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더컬처] "최고령이란 표현좀 그만, 난 그저 여든 여섯일 뿐이야"

이희승 기자
입력일 2024-02-17 16:02 수정일 2024-02-17 18:15 발행일 2024-02-17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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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삶 조명한 영화 '소풍', 손익분기점 25만 명 목전
김영옥 "다음생엔 스타로 태어나 빌딩살것"너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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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자리에 등장한 김영옥은 “내가 잘 못 들을수 있으니 크게 말씀해주셔야 해요”라며 손자뻘 기자들에게 존대말로 웃으며 부탁하는 모습이었다.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이 영화로 하고 싶은 말은, 절대 ‘소풍’처럼 인생을 끝내면 안된다는거야.”

귀는 잘 안 들린다고 했지만 성우 출신의 카랑카랑한 발음과 청량한 목소리 만큼은 여전했다. 지난 7일 명절 극장가에 첫 선을 보이며 어느덧 누적관객 21만명을 돌파한 ‘소풍’은 절친이자 사돈 지간인 두 친구가 60년 만에 함께 고향 남해로 여행을 떠나며 마주하게 되는 삶의 이야기를 다룬다. 실제 60년 지기인 절친 나문희가 고향을 떠난 은심 역할을, 김영옥은 늘 그곳을 지키고 있는 금순으로 나온다.

딸의 상견례 자리에도 농사짓다 만 차림으로 올 정도로 털털하지만 몇 년 만에 은심의 집에 곱게 한복을 입고 찾아온다. 마침 하나뿐인 사위이자 은심의 아들이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돈타령을 하고 있다는걸 알게되면서 두 사람은 즉흥적으로 여행을 떠난다. 누구나 겪게될 노년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소풍’은 자식걱정에 진심인 부모의 일상을 비추면서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이 영화를 찍고나서 욕실에서 넘어져 꼼짝도 못했던 경험을 겪었지요. 사실 그동안 감기 정도만 걸렸지 몸이 안 움직여져 현장에 못 간건 이번이 처음이었지. 그때서야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소풍’을 찍기 전에 이런 경험을 했으면 은심 역할을 더 실감나게 하지 않았을까.”

아픔마저 연기걱정인 대배우의 진심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극중 은심은 점차 굳어가는 몸과 쇠약해진 허리로 인해 배변장애까지 겪는다. 자식에게 짐이 되기 싫은 마음에 증상을 밝히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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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다잉과 존엄사의 문제를 다룬 영화 ‘소풍’의 공식 포스터.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자식과 남편이 있더라도 스스로 건사하지 못했을때 닥치는 불행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예요. 모두가 노인이 되는 인생아닌가요? 젊은 세대들이 이 영화를 보고 뭔가 느낄 수 있다면 좋겠어요. 아무리 퍼줘도 모자를 부모의 마음은 이렇다는걸 알아야지 암.”

김영옥은 현존하는 최고령 여배우이자 여전한 현역배우로 ‘오스카 위너’윤여정의 롤모델로 꼽히기도 했다. 그의 타고난 발음과 정감어린 말투는 관찰예능의 나레이션 적임자로 여전히 숱한 러브콜을 한 몸에 받고있다. 스스로 “주인공을 맡은 편수는 얼마되지 않는다. 대신 꾸준히 활동할 수 있었던건 주변사람들이 모두 도와준 덕분”이라고 겸손해했지만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등이 꼿꼿했다. 반나절 넘게 진행된 홍보 인터뷰에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고 풍성한 머리칼과 건치인 미소를 보면 볼 수록 김영옥이 평소 얼마나 건강관리를 해 왔는지 가늠되는 대목이었다.

“100세 시대라고하지만 이 나이에 안 아프다면 아마 거짓말일겁니다. ‘소풍’을 통해서 내 건강을 더 챙겨야 한다는 다짐을 다시한번 했다니까요. 솔직히 나는 존엄사에 대해 어느정도 찬성하는 입장이예요. 연명치료도 하지 말라고 평소에도 말을 많이 하고 다녀요. 젊었을 때부터 자식과 동료들에게도 유언같은걸 자주 남겼는데 얼마전 만난 박원숙이 ‘유언을 수도 없이 하시더니 X칠 할 때까지 사신다’고 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

영화 소풍
함께 출연한 나문희와 박근형은 젊은 시절 자신을 언니, 형수로 불렀을 정도로 친했던 사이다. “힘들다는 생각보다 즐겁다는생각으로 촬영장에 갔다”며 로케이션 촬영 당시를 회상했다.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소풍’이 가진 묵직한 주제는 입소문으로 인해 손익분기점으로 알려진 25만 명이 코앞이다. 이는 한국 독립·예술영화계가 5년만에 거둔 소중한 기록으로 한국 독립·예술극영화가 20만 명 관객을 넘은 것은 2019년 ‘항거: 유관순 이야기’ 이후 ‘소풍’이 유일하다. 단순히 재산갈등을 겪는 부모와 자식이 아닌 고령화 사회로 가는 길목에서 한번 쯤 봤거나 겪었을 설움과 결단이 녹아있는것. 극중 두 사람의 마지막 선택에 대해 영화 개봉직후 “한국판 델마와 루이스”,“허를 찌르는 엔딩이란 이런 것”등 다양한 반응이 올라왔다.

“나는 무엇보다 임영웅의 ‘모래 알갱이’가 삽입된게 너무 기쁘다. 날 보다 참여해 준걸로 알았더니 감독님이 편지를 보냈다더라”면서 “내 연기를 보고 운 적이 거의 없는데 이번엔 눈물이 나왔다”고 고백했다.

“너무 잔소리 같아도 젊은 세대들에게 꼭 해주고픈 말이 있어요. 이왕태어난 김에 결혼도 해 보고 자식도 키워보라고 하고 싶어. 그게 고생같아도 지금보니 행복이더라고. 살다가 이혼한 사람도 큰 결정을 한거지만 그걸 참고 산 사람도 참 대단하다고 칭찬해주고 싶네요.다음에 내가 또 주인공을 맡을지는 몰라도 항상 마지막이란 생각을 하고 연기하니 후회는 없어요. 나는 지금의 내 자리가 참 좋아. 스타가 되어 빌딩도 사고 돈 많이 버는것도 좋지만 쉬지 않고 일했으니 그거면 됐지.”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