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역대급 R&D ‘예산 조이기’ 번지수 틀렸다

사설 기자
입력일 2023-08-30 13:57 수정일 2023-08-30 13:57 발행일 2023-08-31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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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국회에 제출할 내년도 정부 예산안 중 가장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 있다. 바로 25조9152억원으로 줄어든(올해는 31조778억원) 연구개발(R&D) 예산이다. 기술 주도에 무게를 둔 정부이니 강력한 긴축 속에 이 예산만큼은 증액할 것이라는 기대는 허망했다. 불안은 현실이 됐다. R&D 예산이 1991년 이후 33년 만에 줄어든 것보다 올 예산 대비 16.6%나 크게 줄인 파격이 당황스럽다. 이것이 ‘R&D를 R&D답게’한다는 윤석열 정부의 과학기술 철학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먼저 묻지 않을 수 없다.

연구개발 투자의 효율화나 재정 정상화는 지당한 말이다. 그러나 관행과 비효율을 걷어낸다는 것이 무차별적인 예산 조이기를 의미하진 않는다. A·B·C·D(AI, 바이오, 사이버 보안, 디지털 플랫폼)에 중점을 두는 건 좋다. 예외적으로 증액된 차세대 원전인 소형모듈원자로(SMR) 연구개발 등 원전 생태계 지원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전체 방향은 그르쳤다. 모래알에 비유되는 과제수는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성과창출형으로 바꾸면 된다. 5조2000억원의 예산 삭감이 아닌 재분배가 올바른 방향이다. 선택과 집중의 이름으로 미래 경쟁력과 혁신의 동력이 꺾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10조원을 막 넘긴 R&D 예산이었다. 박근혜 정부 때 16조원을 넘어서고 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10년 만에 두배 가까이 늘어났다. 연평균 10.9%씩 증가하면서 부실 문제가 불거진 건 사실이다. 그런 부분은 예산 배분부터 집행·평가 전 단계에서 보정해 가면 될 일이었다. 기술패권 경쟁의 시대에 추격도 하고 격차도 줄여야 할 중대한 시기다. 이를 외면한 채 기초연구 분야에서 6.2%를 깎고 정부 출연연 예산에서 10.8%를 깎은 명분이 ‘R&D 카르텔 타파’라는 것은 근거가 약하다. 과학계 카르텔이 어디서 생겼는지, 나눠 먹고 갈라 먹기를 했는지 얼마나 따져봤는가. 예산 조이기의 번지수가 틀렸다.

오히려 지금은 R&D 투자가 늘어날 수 있게 제도와 환경을 재정비할 때다. R&D 예산으로 생존하는 ‘R&D 좀비’를 지원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재정 누수 요인은 줄이면 된다. 안정적·장기적 연구 환경을 악화시킬 R&D 예산 삭감은 재고해야 한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건전재정을 하면서도 쓸 곳은 반드시 써야 한다”고 했다.

‘반드시’ 쓸 곳이 연구개발 투자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 속에서도 증가했던 R&D 예산이다. 예산안 처리 과정에서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도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