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미국 반도체법 앞 ‘진퇴양난’ 지켜만 볼 텐가

사설 기자
입력일 2023-03-08 14:10 수정일 2023-03-08 14:10 발행일 2023-03-09 19면
인쇄아이콘
다운사이클(침체기)로 어려움을 겪는 국내 반도체 업계에 ‘숨 불어넣기’ 해법이 절실하다. 제품 가격 하락으로 반년 넘도록 고전하는 터에 미국 행정부의 ‘반도체 지원법(Chips and Science Act)’이 옥죄고 있다. 초과이익 환수, 반도체 시설 공개 등 부대조건을 주렁주렁 내건 미국 반도체 보조금 정책, 정확히는 미국 내 제조 강화 행보가 매우 난감하다. 바이오(Bio), 배터리(Battery)와 함께 미국의 3대 미래 먹거리인 반도체(Chips)는 우리에게도 최대 효자 품목의 하나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대하는 순서는 명확해야 한다. 돈(반도체 생산보조금)을 미끼로 반도체 생산 주도권을 챙기겠다는 미국 의도에 대처하는 게 먼저일 수밖에 없다. 미국을 방문 중인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이 7일(현지시간) 한국의 기업이 불공평한 대우나 불확실성에 직면할 가능성을 최소화하기로 했다고 전하지만, 사실 그 ‘최소화’도 문제다. 경제·국가안보 등 심사 기준을 보면 반도체법 자체가 불공정 경쟁을 유도하는 ‘반도체 패권법’ 성격을 띤다. 자국 반도체 생태계 조성을 빌미로 과도한 독소조항을 포함한다. 가령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낸 초과 수익을 미국 정부가 공유해 자국 반도체 육성에 쓸 수 있다면 이게 말이 되는가.

반도체가 아무리 ‘21세기의 편자’라 하더라도 미국의 지나친 시장 개입 시도에 경제안보까지 우려해야 할 입장이다. 미 국방부 등에 반도체 시설 접근을 허용하도록 요구한 것 역시 날벼락 같은 소리다. ‘공짜 점심은 없다’, ‘어떤 기업에도 백지수표는 없다’(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고 하지만 너무 과하다. 원천기술 유출 위험이 있다. 살을 조금 내주고 뼈를 취하는 ‘육참골단(肉斬骨斷)’ 식 미국 반도체 정책 앞에서 한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술패권주의 옷을 입은 미국과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미국 주도의 반도체 먹이사슬에 편입될 수는 없다.

선택을 강요받는 K-반도체로서는 이미 불공평의 극치다. 안 그래도 진퇴양난인데 중국이 추격하고 EU와 일본까지 반도체 공장 쟁탈전에 뛰어든다. 그런데 우리는 세액공제를 제공하는 K-칩스법(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 하나도 여야 간 평행선만 긋고 입법 문턱을 못 넘고 있다. 불공평 대우 최소화를 막연히 희망하지 말고 우리 몫을 챙겨야 한다. 첨단 반도체를 만드는 유일한 나라로 바꾸려는 듯한 미국의 집념을 파격적 지원책 없이 이길 자신 있는가. 이 살벌한 공급망 전쟁 앞에서 생존하려면 세액공제가 ‘재벌 특혜’라는 못난 정치부터 버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