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든콘] '게이만화'라고 하기엔 너무 맛.있.는 요리책 '어제 뭐 먹었어?'

이희승 기자
입력일 2018-02-17 17:08 수정일 2018-02-17 17:41 발행일 2018-02-17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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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보기 아까운 히든콘]일본 만화 '어제 뭐 먹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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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만화가 요시나가 후미의 ‘어제 뭐 먹었어?’의 주인공들. (사진=삼양코믹스 홈페이지 캡처)

변호사에 훤칠한 외모, 부유한 집안의 외아들인 카케이 시로는 주변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다. 운동으로 다져진 몸에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나이보다 동안으로 건강 관리에도 힘쓴다. 일본의 유명 로펌에서 탐내는 실력파지만 그의 선택은 동네 변호사. 차가워 보이는 외모와 달리 의뢰인의 사연을 들어주고 본인이 좀 손해를 보더라도 사건 해결에 도움 되는 일이라면 개인적인 시간도 할애하는 정 많은 성격이다.

일본의 만화작가 요시나가 후미의 ‘어제 뭐 먹었어?’의 첫 장면은 이런 완벽한 남자 주인공이 어제 먹은 메뉴를 줄줄 꿰면서 시작한다. 다들 뭘 먹었는지조차 기억 못하는 순간, 시로는 “유부와 파를 넣은 된장국과 현미가 3분의 1 섞인 밥, 고추냉이를 곁들인 명란젓, 달콤한 닭날개 조림, 브로콜리 삶은 반찬”이라고 대답한다. 회사동료들은 늘 칼퇴근을 하는 그가 3년 사귄 애인의 저녁밥까지 만들어주는 자상한 성격이라며 43살의 독신생활을 곧 마감할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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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출판된 1권부터 10년간 인기를 끌고 있는 ‘어제 뭐 먹었어?’. 최근 13권까지 나왔다. (사진=삼양 코믹스 홈페이지 발췌)

작품의 대부분은 그날 퇴근길에 동네 슈퍼에서 10엔이라도 싼 두부를 고르고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 기억하며 장을 본 뒤 음식을 하는 데 할애한다.

집안의 살림과 더불어 애인의 용돈까지 관리하는 꼼꼼한 성격의 시로는 겉으로는 차갑지만 대형 법률 사무소에서 일하며 죽도록 일하는 대신 적당히 벌면서 사람답게 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실속주의자다.

매일 사랑하는 사람과 오붓이 앉아 저녁을 먹고 주말에는 밀린 빨래를 하며 가끔 남은 과일로 잼을 만드는 여유를 선택한 것이다.

‘어제 뭐 먹었어?’의 반전은 시로가 헤어드레서인 남자와 동거하고 있고 게이 커플이라는 데 있다. 그의 연인인 야부키 켄지는 동네 미용실에서 일한다. 할 줄 아는 거라곤 커트뿐이다.

10년째 미용학교 동기의 밑에서 일하고 있지만 가게의 진상 손님을 매끄럽게 처리하는 필살기(?)로 살아남았다. 딱히 사람을 잘 대한다기 보다 끈기하나 만큼은 누구에도 뒤지지 않는 성격으로 미용실의 폭탄처리반을 자처하며 가늘고 긴 인생을 살아왔다.

두 사람의 차이는 시로가 가족 외에는 게이인 사실을 숨기고 있고 켄지는 스스럼 없이 성 정체성을 밝힌다는 점이다. 남들의 눈을 신경 쓰는 시로와 누구든 편하게 대하며 자신을 오픈하는 켄지는 다른 듯 닮은 성격으로 만화의 재미를 책임진다. ‘어제 뭐 먹었어?’는 일본 사회의 차별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더운 여름 한통을 다 사기엔 비싸지만 반통은 팔지 않는 슈퍼에서 수박을 계기로 친해진 동네 아줌마 카요코와 또다른 게이커플과의 묘한 신경전, 맞고 사는 남편과 우울증 걸린 주부 등 의뢰인들의 다양한 사연들을 한끼 음식 속에 녹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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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자세한 레시피(왼쪽)와 게이커플을 내세운 만화라고 하기에 이 작품은 일상의 소소함이 담겨있다. 각 에피소드들이친근하고 사랑스럽다.(사진=기자 본인 소장 캡처)

눈으로만 즐기는 음식이 아닌 당장 책을 덮고 주방으로 달려가도 무방한 평범한 음식들은 ‘어제 뭐 먹었어?’의 큰 장점이다. 일본 음식 특유의 간간한 가정식과 더불어 크리스마스니 명절에 먹는 특제 요리들은 등장인물들의 대사로 처리된다. “사과의 수분이 반죽에 옮겨져 커스터드 크림 같아요” “매콤 달콤 가지가 부들부들해” “쌀 2컵에 깐 밤은 쌀의 절반만 넣으면 되나요?” 등 지문들은 요시나가 후미의 그림체와 더불어 친숙하게 표현돼 있다.

단순히 게이들의 일상을 그린 만화라고 치부하기에 이 책의 실용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책의 제목을 입력하고 뜨는 검색결과의 대부분은 책에 나온 레시피대로 요리를 한 사진과 작가에 대한 찬양 일색이다. 쉽고 빠르며 맛도 좋은 음식들은 1인 가구와 초보 주부, 베테랑 엄마들까지 앞다투어 인증샷을 올릴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한국의 음식 만화로 한획을 그은 허영만 작가는 ‘식객’을 통해 “세상 모든 맛의 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어머니의 수와 같다”고 말했다. 요시나가 후미는 여기에 음식을 하는 ‘사람’에 집중했다. 같은 사회의 구성원이지만 은근한 차별 속에 있는 그들을 통해 모든 인간은 음식 앞에 평등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적어도 ‘어제 뭐 먹었어?’를 읽다보면 침이 고이는 경험과 금세 배고파지는 현상을 겪는다. 총 12권 중 3권 정도를 읽다 보면 하다 못해 라면이라도 끓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테니 책 옆에 귤과 간식은 필수다.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