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며느리가 아니어서 다행인 세상

조은별 기자
입력일 2018-04-22 15:06 수정일 2018-04-23 13:05 발행일 2018-04-23 23면
인쇄아이콘
20180307010002065_1
조은별 문화부 차장

40살, 비혼이다. 어른들은 “왜 아직도 시집을 못갔냐”고 하고 지인들은 “좋은 남자 만나보라”고 권한다. 그렇지만 40살은 좋은 남자도, 시집도 희박해져 가는 나이다. 무엇보다 스스로 결혼에 대한 확신이 없다. 기혼인 동료 여기자들의 힘겨운 투쟁을 지켜보노라면 차라리 비혼으로 사는 게 그나마 직장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엄마, 아내로 한 가정을 건사하는 것도 힘든데 며느리라는 중책을 견딜 자신이 없다.

한동안 SNS를 휩쓴 웹툰 ‘며느라기’에 이어 요즘 화제를 모으고 있는 MBC 파일럿 프로그램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는 비혼 여성 눈에 “이거 실화냐” 수준이다. 방송에서는 명절 시댁에서 부엌을 떠나지 못한 채 음식준비를 하는 며느리와 술상에 앉은 아들의 모습을 대조해서 보여준다. 만삭의 몸으로 시댁에 갔다가 “셋째는 언제 낳을 거냐”는 얘기를 듣고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손자의 지능을 위해 자연분만을 강요하는 시아버지의 모습 등이 비쳐져 공분을 샀다.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방송에서 보여준 시집은 30여년간 따로 살다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이 된 남의 집 귀한 딸에게 폭력적인 일상을 제공했다. 안타깝게도 대다수 기혼여성들은 “방송은 현실”이라고 입을 모은다. 21세기에도 사위는 여전히 ‘백년손님’, 며느리는 ‘백년일꾼’인 셈이다.방송 후 공감한다는 반응부터 일방적인 여성의 시각이라는 비판까지 다양한 갑론을박이 펼쳐진 것도 결국 현실을 객관화한 방송의 힘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예전에는 단순히 여성들의 한풀이로만 끝났던 이야기가 공론화되면서 우리 사회 비정상적인 가족 문화를 환기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는 점이다.

문득 지난 추석 연휴 당직에 걸렸다고 투덜댈 때 유난히 부러워하며 “나도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던 며느리 지인들의 반응이 떠오른다. 적어도 명절에는 비혼 여성이 가장 위너다.

조은별 문화부 차장 mulgae@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