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쁘띠’리뷰+This is Moment] 저마다의 목소리만을 내는 지금 사람들의 불편한 투영…연극 ‘정의의 사람들’

허미선 기자
입력일 2021-04-30 18:45 수정일 2021-04-30 18:45 발행일 2021-04-30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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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정의의 사람들’(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하지만 연극 ‘정의의 사람들’(5월 9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마지막 5장, 저마다의 주장만을 외치는 사람들이다.

‘정의를 위한 살해의 정당성’이라는 카뮈의 원작이 던지는 질문에 그 당시와는 다른 시대에서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불쑥 불쑥 난입해 ‘정의의 정의’를 묻는다.

극의 흐름은 다소 어수선하고 장면들은 부조화를 이룬다. 원작이 가진 무게감도, 진중함도, 아이러니도 쉽게 잡히지 않는다. 그런 극에서 “왜 굳이 카뮈의 ‘정의의 사람들’일까, 그 마지막은 왜 달라져야 할까”를 고민한 창작진의 고충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장면 역시 엔딩이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는 이는 단 한명도 없다. 원작에서 ‘정의실현’을 위해 대공을 죽인 칼리아예프(김시유)는 어쩌면 그 시대의 국가 혹은 체제를 상징하는 스쿠라토프(강신구), “너희의 정의가 진짜 정의인지?”를 끊임없이 묻는 사내(신현종) 등과 첨예하게 갈등하고 고민하다 2021년을 연상시키는 어딘가에 존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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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정의의 사람들’(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독립군들이 있고 노동법 준수를 외치는 근로자들이 있는가 하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연상시키는 이들도 등장한다. 더불어 서로를 ‘개진보’ ‘꼴보수’라고 칭하는 극진보와 극보수, 성소수자, 남녀 등이 서로를 조롱하고 격돌하다 저마다의 주장만을 목소리 높여 부르짖는다.

주인공인 칼리아예프의 목소리마저 묻혀 버리는 주장들의 난무 속에는 구체적이고 개인화된, 칼리아예프가 살았던 시대의 것과는 다른 정의들이 자리 잡고 있다.

절대 불변의 정의는 과연 존재하는가. 남의 정의에는 귀를 닫고 목소리 높여 외치는 스스로의 정의만 옳은 것인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시니컬함이 ‘정의’를,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며 지금에 이르렀는가.

4막까지 구현된 원작이 던진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살인은 정당한가’라는 물음에서 확장된 ‘정의의 정의’에 대한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미심장한’ 엔딩이다.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