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100] 현재 우리가 가진 모순들의 씨앗이 싹튼 ‘1945’, 그 시절 사람들의 구체적 일상! 배삼식 작가

허미선 기자
입력일 2017-07-05 07:00 수정일 2017-07-05 08:02 발행일 2017-07-05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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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삼식 희곡작가 인터뷰
‘먼 데서 오는 여자’ 이후 3년만의 신작 ‘1945’를 무대에 올리는 배삼식 작가.희곡작가 배삼식.(사진=양윤모 기자 yym@viva100.com)

“전세계적으로도, 한국에서도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던,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순들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한 기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2015년 ‘먼 데서 오는 여자’ 이후 3년 만에 내놓은 신작 ‘1945’(7월 5~30일 명동예술극장) 그리고 이 연극이 담고 있는 시대에 대해 배삼식 작가는 ‘모순의 씨앗’이라고 표현했다.

◇정체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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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1945’.(사진제공=국립극단)
“그 시절 삶에 대해 떠올리다 보면 구체적인 삶의 모습은 기억나질 않아요. 친일이냐 반일이냐, 민족이냐 반민족이냐, 저항과 투쟁이냐 협력과 부역이냐 등 관념적인 틀 속에서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재생산되죠. 과연 그런가 싶었어요.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어쩌면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어느 정도 민족과 국가라는 바깥으로 밀려나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해요.”

이는 자연스레 국립극단의 2017년 시즌의 모토인 ‘한국인의 정체성’ 그리고 ‘기억과 욕망’이라는 주제로 이어진다.

“정체성, 그런 것이 존재하는가 그것이 꼭 있어야하는가 의문이 들었어요. 오염되지 않은 결정체로서의 정체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가…거꾸로 그 정체성이라는 논제에 대한 반성적 성찰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정체성이 만들어진다는 건 그 ‘정체’에 속하지 않는, 이를 테면 잡스러운 것들, 불순한 것들을 밀어내고 배제하는 과정이잖아요.”

그래서 떠올린 공간과 시간이 해방 직후의 만주 장춘 전재민(戰災民) 구제소였다. 연극 ‘1945’는 그곳에서 귀향을 위해 기차를 기다리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갑작스러운 독립과 패전, 그들은 귀향을 위한 또 다른 전쟁과 혼란으로 빠져든다.

왜 장춘이고 전재민 구제소이며 그 시절인가에 대해 그는 “만주로 독립운동을 하러 떠났던 분들도 계시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서, 신천지 혹은 막토라 선전되는 새로운 삶의 근거를 찾아서 떠났던 사람들”이라며 “여기(한국)서는 식민지배를 받는 사람들이지만 만주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의 한 부류인 2등 국민으로, 사이에 낀 존재로 각자의 구체적인 의지와 욕망을 지니고 살아갔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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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데서 오는 여자’ 이후 3년만의 신작 ‘1945’를 무대에 올리는 배삼식 작가.희곡작가 배삼식.(사진=양윤모 기자 yym@viva100.com)

“그랬던 곳에서 1945년 해방 이후 귀국하기 위해 구제소로 모여들어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상황이 몹시 극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그리고 싶었던 모습을 정말로 압축해서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고 시간이었죠.”

채만식, 염상섭, 김만선, 허준 등 그 시대를 살았던 선배 작가들의 ‘소년은 자란다’ ‘한글강습회’ ‘압록강’ 등의 작품들에서 가본 적 없는 곳의 상황과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연극 ‘1945’는 “그 시대를 살았던 선배 작가들의 작업들에 빚을 지고 있다.”

“막상 쓰려고 보니 그 시절에 대해 제가 아는 게 별로 없더라고요. 살았던 것도 아니고 기록도 별로 없고…소설, 당시 신문기사, 에세이 등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하면서야 그 공간, 그 사람들에 대해서 떠올려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시대의 구체적인 삶의 양상이라는 건 어떤 걸까 고민했죠.”

◇저마다의 현실 속에서 머뭇거리던 ‘1945’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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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데서 오는 여자’ 이후 3년만의 신작 ‘1945’를 무대에 올리는 배삼식 작가.희곡작가 배삼식.(사진=양윤모 기자 yym@viva100.com)
“희곡이 저한테 가장 매력적인 이유는 저의 목소리 또한 수많은 목소리 중 하나로서, 전체가 아닌 부분으로서 객관화시켜서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다는 거예요. 극작가는 배우와 똑같은 마음이죠. 최대한 제 목소리가 아니라 ‘내가 이 사람이라면 뭘 원하고 어떤 선택을 하고 행위를 할까’ ‘그 행위나 선택이 이 사람을 위한 최선인가’라는 생각들을 하게 되거든요. 그렇게 그 사람들의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게 극작가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들을 내 말을 하게 하는 스피커로 활용하는 순간, 탈이 나거나 극이 재미없어지는 것 같아요.”

배삼식 작가는 “최대한 그 인물들에 대해 쉽게 판단하는 일을 멈추고 일종의 일류학자처럼 그 상황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담아내고자 했는데 얼마나 됐을지 모르겠다”며 “제 각각의 삶을 움직이는 건 옳고 그름이 아니라 누구나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욕(慾)이고 망(望)이다. 그 욕망은 옳고 그르고를 쉽게 판단하고 말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라고 털어놓았다.

“그 상황에서 인상적이고 감동받았던 부분은 그들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섣부른 가치판단 안에서 몹시 망설이고 머뭇거리고 있다는 거였어요. 그 사람들은 구체적인 현실로 겪고 있었기 때문이죠. 지식인으로서의 가치판단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현실)으로부터 자신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친일·반일 등의 문제나 그 판단이라는 게 쉽지 않았을 거예요. 판단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태도가 인상적이었고 제 기준에서는 온당한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 머뭇거리는 순간들은 15명의 인물들에 투영돼 다양하고 다층적으로 극에 스며들었다. 위안소를 탈출한 이명숙(김정민)과 미즈코(이애린), 선술집에서 첫눈에 반해 그날 밤으로 부부의 연을 맺은 장수봉(박윤희)·박선녀(김정은), 자식들을 일본 소학교에 보낸 구원창(백익남)·김순남(성여진) 부부, 그들의 자식인 숙이(주인영)와 철이(유승락), 독립운동가 형을 원망하는 오영호(홍아론)…. 등장인물 15명 중 어느 한 사람도 누군가를 위해 파생되기 보다는 그 다양한 머뭇거림의 주체로서 존재하고 있다.

◇구체적 삶에 대한 이해 없는 ‘즉각적’ 판단의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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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1945’.(사진제공=국립극단)

“모든 도덕적·윤리적 판단이 불가능하니 전면중지하자는 얘기를 하자는 건 아니에요. 문제는 구체적인 삶에 대한 이해 없이 주어진 틀 안에서 ‘즉각적’으로 이뤄지는 판단이에요. 사실 어떤 판단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때로는 불완전하기도 해요. 스스로가 어떤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 도덕적 판단이라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죠. 사람이 가장 폭력적이 될 때가 자신이 옳음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순간이죠. 비인간적인 폭력과 학살이 올바름의 이름으로 즉각적인 판단에 의해서 벌여졌거든요.”

배 작가는 SNS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판단을 예로 들었다. 그는 “전혀 구체적이질 않다. 말 몇 마디를 가지고 한 사람을 거의 인간이 아닌 것으로 치부하곤 한다”며 “언어로 행해지는 폭력이 지금은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지만 무서운 것”이라고 말했다.

“예전 파시즘, 대량학살의 시대도 처음엔 언어의 폭력으로부터 시작됐어요. 같은 인간인데 인간이 아닌 것으로 나누는 언어의 구사로부터 사실 시작됐죠. 번호나 프랑스놈들, 독일놈들 등 언어를 통해 ‘박멸돼야할 존재’로 부르기 시작하는 순간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폭력, 심지어 생명을 뺏는 폭력까지 치닫는 건 순식간이죠.”

이는 전재민들 사이에서 일종의 신문이 벌어지는 극의 마지막 순간으로 표현된다. 끝없이 이유를 요구하고 옳고 그름의 문제를 얘기하고 민족을 운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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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데서 오는 여자’ 이후 3년만의 신작 ‘1945’를 무대에 올리는 배삼식 작가.희곡작가 배삼식.(사진=양윤모 기자 yym@viva100.com)

“아프리카 마라강가에서 풀을 뜯다 새로운 생존지를 찾아 초원을 가로지르는 루떼들. 이 작품의 이미지는 그래요. 악어떼가 드글드글한 마라강을 건너가야 하는 루떼들의 상황이요. 그런 그들에게 옳고 그름, 민족 등의 구분이라는 건 무의미하죠.”

그런 의미에서 지난해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대한민국이 겪었던 각종 부조리와 혼란 그리고 새롭게 시작된 지금의 상황은 그 시기의 것과 많이도 닮아 있다.

“이 작품이 과거 얘기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보이는 위험한 경험들을 떠오르게 해요. 그 동안 불의가 너무 많았고 정의, 올바름에 목말라 있었음을 감안하더라도 옳고 그름의 판단이 놓치는 부분이 분명 있거든요. 그 판단의 준거로는 담기지 않는 삶에 대한 이해 없이 구분 짓고 판단하는 상황이 갈수록 위험할 정도죠. 매우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그 판단에서 스스로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인지하면서,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고통을 수반한 채 판단들이 내려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3월의 눈’ ‘먼 데서 온 여자’의 연장선상에 선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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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1945’.(사진=국립극단)
“어떤 한 방향에 갇히는 걸 피해왔는데 어쩔 수 없는 흐름이 생기는 것 같아요. ‘3월의 눈’을 쓰면서 현재를 만들어놓은 기원으로서 가까운 과거에 대해 우리가 만들어둔 이야기의 구체적 형상이라는 것이 너무 빈약하구나 싶었죠. ‘먼 데서 오는 여자’ ‘1945’를 쓰면서도 그랬어요. 우리의 회고취미나 골동품이 아니라 현재를 바라보는 창이 돼주기도 하는 것이니 그걸 구체적으로 무대에 형상화하는 일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렇게 ‘1945’는 2011년 장민호·백성희·손진책 연출과 함께 했던 ‘3월의 눈’, 故김동현 연출의 ‘먼 데서 오는 여자’의 연장선상에 선 작품이다.

“정말 복이 많아서 장민호, 백성희 선생을 만나 ‘3월의 눈’을 쓰게 됐어요. 2011년 3월의 이야기지만 인물들이 담고 있는 시간은 1950년대에 청년이었던 한 세대가 살고 저물어가는 풍경이었죠. 그 안에서 제 나름대로는 1970, 80년대, IMF 세대의 삶까지 3대의 이야기를 담았어요.”

그리고 같은 마음으로 2015년, 1950년대 태어나 도시로 흘러 들어 산업화를 일구고 중동으로 떠났던 세대의 이야기 ‘먼 데서 오는 여자’를 무대에 올렸다.

“이번 ‘1945’를 작업하면서 저의 가장 소박한 목적은 제가 직접 과거세대로부터 전해듣지 못했던 삶의 순간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재구성하고 형상화하는 일이었어요. 실제로 저희 집안에서도 작은 할아버지가 만주를 다녀오셨다고 들었는데 생전에는 별로 말씀을 안해주셨거든요. 당연히 모자라겠죠. 하지만 그 시절의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지금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었어요.”

◇무거운 시대? 그들에겐 매일 같은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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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데서 오는 여자’ 이후 3년만의 신작 ‘1945’를 무대에 올리는 배삼식 작가.희곡작가 배삼식.(사진=양윤모 기자 yym@viva100.com)

“체홉이 그랬잖아요. 삶의 모든 순간에는 진지함과 우스꽝스러움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무거운 시대의 무거운 사연을 가진 인물들을 다루는 ‘1945’에 대해 배삼식 작가는 안톤 체홉의 말을 인용했다.

“무거운 시대라고는 하지만 정작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한테는 그냥 일상이었을 거예요. 저녁에 뭘 먹을지를 얘기하고 좋아하는 여자가 있으면 어떻게 마음을 전할까 고민하고 사업을 구상하고 조선으로 돌아갈까 말까 하고….”

그리곤 “민족이냐 반민족이냐를 논하고 암흑의 시대, 격동의 시대라는 인식으로 고통을 토로하기 보다는 오늘의 하루와 같은 날이 먼저였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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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1945’(사진제공=국립극단)

“인간은 (마냥 울부짖고 슬픔에만 빠져) 그렇게는 못살아요. 아마 중동 난민촌 천막에서도 깔깔거리고 웃는 사람들이 있고 농담도 할 거예요. 고통과 슬픔이 찾아오면 인간은, 물론 어떤 순간에는 엉엉 울고 완전 고통과 슬픔에 젖어버리겠죠. 하지만 대부분 순간들은 고통과 슬픔에 맞서 싸워요. 헛웃음이든 온갖 헛짓거리를 해서라도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죠. 그게 진짜 사람의 모습에 가깝죠.”

이렇게 강조한 배 작가는 “주저앉아 울부짖는 게 계속되면 신파로 흐른다”며 “정치, 사회, 경제 등에 대한 수치화, 의미, 해석 등은 해봐야 구체적인 인물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떤 길을 걸었고 어떤 밥상이었고…남아 있는 그들 삶의 형상화는 없다”고 다시 한번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생각했어요. 기존에 알려진 틀을 통해 이미지를 반복하는 것보다 구체적인 삶에 대한 기억을 형상화한다는 일이 이렇게 중요한 거구나…지금을 위해서도 후대에 올 사람들을 위해서도.”

◇故김동현 연출을 그리는 일종의 추모공연처럼! 신작 ‘오후만 있던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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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데서 오는 여자’ 이후 3년만의 신작 ‘1945’를 무대에 올리는 배삼식 작가.희곡작가 배삼식.(사진=양윤모 기자 yym@viva100.com)

“(김)동현 형이 좋아하던 들국화의 노래 제목이에요. 최성원이 부른.”

배삼식 작가는 올 12월 ‘맨 끝줄 소년’ ‘먼 데서 오는 여자’ ‘하얀앵두’ 등의 故김동현 연출이 몸담았던 극단 코끼리만보와 신작 ‘오후만 있던 일요일’(가제)을 무대에 올린다.

“함께 작업했던 김도현 연출에 대한 일종의 추모공연처럼, 물론 그 사람의 삶에 대한 사실적인 것들로만 이뤄지진 않을 거예요. 하나의 모티프는 되겠지만 김동현 연출에 대한 평전같은 건 아니에요. 동현 형이 원할 것 같지도 않고…동현 형이 극단식구들과 함께 했던 작업들이 한 덩어리로 가고 제가 쓰는 작품이 공연될 것 같아요.”

배 작가는 ‘오후만 있던 일요일’에 대해 “이 세계에 늦게 당도하는 존재들, ‘1945’ ‘먼데서 오는 여자’랑은 좀 다른, 조금은 내밀한 한 개인에 대한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그리곤 웃으면서 던진 말이 그가 인용했던 체홉의 말처럼 혹은 그가 말했던 ‘대부분 순간들은 고통과 슬픔에 맞서 싸우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청승을 떨겠죠. 뭐.”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