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 굿바이! 청룡의 여신… 다시 보는 김혜수 숨은 명작4 사회문제와 역사적 아픔 다룬 작품에 기꺼이 참여한 필모그라피 눈길 영화 '굿바이 싱글','열한번째 엄마','YMCA야구단', 드라마 '곰탕'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다. 사실상 지금의 청룡영화상을 이끈 배우 김혜수가 30년 만에 마이크를 내려놨다. 지난 24일 서울 여의도 KBS홀에서 열린 제44회 청룡영화상을 끝으로 “우리 영화가 얼마나 독자적이고 소중한지, 진정한 영화인의 연대를 알게 했다”는 그의 말처럼 김혜수의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그러했다.
스물 셋의 나이에 첫 사회를 맡았던 1993년 이후 “매년 연말 생방송을 앞두고 가졌던 긴장감을 내려놓고 시상식 없는 연말을 맞이할 저 김혜수도 따뜻하게 맞아달라”는 말은 그가 독보적으로 걸어온 배우로서의 삶 그리고 성실함 속에서 꽃 핀 여러 도전을 인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동안 배우로서 청룡영화상 진행을 맡으며 최다 여우주연상 수상 등 여러 기록을 남긴 김혜수는 매해 파격적인 드레스와 패션으로 늘 화제 중심에 섰다.
이제는 세계의 중심에 선 한국영화와 ‘K콘텐츠의 힘’으로 불리는 남다른 저력이 있기까지 그가 한 영화제를 통해 보인 희생과 프로다운 모습은 영원히 기억속에 박제될 터. 지금 소개하는 4편의 작품들은 그의 다양한 필모그래피에서 유독 빛나는 명작들이다.
웨이브, 왓챠, 티빙 등 국내 OTT에서 볼 수 있는 ‘굿바이 싱글’은 데뷔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직업인 ‘배우’를 맡아 열연해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 당시 시사회 직후 “데뷔 이후 이렇게 망가지긴 처음”이라고 했던 말처럼 극 중 톱스타 주연은 점차 내려가는 인기와 연하 남친의 바람에 충격을 받고 영원한 내 편 만들기에 돌입한다.
독거스타의 임신 발표에 연예계는 술렁이지만 대중들은 소탈한 모습에 환호한다. 하지만 임신인 줄 알았던 생리의 끊김이 조기폐경인 걸 알게 된 주연은 소꿉친구이자 자신의 스타일리스트인 평구(마동석)과 뒷수습에 동분서주하게 된다.
“화려한 김혜수는 배우란 직업 속에서만 존재하지 실제 김혜수는 편안함을 추구하는 자연인이다. 그런 모습이 가장 잘 담긴 작품”이라는 김혜수의 말처럼 “가장 못하는 코미디를 왜 한다고 했을까 싶어 크랭크인 3주 전까지 죽고 싶었다”는 푸념이 가득하지만 당시 인터뷰를 보면 유사가족과 미혼모, 독거사 문제 등 여러 사회문제들이 가득 담겨 있는 작품에 기꺼이 참여하는 모습이 인상깊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열한 번째 엄마’ 속 모습은 유독 피폐하다. 소외되고 폭력으로 얼룩진 삶을 살지만 과하기 보다는 그저 한번의 눈맞춤에 힘을 얻게 되는 그런 위로가 스크린에 가득하다. 4살 생모의 죽음 이후 늘 엄마가 바뀌는 재수(김영찬)는 포주인 아빠(류승룡)의 “집에는 무조건 여자가 있어야 해”란 말에 또다시 새로운 엄마를 만나게 된다.
일찍 철이 든 자신의 일상을 모른채 무작정 엄마를 들이는 아빠도 원망스럽지만 이번 엄마는 역대급으로 자신과 맞지 않는다. 그동안 정이 들만 하면 사라졌던 존재들이지만 가장 예쁘고 동시에 가장 많이 자면서 또 그만큼 먹는다.
어렵사리 얻어 온 식권을 훔쳐 김밥으로 바꿔 먹고 자신보다 철이 덜 든 모습으로 어린 재수의 곁에 그저 존재할 뿐이다. 영화 속 이름도 그저 ‘여자’다. 여자는 이미 열명의 엄마가 거쳐간 소년을 만나면서 아무한테도 정주기 싫고 세상만사에 귀찮은 모습을 보이지만 그 누구보다 빨리 ‘어른아이’가 되버린 피 한방울 안 섞인 아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한다. 그렇게 개봉 당시 350만명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명필름 영화 ‘YMCA야구단’의 당찬 신여성 정림은 자세한 전사는 드러나지 않지만 독립유공자 민영환의 딸로 묘사된다. 김지우 감독의 ‘모던보이’와 더불어 김혜수가 보여준 남다른 항일 캐릭터중 가장 발랄하고 또 진취적인 캐릭터다. 개화기 시대에 선교사들과 함께 야구를 하는 신여성인 그에게 반한 호창(송강호)는 양반의 기세를 강조하는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합지졸들과 함께 팀을 이룬다.
선교사들을 통해 들어온 야구라는 신문물에 매료된 인물은 친일파의 아들 광태(황정민), 일본 유학생 출신의 강속구 투수 대현(김주혁), 쌍둥이 형제 재복과 만복(량현량하), 전직 왕실 무사 등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
“상놈의 공은 받지 않는다”는 양반이나 아웃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운동장을 벗어나는 주자 등 초창기 야구 풍경이 재치있게 묘사되며 ‘조선 최초의 야구단’을 강조하면서 흥행을 이끌었다. 선동렬 선수가 직접 자세 교정과 기술 훈련을 펼쳐 사실감을 더했고 김혜수가 당시의 고증을 살린 복식을 고스란히 재현해 시선을 모았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김혜수의 남다른 작품 선별력은 SBS드라마 ‘곰탕’을 통해 증명된다. 자신의 분야에서 티내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밝혀왔던 행동이 뽀얀 국물로 우려져 안방극장을 적셨다.
설특집 2부작으로 방영 직후 당시에는 이례적으로 1997년 휴스턴 국제영화제 TV드라마부문 연출가상 및 뉴욕 페스티벌 드라마부문 특별상 수상할 정도로 해외에서도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한 여름을 제외하고는 늘 곰탕을 끓여댔던 집안에 13살에 시집 온 순녀는 대를 잇는 게 유일한 목표로 치부되는 시댁에서 늘 허드렛일을 한다.
드라마는 지금은 성공한 식당 사업가로 여든이 넘은 순녀의 삶을 반추하며 3.1운동과 일본의 악행, 가부장제도의 폐해와 5.18 민주화 운동을 관통한다. 그런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 김혜수는 젊은 시절을 연기한다
늘 밖으로 나도는 남편(류시원)의 친구이자 아무도 모르게 마음을 기댔던 그(한재석)에게 전쟁으로 인해 구할 수 없었던 소뼈 대신 다른 고기로 국물을 내 대접하는 순녀는 지금도 수많은 시청자들에게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기울어져 가는 집안의 사실상 유일한 가장으로 억척스럽지만 기품있게 이끌어가는 그 모습은 쪽진 외모에도 굴욕없이 당당한 김혜수의 외모만큼이나 한국여성의 강인한 아우라를 각인시켰다.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