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100] 6시간짜리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인 5역 정동환 “매회 낭떠러지 위”

허미선 기자
입력일 2021-10-18 19:00 수정일 2021-10-18 20:55 발행일 2021-10-19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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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더컬처]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정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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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환(사진=이철준 기자)

“완전 낭떠러지예요. 언덕에 서 있는 저를 자꾸 미는데 안떨어져보려고 애를 쓰는 것 뿐이죠. 언젠가는 떨어질 거예요.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정동환은 1, 2부를 합쳐 6시간짜리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31일까지 이해랑예술극장) 무대에 오르는 심정을 이렇게 전했다. 극의 첫 장면, 사형 위기에 처한 도스도옙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와 같은 심정으로 무대에 임한다면서도 그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털어놓았다.

“절박함이 무대에 계속 오르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해요. 편안하게 여태껏 해오던 일들을 할 수도 있어요. 누군가 함께 하자고 했던 일도 많고 그 중에는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보다는 이 길이 가고 싶어요. 이 길이 나에게는 옳은 길이라고 생각해요.”

◇6시간, 1인 5역, 20분의 독백 “그냥 가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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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font-weight: normal;">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사진제공=극단 피악)

언젠가는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걷는 그의 연기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도옙스키의 동명소설을 7시간짜리 연극으로 꾸려 1인 4역을 감당했던 2017년 초연에 이어 두 번째 시즌 무대에 오르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오롯이 혼자 이끌었던 ‘대심문관과 파우스트’ 그리고 올해 5월 공연됐던 ‘단테의 신곡-지옥편’까지.

“이번에도 만만치 않아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닥치지 않은 걸 미리 겁내기 보다는 그냥 가보는 거죠. 그런 긴장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 않나 생각해요.”

2017년 초연 당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정동환은 해설자이자 내레이터 도스도옙스키와 알료사의 스승이자 그 지역에서 존경받는 예언자 조시마 장로, 이반이 스메르자코프에게 들려주는 작품 속 주인공 대심문관, 사탄을 상징화한 식객까지 1인 4역을 연기하고 대심문관 혼자 20여분을 독백하는 장면을 소화했다. ‘대심문관과 파우스트’에서는 핏물 속에 등장해 선과 악,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고민으로 방황하는 여정을 오롯이 혼자 감당해냈다.

“초연에서는 대심문관 혼자 20분을 독백하는 신이 있었어요. 그 긴 시간을 말만 가지고 표현해요. 너무 아름답고 깊이 있는 말들이죠. 여기서 제 연기인생을 그만 둘 줄 알았어요. 그걸 해내지 못하면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고 말거든요. 가만히 생각하면서 대사를 하는 게 아니고 막 쏟아내는 거라 길을 한번 잘못 들면 낭떠리지밖에 없어요. 단어 하나, 토씨 하나만 틀려도 다른 대사나 장면으로 연결돼 버려요. 소름 끼치는 일이죠.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에요. 대처할 방법도, 아무런 대책도 없어요. 그냥 가는 수밖에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도스도옙스키의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국립파리8대학교 연극과에서 학사·석사·박사 과정을 거쳐 극단 ‘Gamyunnul’을 창단해 활동했던 나진환 성결대학교 연극영화학부 교수가 각색과 연출을 맡아 2017년 7시간짜리 연극으로 첫 선을 보인 후 두 번째 시즌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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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정동환은 1인 5역을 연기한다(사진제공=극단 피악)

탐욕스럽고 색정가인 아버지 표도르(이기복)와 소심하고 난폭한 장남 드리트리(주영호), 이성적인 무신론자 차남 이반(한윤춘), 수도사를 꿈꾸는 알료사(김찬), 표도르의 사생아라는 신분을 숨긴 채 하인으로 살아가는 스메르자코프(조창원) 등 한 가문의 비극을 담고 있다. 드미트리의 약혼자이면서 이반이 사랑을 갈구하는 카체리나(정수영), 옛사랑을 그리워하며 드리트리와 표도르를 몸 닳게 하는 그루셴카(박결이) 등까지 얽혀 인간 내면과 존재 자체에 대해 깊이 탐구하는 작품이다.

도스도옙스키 탄생 200주년과 나진환 연출이 이끄는 극단 피악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작품으로 초연 당시 1인 4역을 연기하며 대심문관의 20여분간 독백 등을 소화했던 정동환은 두 번째 시즌에서 새로운 표현방식으로 신을 꾸린 대심문관과 새로 생긴 변호사 역할까지 1인 5역을 책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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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환(사진=이철준 기자)

도스도옙스키에서 커프스 하나로 변신하는 이 변호사 역시 20분여를 혼자서 끌어가야하는 역할이다.

◇세 번째 대심문관의 변화, 새로 생긴 변호사의 독백 “이번이 세 번째 대심문관이에요. (2017년 초연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꼭대기에 올랐고 ‘대심문관과 파우스트’에서는 핏물에 몸을 담갔고 다시 이 작품이죠. 같은 걸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바꿔보자 했죠.”

이어 “악간의 버전을 달리 했다”는 정동환은 “이 신은 내 얼굴이 아닌 심리 상태를 보여줘야 하는데 너무 장광설이다. 초연에서는 내 안의 숨겨진 내면, 또 다른 나를 대사로만 처리했다면 이번엔 페인트와 진흙 등을 이용한 표현예술로 끄집어낸다”고 덧붙였다.

“그 아름답고 깊이 있는 말들에 비주얼적인 요소들을 추가했어요. 매일 진흙탕과 페인트를 묻혀가면서 최선을 다 하고 있죠.”

초연 당시 25분여 정도였던 대심문관 장면에 대해 “대사가 입에 붙으면서 15분까지 단축되기도 했고 지금은 17분여 정도”라고 전한 정동환은 “내면 심리를 대사만이 아닌 미술, 일종의 퍼포먼스 등 또 다른 예술들로 끄집어낸다. 대심문관 뿐 아니라 스메르자코프, 이반, 드리트리, 표도르 등도 내면을 드러내는 데 다양한 오브제와 표현예술들을 활용해 새롭게 접근한다”고 설명했다.

“안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발견하고 탐구하는 작업이죠. 배우들은 말로 못할 정도로 힘들어요. 저 역시 머리가 혼돈스러워요. 연습 내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방향으로 틀어져 버리는 경험을 하면서 다른 예술표현까지 해야 한다는 부담이 너무 컸어요. 하지만 그건 제 문제죠. 누구한테 봐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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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정동환은 1인 5역을 연기한다(사진제공=극단 피악)

그리곤 “좋다 나쁘다를 떠나 완전 다른 연극”이라며 “같은 작품으로 이렇게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구나, 다시 한다는 의미는 무엇인지 등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을 보탰다. 20분의 긴 독백에 표현예술까지 덧칠해진 대심문관 장면에 이어 극의 마무리 즈음에 새로 추가된 변호사 역시 그의 몫이다. 

“변호사는 말로만 표현하는 인물이에요. 우리는 정의를 주장하지만 옳지 못한, 편견에 의한 정의가 정의로 정의될 수밖에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데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장면이죠. 거기서(대심문관 신에서) 죽지 않으면 여기서(변호사 신에서) 죽어라죠.”

◇복잡한 인간 내면을 다루는 장인, 도스도옙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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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환(사진=이철준 기자)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다단한지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선인과 악인을 판단할 때 우리는 저마다가 가진 편견을 가지고 재단하죠. 하지만 인간의 심리는 절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거든요.”

그리곤 “누구나 이 작품을 보면 스스로가 얼마나 복잡한 인간인지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저 역시 어떤 대사든, 선택이든, 인물이든 다 공감이 간다”이라고 털어놓았다.

“인간의 그 깊은 심리를 잘 파헤친 분이 도스도옙스키죠.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내 안에 들어있는 모든 것들을 표현해내는구나 싶거든요. 작품마다 기억에 남는 대사는 분명 있지만 이 작품은 제가 맡은 대심문관, 식객, 조시마 장로, 도스도옙스키, 변호사 대사를 다 읊어야할 정도예요.“

그가 그런 인간의 내면을 기가 막히게 다루는 장인으로 평가한 도스도옙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정동환이 연기하는 역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들이 전부 도스도옙스키 머리에서 나왔으니 중요한 인물이죠. 그 사람에게서 주목한 건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는 거예요. 이미 죽는다고 결정이 나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바라본 세상, 그런 질곡을 겪은 사람의 깊이, 그 뒤 이야기들이 다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의 말처럼 극의 사건이나 인물들은 도스도옙스키를 떠올리게 하곤 한다. 사형을 언도받은 도스도옙스키가 처형 직전 죽음을 면하는 극의 첫 장면부터 그렇다. 실제로 도스도옙스키는 스메르자코프처럼 간질을 앓았고 표도르처럼 제대로 아내와 아이들을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에게서 자랐다. 동네에서 맞아 죽은 그의 아버지는 도스도옙스키가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처럼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내게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시베리아 수용소 생활을 하는 등 역경 속에서 많은 걸 느끼고 별의 별 인간 군상들을 만났을 거예요. 깊이가 다른, 상상력이 엄청난 사람이죠.”

◇오늘도 기꺼이 낭떠러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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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환(사진=이철준 기자)

“막을 내려 봐야, 끝이 나 봐야 ‘잘했다’ ‘못했다’를 말할 수 있지 지금은 그런 말도 못해요. 열심히나 하는 거죠.”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운 인생이 뒤집어질 지경”이라면서도 매일 기꺼이 낭떠러지 위에 서는 정동환은 “저로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걸 극복하려고 하는 중”이라고 토로했다.

“사실은 그러려고 할 뿐이지 극복한 건 아닐 수도 있어요. 하지만 진짜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아무튼 제가 선택한 일이니까요. 지나가는 벌레 하나만 건드려도 이 공연을 못한다는 생각으로, 절대 나쁜 짓, 양심에 어긋나는 짓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