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100] “바람에 풀들이 눕듯” 겸손하고 자유롭게 다시 무대로! 윤석화 아카이브

허미선 기자
입력일 2021-11-01 18:30 수정일 2021-11-01 20:58 발행일 2021-11-02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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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작소] 윤석화 아카이브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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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화 아카이브 ‘자화상I’ 중 ‘딸에게 보내는 편지’(사진제공=소극장 산울림)

“지난해 저에게 연극배우로서 예정돼 있던 것은 런던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 공연이었어요. 2020년 10월 공연이 무산돼 올해 4월로 연기됐지만 여의치 않았죠. 제 나름대로는 런던 공연에 대한 꿈을 내려놓는 시간이었어요.” 

2020년 10월로 계획됐던 런던 웨스트엔드 공연을 앞두고 오픈 드레스 리허설 형식으로 2019년 6월 설치극장 정미소 폐관작으로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선보였던  윤석화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으로 발이 묶인 상황을 “꿈을 내려 놓는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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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화 아카이드 ‘자화상’(사진제공=소극장 산울림)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영국 극작가 아놀드 웨스커(Arnold Wesker)의 동명희곡을 무대에 올린 작품으로 1992년 임영웅 연출과 윤석화가 산울림극장에서 전세계 최초로 공연했다. 

가수로, 미혼모로 살았던 엄마가 사춘기에 접어든 딸에게 보내는 10가지 교훈을 5곡의 노래에 편지 형식으로 실어 풀어낸 모노드라마다.

2013년 서울 및 웨스트엔드 공연을 목표로 2012년 원작자 아놀드 웨스커, 제작자 리 맨지스(Lee Menzies) 등 웨스트엔드 제작진, ‘브로드웨이 42번가’ ‘조용필 콘서트’ 등의 작곡가이자 음악감독 최재광과 업그레이드 작업을 마쳤지만 좌절되는 불운을 겪은 작품이다.
꿈꾸던 웨스트엔드 행은 그렇게 무산되고 드라마 ‘펜트하우스’에 로건 리(박은석)의 할머니로 출연했지만 “국내에서 무대에 올라갈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기회를 만들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 대해 윤석화는 “그렇게 맞은 낯설고 외롭고 그림자가 길었던 시간이 저를 완전히 겸손하고 자유롭게 만들어줬다”고 털어놓았다. 
“바람에 풀들이 눕듯 겸손해졌어요. 버릴 거 다 버리고 나니 홀가분하더라고요. 제 경우에는 살면서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다시 꿈을 꾸는 긍정의 힘과 사랑이 저를 부족한대로 여기까지 있게 해줬다고 생각해요. 그 시작은 언제나 저를 열심히 지지해준 관객들의 사랑을 기억하는 일이었어요. 뭔가 끊임없이 노력하는, 45년 넘는 연극인생도 다를 바 없었죠. 지난 2년 동안도 제 남은 각고의 꿈이 무너지고 다시 낮아져야했어요.”
그렇게 “더 이상 젊지도 않고 외롭고 쓸쓸할 수 있는 시간에 다시 낮아지면서 자유로워진” 윤석화는 연극 무대 위에 자신의 대표작으로 세 차례에 걸쳐 ‘자화상’을 그려나간다.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인 임영웅 연출과 함께 했던 소극장 산울림에서 지난 21일부터 관객을 만나고 있는 ‘자화상I-소극장 산울림’(11월 20일까지 소극장 산울림)을 시작으로 그는 스스로 구성하고 연출한 ‘윤석화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펼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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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화 아카이브 ‘자화상I’ 중 ‘목소리’(사진제공=소극장 산울림)
‘자화상I’에서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비롯해 윤석화가 처음으로 소극장 산울림 무대에 섰던 ‘하나를 위한 이중주’, 임영웅 연출과의 첫 작업인 ‘목소리’의 주요 장면들이 재현된다. 각 작품들 사이사이엔 윤석화의 과거, 현재의 모습과 인터뷰 등이 담긴 영상이 배치된다. 
‘하나를 위한 이중주’는 윤석화가 번역한 톰 켐핀스티 원작으로 다발성 경화증을 앓으면서 무너져 내리는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파니와 그의 주치의 펠트만 박사가 주고받는 대화로 엮은 작품이다. 이번 ‘윤석화 아카이브’에서는 김상중이 목소리로 특별 출연한다. 장 콕도의 1인극 ‘목소리’는 헤어진 연인과의 통화로 토해내는 다양한 감정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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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화 아카이브 ‘자화상I’ 중 ‘하나를 위한 이중주’(사진제공=소극장 산울림)
‘자화상II-예술의 전당’은 ‘덕혜옹주’ ‘명성황후’ ‘마스터클래스’로, ‘자화상III-사라진 극장’은 ‘신의 아그네스’ ‘나, 김수임’ ‘위트’로 꾸릴 예정이다. 무대와 더불어 윤석화의 오랜 팬을 자청한 예술가 조현덕은 ‘윤석화 오마주’ 작품을 선보인다. 각 ‘자화상’ 무대의 테마에 맞는 3면화로 제작될 예정이다. ‘자화상I’을 위한 첫 작품은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테마로 1930년대 할리우드 스타 스타일로 구현됐다.
“이 작은 무대에 오기까지 제 자신과의 싸움도 많았어요. 두렵기도 했지만 가능했던 건 연극 혹은 예술이 제가 걸어온 길이고 그냥 저이기 때문이었어요.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제가 생각하는 이야기, 이미지 등을 관객들에게 내어놓을 수 있을 때 제가 살아있음을 느끼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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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화 아카이브 ‘자화상I’ 중 ‘딸에게 보내는 편지’(사진제공=소극장 산울림)
그렇게 고되고 힘들지만 삶의 이유이기도 한 무대로 다시 돌아온 윤석화는 ‘아카이브 프로젝트’가 가능한 것은 “사람들 덕분”이라고 털어놓았다. 윤석화는 자신의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응원하기 위해 기꺼이 일일 하우스매니저로 나선 송일국, 유준상, 박정자, 손숙, 최정원, 박건형, 박상원, 유인촌, 김성녀, 배해선, 남경주, 양준모 등 쟁쟁한 배우들을 비롯해 무대감독, 조명감독, 기술감독, 음악감독 등 모든 스태프들 “그들에게 헌정하는 무대”라며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저와의 우정과 연극에 대한 사랑으로 다시 뭉친 어제의 용사들이 있어서 가능했던 무대예요. 우리 사회에서는 어제의 용사들이 빨리빨리 잊혀지죠. 그래도 잊혀지지 말아야할 것들의 몸부림이랄까요.”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