋이 담긴 글씨’의 원조격이다. 그가 잡지 창간 당시 “이런 잡지 어때?”라며 종이에 쓴 ‘PAPER’라는 글씨는 지금까지도 잡지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수많은 글씨체들이 각종 기업과 SNS를 통해 공유되거나 범람하는 시대 속에서 김원의 손글씨는 계간지로 바뀐 ‘PAPER’와 그의 작품 그리고 ‘지워지는 것도 사랑입니까’에서만 존재한다.

김 작가는 현재 다산동 성곽마을에 ‘The 3rd Place’를 운영 중이다. 갤러리, 문화강좌가 열리는 북 스튜디오이자 디자인 창업 상담을 지원하는 스타트업 카페로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김 작가는 “사실 세 차례 정도 필체를 사고 싶다는 제안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뱉은 말이 아닌데 내 글씨로 남는다는 것이 우려됐다”고 말했다.

김원,황경신 사진
(사진제공=본인제공)

저자 황경신과 김원 사진으로 꾸린 이 책의 대부분은 그들이 30대였을 때 겪었던 치열함과 단호함, 말랑했던 감성, 지나간 사랑들이 녹아있다. 황 작가 역시 “지금이어서 쓸 수 있는 글이 있는 것처럼 앞으로는 과거처럼은 못 쓸 것 같다. 이 시기에는 좀 더 확고한 뭔가가 있었던 것 같다”는 말로 과거를 추억했다. 

새로 작업을 하며 한편의 시에 10장에서 15장의 사진을 후보군으로 추렸다는 김 작가는 “안 실었으면 안 실었지 마음에 안 드는 컷은 단 한 컷도 없는 책이다. 글을 쓰던, 사진을 찍던, 나무를 깍던 내 영혼이 스며든 거니까. 어떤 형태로든 지속되는 이 순간이 좋다”는 말로 책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지워지는 것도 사랑입니까’의 문장들은 촉촉하다. 단어들은 건조한데 완성된 느낌은 건조한 영혼에 레몬향 올리브유를 살짝 스프레이 한 듯 윤기난다. 지나치게 흥건할 때는 김원 작가의 사진이 양감(量感, Volume)을 조율한다.

“개인적으로 ‘비틀즈와 바흐를 과연 초월할 수 있을까’란 생각을 하면 항상 겸손해져요. 내가 누구보다 잘 쓴다는 생각이 얼마나 건방진 생각인가요. 가혹하지만 좋은 건 사라져요. 영원할 수 없죠. 하지만 사라진 그 자리를 응시하는 것, 나도 답을 모르니까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게 바로 이 책이 나온 이유 같아요.”(황경신)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