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그라운드] 포성이 난무하는 전쟁 중에도 막은 오른다…연극 ‘더 드레서’

허미선 기자
입력일 2021-11-17 18:45 수정일 2021-11-17 18:45 발행일 2021-11-17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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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sser
연극 ‘더 드레서’ 공연장면(사진=허미선 기자)
“연극은 좀 떨어져서는 보는 것 같아요. 하루하루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나는 것 같지만 연말에 돌아보면 크고 굵직한 상황만 떠오르는 것처럼요. 가까이서 보면 내 삶이 너무 차갑고 쪼이지만 좀 떨어져서 바라보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여유를 가지게 하지 않나 싶어요.”  

국립정동극장의 ‘명배우시리즈’ 중 첫 작품인 송승환의 ‘더 드레서’(The Dresser, 2022년 1월 1일 국립정동극장) 장유정 각색·연출은 전쟁 중에도 혹은 전쟁과도 같은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 속에서도 계속돼야 하는 연극에 대해 “좋은 온도를 가진 예술”이라고 정의했다.

이어 “떨어져서 바라보면 화나고 분주한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이 한순간이 나에겐 소중하구나를 느끼게 된다”며 “이 하루하루가 쌓여가면서 나를, 내 인생을 만들어가는구나 싶다”고 덧붙였다.

더 드레서 포스터_오만석
연극 ‘더 드레서’ 포스터(사진제공=국립정동극장)

연극 ‘더 드레서’는 할리우드 거장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The Pianist, 2002), 바즈 루어만(Baz Luhrmann) 감독, 휴 잭맨(Hugh Jackman)·니콜 키드먼(Nicole Kidman) 주연의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 2008) 등의 작가 로날드 하우드(Ronald Harwood)가 대본을 꾸려 1980년 영국 맨체스터 로열 익스체인지 시어터에서 초연된 작품이다.

작가가 실제로 영국의 셰익스피어 전문 극단에서 드레서(의상담당자)로 일하면서 겪었던 일들과 그 극단의 주인이자 셰익스피어 전문 배우 도널드 올핏 경의 실제 이야기가 녹아든 작품이다.

같은 해 웨스트엔드, 다음해 브로드웨이에 입성했고 1983년 영화로, 2015년에는 BBC에서 안소니 홉킨스(Anthony Hopkins)와 이안 맥켈런(Ian McKellen) 주연의 TV드라마필름으로 리메이크돼 사랑받았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을 배경으로 평생을 셰익스피어 전문 배우로 무대에 올랐던 선생님(Sir, 송승환)과 16년 동안 그의 곁을 지켜온 드레서 노먼(오만석·김다현, 이하 시즌 합류 순) 그리고 선생님의 아내이자 배우인 사모님(정재은·양소민), 배우 제프리(송영재·유병훈), 무대감독 맷지(이주원), 작가이자 배우 옥슨비(임영우) 등이 연극 ‘리어왕’을 준비하는 백스테이지 풍경을 담는다.송승환은 ‘더 드레서’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로 코로나19 상황과 흡사한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무대와 극장, 배우와 스태프 이야기가 아역으로 연기를 시작해 연극도 했던 저와 맞아서”라고 설명했다. 

더 드레서
연극 ‘더 드레서’ 창작진과 출연진들(사진=허미선 기자)
“다시 공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떻게 표현 못할 정도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상황이 되면서 온라인으로 공연이 보여지곤 했지만 관객과 직접 만나면서 하는 걸 재현하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극은 라이브로 관객과 만나고 호흡하고 인터랙션하면서 새로운 예술이 생겨나는 장르거든요. 극장이 열리고 (직접적인 관객과의) 만남이 있길 기대해 왔죠.”

지난해 초연됐지만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조기폐막하는 아픔을 겪은 ‘더 드레서’는 재연을 맞아 크고 작은 변화를 맞았다. 장유정 연출은 그 변화에 대해 “1, 2막을 합쳐 인터미션 없는 구성으로 바뀌었다”며 “그외에는 처음 잡은 굵은 선은 지키면서 디테일을 바꾸는 정도”라고 전했다.

더 드레서 포스터_김다현
연극 ‘더 드레서’ 포스터(사진제공=국립정동극장)

“예를 들어 전쟁 중 폭격이 지나갈 때 천장에서 떨어지는 시멘트 가루, 조명 등을 이용한 시각적 표현이 추가됐어요. 배우들의 재밌는 상황들, 실수, 대사 맞추는 신 등 백스테이즈 풍경을 대본에 나오는 선상에서 코믹하게 추가했습니다.” 

새로 합류한 출연진으로 인한 변화도 있다. 이에 대해 장유정 연출은 “굉장히 예민하고 섬세한 김다현 배우의 노먼이 작은 바람에도 기민하게 반응하는 것들, 양소민의 사모님이 솔직하고 뻔뻔하지만 그것을 따뜻하게 소화하는 지점들, 단단하고 듬직하면서도 엉뚱한 유병훈의 제프리가 세상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느낌을 살리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더불어 계속 바뀌는 선생님의 안락의자 옆 소품들도 달라졌다”고 덧붙였다.

초연에 이어 사모님 역으로 다시 돌아온 정재은은 “공연 중 코로나19라는 어려운 상황을 겪으면서 분장실 안에서 저희끼리 굉장히 서로 용기를 북돋우고 의지하며 돈독해졌다”며 “어려운 상황을 겪고 다시 만나다 보니 더 가족 같은 마음이다. 그런 마음이 작품에 녹아들어 더 디테일해지고 깊이가 생기지 않았나 싶다”고 털어놓았다.

승승환은 극 중 선생님이 227번째 무대를 준비 중인 ‘리어왕’에 대해 “어찌 보면 ‘리어왕’도 한 사람의 인생이야기”라며 “이 작품도 인생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한다”고 밝혔다.

“생활에 쫓기다 보면 깊이 있는 생각을 할 시간이 별로 없어요. 평상시 잊고 있던 걸 다시 돌아보게 하는 기회를 연극이 주는 것 같아요. 그것이 연극이 가진 역할이기도 하죠. ‘리어왕’도 그런 생각을 할 기회를 주는 작품 같아요. 인생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살아 왔는지…‘리어왕’과 비교하면서 내 인생을 돌아보게 되죠.” 

연극 더 드레서 공연사진 (1)
연극 ‘더 드레서’ 공연장면(사진제공=국립정동극장)

노먼으로 새로 합류한 김다현은 “대본 리딩 때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이야기인가 싶은 정도”라며 “힘든 전쟁통에서,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살아가야하고 살아남기 위해 연기하고 드레서로 선생님 옆을 지키는 모습이 다른 사람이 아닌 제 이야기 같았다”고 털어놓았다.“덧없는 희망이라는 병을 앓고 있지만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애쓰고 누군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걸 깨닫고 어떻게든 공연이 이뤄진다는 게 저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상황에서도 열심히 공연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관객들께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더불어 저 역시 힘을 얻고 공존하고 싶은 마음을 담고 있어서 관객과 만나는 게 그 어떤 공연보다 설렙니다.” 

더 드레서
연극 ‘더 드레서’ 출연들(사진=허미선 기자)

또 다른 노먼 역의 오만석 역시 “이 작품 배경과 내용이 우리의 2020년, 2021년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작년엔 팬데믹에 대한 불안감, 두려움, 작품을 잘 올려야 한다는 걱정 등이 팽배했는데 1년이 지난 지금은 좀 달라졌다”고 전했다.

“(그 팽배했던 불안감, 두려움, 걱정 등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덤덤하게 지켜야할 건 지켜야 한다는 느낌이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생각들을 작품 안에 좀더 잘 살려내기 위해 고민했죠. 정동길에 매일 오다보면 정취가 너무 좋아요. 올가을 저희도 저희지만 많은 관객들도 이 정취를 함께 즐기면 좋겠습니다.”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