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100] 최고 권력, 아름다움, 처녀성으로 상징되는 세 여신의 속사정,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허미선 기자
입력일 2017-07-24 07:00 수정일 2017-07-24 08:49 발행일 2017-07-24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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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사진제공=창작집단 LAS)

표면적으로는 여신들의 이야기다. 감각적이고 젊은 표현력으로 이 시대와 삶을 이야기하는 창작집단 LAS(라스)의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7월 27~8월 13일 CJ아지트 대학로)는 B.C 2000년 신화판 ‘섹스 앤 더 시티’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제목처럼 올림포스 최고 여신이자 결혼의 수호신 헤라(한송희),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이주희), 사냥과 달의 여신이자 야생동물들의 수호신 아르테미스(김희연)가 풀어놓는 내숭 없는 속내를 담고 있다. 암전이나 인물들의 퇴장 없는 극 구성, 인물당 주어진 쇼파 하나, 조명 하나로 단출하게 꾸린 무대 위에서 사랑과 세상, 강박관념, 관계 등에 대해 털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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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사진제공=창작집단 LAS)

제4회 서울연극인대상 극작상 수상작이기도 한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는 지난해 3월 초연돼 산울림 고전극장 선정작으로 앙코르공연된 바 있다.

이번 재연은 CJ문화재단의 콘텐츠, 인재 등 발굴·육성·지원 프로그램인 스테이지업(Stageup) 공간지원 부문에 선정돼 가능해졌다. 

헤라는 연극 ‘헤카베’ ‘비클래스’ ‘올모스트메인’ 등과 영화 ‘도리화가’ ‘마돈나’ ‘허삼관’ 등의 한송희가, 아프로디테는 ‘손’ ‘인터뷰’ 등의 이주희, 아르테미스는 ‘대한민국 난투극’ ‘손’ 등의 김희연이 연기한다. 

더불어 제우스·아레스·아폴론은 ‘신인류의 백분토론’ ‘보이스 오브 밀레니엄’ ‘히스토리 보이즈’ 등의 이강우, 헤르메스·헤파이토스·악타이온·아도니스·오리온은 ‘소년B’ ‘미래의 여름’ 등의 장세환이 캐스팅됐다. 창작집단 LAS의 대표이기도 한 이기쁨 연출작으로 헤라 역 배우 한송희의 작가 데뷔작이기도 하다.

제우스(이강우)의 부름으로 올림포스 12신이 소집되는 날, 세 여신이 주고받는 대화는 고대 신화를 왜 ‘인간 삶의 전형’이라고 하는지를 실감케 한다. 극 속에서 주고 받는 대화나 풀어내는 생각들은 신화 속 신들의 세계 뿐 아니라 2017년 이 시대 여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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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사진제공=창작집단 LAS)

아름답고 도도했던 헤라는 바람기 충만한 남편 제우스의 여자들을 괴롭히며 질투의 화신으로 전락했다. 자신의 능력과 권력은 멀찍이 밀어둔 채 남편의 질펀한 바람史를 쫓는 데만 집착한다. 아프로디테는 미와 사랑의 여신이라는 허울 좋은 표피를 가지고 있지만 마음 따위는 안중에 두지 않고 매일밤 남자를 바꿔가며 색을 탐하는 욕정의 여신이 돼 버렸다. 

아르테미스는 아프로디테와는 반대로 처녀성에 집착하는 인물이다. 자신의 처녀성을 지키기 위해 사냥의 여신답게 화려한 무기술로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 역시 오리온(장세환)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서도 터져 나오려는 욕망을 눌러 담느라 애를 먹고 있다. 

어떻게든 결혼생활은 지킬 거라 믿었던 남편 제우스의 “너 같으면 믿겠냐”는 힐난에, 욕정에 눈먼 ‘걸레’ 취급을 해대는 이들에, 사랑하는 이에 대한 실망으로 헤라·아프로디테·아르테미스는 결국 상처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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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사진제공=창작집단 LAS)

그 과정에서 현대까지도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페미니즘, 여혐을 비롯해 몰카, 데이트폭력, 안전이별, 외도, 의식하지 못하는 여성을 향한 성폭력 등이 고스란히 정체를 드러낸다. 마음은 없고 욕정만 있는 섹스와 마음만 있는 금욕적 사랑, 질투와 집착, 인내로 점철돼 지켜나가는 결혼…예나 지금이나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다. 

“네가 지금 나보다 더 큰 권력을 쥐고 있는 건 네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냥 남자이기 때문이라고!”라는 아르테미스의 일갈, “나쁜 새끼”라는 아프로디테의 절규, 헤라의 집착은 타인 뿐 아니라 자신의 의지, 능력, 합리적 사고, 행동력 등까지 옭아매고 무가치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렇게 기원전 신화 속 여신들의 삶이지만 지금 이 시대의 여자들도 피해갈 수 없는 이야기다. 사회 뿐 아니라 스스로도 여전히 ‘여자’라는 이유로 많은 것들을 요구하고 감내한다. 상상력을 보태 신화 속 여신들에 빗댔지만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는 분명 현재 사람들의 이야기다.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이야기는 여신들의 일상적 대화, 시트콤처럼 풀어가는 이야기에 보다 쉽게 내 이야기로 다가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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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사진제공=창작집단 LAS)

여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서로의 이야기에 성심성의껏 귀 기울이고 비판하는가 하면 조언하고 위안하며 서로의 진짜 모습을 대면하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함으로서 관계는 형성되고 그 안에서 아름답게 존재하는 법을 고민하게 된다. 

이는 비단 여성 뿐 아니다. 여전히 여성이 속한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는 조언하고 위안하며 나를 돌아보게 한다. 극은 세 여신을 자신을 돌아보는 출발점에 세울 뿐 그 어떤 변화도, 각성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게 극은 섣부르게 결론을 내거나 방향을 제시하기 보다 그 출발점에서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고 이야기하자 손을 내민다.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