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 칼럼] 민주정의 위기

정기화(전남대 경제학부 교수)
입력일 2018-10-15 09:34 수정일 2018-10-15 09:43 발행일 2018-10-15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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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화
전남대 경제학부 교수

개인 간의 사회적 협동이 이뤄지려면 타인의 생명과 자유, 재산에 대해 존중이 필요하다. 타인의 것에 대한 존중은 어떤 사회에나 존재했던 보편적 도덕률 때문에 가능했다. 자신의 생명과 자유, 재산이 존중받으려면 타인의 것도 존중해야 한다.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권이 존중받으려면 타인의 결정권도 존중해야 하며 타인에게서 피해를 받지 않기를 원하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등 다양한 형태의 도덕적 규범이 발전했던 것이다.

개인 간의 사회적 관계가 확대되면 보편적 도덕률을 지키지 않고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려는 유인이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 협동에 필요한 최소한의 도덕률을 유지하고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개인의 생명과 자유, 재산을 지키기 위한 국가의 존재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하지만 국가의 등장은 때에 따라 개인의 삶을 위협하게 된다. 국가의 권력자가 권력유지에 필요하다면 개인의 생명과 자유, 재산을 위협하였던 것이다. 국가의 과세권을 이용하여 개인의 재산을 약탈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예전부터 개인의 삶을 빈곤하게 만든 것은 다양한 명목의 조세였던 것이다.

어찌 보면 최근까지의 역사는 개인이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신의 생명과 자유, 재산을 지키려는 처절한 투쟁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투쟁을 통해 국가권력의 분산, 과세에 대한 동의, 적법 절차를 근간으로 한 민주정이 등장한다.

그러나 민주정의 등장으로 개인의 생명과 자유, 재산이 국가 권력으로부터 위협받는 일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민주사회에서 정당들은 표를 얻기 위해 경쟁한다. 그리고 유권자는 자신에게 이익을 약속한 정당에 표를 던진다.

최소한의 도덕률이 유지되고 국가권력이 배분할 수 있는 경제적 자원이 제한되어 있으면 표를 얻기 위한 정당들의 경쟁은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경제적 자원이 커지면 정당들은 지지집단에 배분할 전리품을 챙기기 위해 과세를 통해 ‘합법적 약탈’을 행한다. 타인의 재산을 전리품으로 챙긴 유권자는 이를 부도덕하다고 여기지 않고 오히려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것으로 여긴다.

예전에는 절대적 권력자라도 그 당시 지배적이었던 종교나 도덕률의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 다수가 지지하더라도 도덕률에 어긋나는 일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민주정치의 원리인 다수결이 이제는 종교나 도덕률의 가르침을 대체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과학적 진실을 왜곡한다. 다수의 지지 여부가 도덕의 기준이 되고 다수의 믿음에 어긋난 과학적 진실은 ‘기득권의 이익’을 위한 과학으로 매도되기도 한다. 이에 따라 국가권력이 어떤 제한도 받지 않고 ‘다수의 이름’으로 개인의 생명과 자유, 재산을 위협하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다수결이 도덕률을 대체하고 과학적 진실을 왜곡하면 민주정은 위기를 맞게 된다.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고 이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사라지면서 사회분열의 위기가 초래되기 때문이다. 타인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약탈할 수 있게 되면 누구도 열심히 일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경제가 어려워지면 국가 권력을 이용한 약탈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정치는 생사를 건 권력투쟁의 장이 된다. 학계나 언론을 비롯하여 사법부조차도 정치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권력투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나아가 적대적 외부세력보다 국내의 경쟁 집단이 실질적 위협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적대적 외부세력은 용서할 수 있어도 국내의 경쟁 집단은 청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사회는 민주화와 경제적 성공을 함께 달성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민주화의 핵심인 다수결의 원리가 이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도덕적 규범이 사라져가면서 ‘다수의 횡포’가 새로운 도덕으로 여겨지고 있다. 광우병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과학적 진실은 다수의 잘못된 믿음 앞에 무력하였다. 소득주도 성장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반대의견은 ‘자본가의 이익을 위한 경제학’의 주장이라고 매도되고 있다. ‘부유세’라는 명분으로 부동산 등 재산이나 소득에 부과되는 ‘약탈적’ 수준의 조세는 ‘소득재분배’라는 명분에 몸을 감추고 있다.

사회의 도덕률이 무너지면 사회는 투쟁의 장이 된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이미 투쟁의 장에 들어섰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를 벗어나기에는 너무 늦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길게 보면 역사에는 비약이 없다. 한국 사회가 겪어야 할 일이면 제대로 겪어야 한다. 그래야 역사적 교훈을 분명히 얻을 수 있고 다시는 잘못된 길에 들어서지 않을 것이다.

정기화(전남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