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100] ‘마지막 크리스틴’을 선언하고 ‘처음’을 떠올리다! 뮤지컬 ‘팬텀’ 임선혜 “제 직업이 너무 좋거든요!”

허미선 기자
입력일 2021-04-12 19:00 수정일 2021-04-14 15:36 발행일 2021-04-13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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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더컬처]
임선혜
세계적인 소프라노이자 뮤지컬 ‘팬텀’ 크리스틴 역의 임선혜(사진=이철준 기자)

“6년 전 처음 뮤지컬 ‘팬텀’의 크리스틴 다에 제의를 받고 오래 고민하면서 욕심과 도전의 가치를 정의하던 그때를 떠올렸어요. 욕심이라면 하지 말아야 하고 도전이라면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잘할 줄 알면서 하는 건 욕심이고 잘할지는 모르지만 많이 배우겠다고 시작하면 도전이라고 생각했죠. 나는 도전이니까 용기 내보자 했던 그 시간이요.”

뮤지컬 ‘팬텀’(6월 27일까지 샤롯데씨어터)의 2015년 초연부터 크리스틴 다에로 함께 한 성악가 임선혜는 “마지막”을 선언하고 “처음을 떠올렸다”고 털어놓았다. 1999년 스물셋에 벨기에 고(古)음악의 거장 필립 헤레베게에 발탁돼 유럽은 물론 뉴욕 카네기홀, 링컨센터, 베를린 슈타츠오퍼, 함부르크 극장 무대에 올랐고 영국의 그라모폰 음반상, 독일 비평가 상 등을 수상하며 고음악계의 유일한 동양인 프리마돈나로 이름을 알리던 때였다.

임선혜
세계적인 소프라노이자 뮤지컬 ‘팬텀’ 크리스틴 역의 임선혜(사진=이철준 기자)

“뮤지컬도 해보고 싶다는 호기만으로 결정할 수는 없었어요. 행여 뮤지컬을 함으로서 성악가로서의 제 테크닉이 상하거나 원하는 걸 못하는 상태가 될 수도 있었으니까요. 가장 큰 고민은 뮤지컬 ‘팬텀’을 하고 난 다음에도 제가 할 수 있는 건 계속 해야하는데 가능할까 였어요. 저는 제가 하는 (클래식, 성악) 장르에 애정이 많아요. 뮤지컬 때문에 내 공연을 방해받거나 성악가 커리어에 리스크가 되는 걸 감수할 수는 없었어요.”

당시 뉴욕 카네기홀 공연 중이던 임선혜에게 로버트 요한슨 연출은 “설득할 2시간을 달라”며 “2시간이면 된다”고 자신하기도 했다. 임선혜 캐스팅을 위해 꼬박 2년여의 공을 들인 로버트 요한슨과 2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눈 끝에 임선혜는 뮤지컬 ‘팬텀’ 합류를 결정했다.

 “설득의 말도 있지만 어떤 마음으로 나와 함께 하고 싶은지, 정말 내가 하면 잘 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지 등을 살폈어요. 연출님에게서 그 확신이 느껴졌고 연출님이 그렇게 날 만들어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임선혜가 오랜 고민 끝에 출연하게 된 뮤지컬 ‘팬텀’은 가스통 르루(Gaston Leroux)의 소설 ‘오페라의 유령’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오페라 극장 지하에 숨어 사는 팬텀 에릭과 그가 첫눈에 반한 프리마돈나 크리스틴 다에의 비극적인 로맨스를 다룬다.

뮤지컬 ‘나인’의 작가 아서 코핏(Arthur Lee Kopit)과 작곡가 모리 예스톤(Maury Yeston)의 콤비작으로 1991년 미국 초연 후 한국에서는 2015년에 처음 관객들을 만난 후 2016, 2018년에 이은 네 번째 시즌을 맞았다.◇나를 닮은 크리스틴 “제 직업이 너무 좋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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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팬텀’에서 크리스틴 다에로 분하고 있는 임선혜(사진제공=EMK컴퍼니)

“(마담 카를로타의 의상 담당으로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일하게 된) 크리스틴 대사 중에 ‘정말 좋아요…(중략)…이곳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라는 대사가 있어요. 저도 그래요. (극장, 무대 위에 있을 수 있는) 제 직업이 너무 좋거든요!”

유렵에서 22년차 성악가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임선혜는 ‘팬텀’의 크리스틴을 통해 자신의 첫 데뷔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제 유럽 데뷔 콘서트가 대타였다”며 “하루 전날 공연하기로 한 성악가가 못하게 돼 제가 대신 무대에 오르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한번도 해보지 않은 공연이었어요. 공연 전날 저녁에 피아노 반주에 맞춰 잠깐 배우고 무대에 올랐죠. 그렇게 배운 노래가 오케스트라에 실리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상상보다도 너무 멋졌어요. 게다가 그 악기들이 제 가까이에 있어요. (‘내 고향’ 중 )크리스틴의 가사처럼 ‘사랑스러운 플롯 나를 들뜨게 해, 목관의 트릴이 내게 스릴을 줘, 거대한 콘트라베이스…’ 무대 위에서 노래를 쉬거나 악기 솔로 때는 연주자들을 보게 돼요. 누가 이런 명당에 있을 수 있겠어요.”

 

그리곤 “오페라 극장에 처음 갔을 때 무대 바닥을 깔고 조명을 설치하고 가발부터 신발, 드레스 등을 만들 수 있는 공간들을 보면서 느꼈던 제 감정이 의상담당이지만 극장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는 크리스틴과 닮았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크리스틴은 캐릭터의 성숙과정이 보여서 매력적이에요. 타고난 재능과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여성스러움을 지녔지만 팬텀의 얼굴을 보겠다는 용기를 내죠. ‘이런 게 연애구나’ 샹동 백작과 썸도 타보고 팬텀의 이야기를 듣고 존경하는 스승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느끼고…. 샹동 백작과는 가슴 설레는 풋풋한, ‘이게 사랑일까’ 싶다면 에릭과의 감정은 깊어요. 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중요한 반전 포인트죠.”

◇전환의 극치 ‘내 사랑’, 경이로운 ‘넌 나의 음악’, 울컥하는 발레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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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소프라노이자 뮤지컬 ‘팬텀’ 크리스틴 역의 임선혜(사진=이철준 기자)

“처음 ‘넌 나의 음악’이라는 넘버를 보고는 ‘이게 노래야?’ 했어요. ‘랄랄라~’와 ‘도레미파솔파레파미, 도레미파미솔파레미도’ 계명에 맞춘 단순한 멜로디잖아요. 하지만 에릭이 죽어갈 때 마지막으로 크리스틴이 ‘오 너는 음악, 고귀한 음악, 넌 나의 환한 빛’라고 불러줄 때는 완전 다른 노래가 돼 있어요. 라이트모티프(악극ㆍ표제 음악에서 주요 인물이나 사물 또는 특정한 감정을 상징하는 동기)처럼 캐릭터를 설명하죠.”

이렇게 전한 임선혜는 “단순한 선율 하나로 10가지 이상의 다른 감정 표현이 가능하게 만들어둔, 아주 짜임새 있는 곡”이라며 “이런 단순한 멜로디로 최고의 효과를 내는 게 상업예술이구나 감탄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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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소프라노이자 뮤지컬 ‘팬텀’ 크리스틴 역의 임선혜(사진=이철준 기자)

“에릭의 이야기를 하는 발레신에서는 울컥하게 돼요. 노래를 해야 해서 너무 몰입하면 안된다 저 자신을 추스러야 하죠. 특히 파랑새를 주는 (에릭의 엄마이자 댄서,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가수인) 벨라도바에게 에릭이 확 안길 때 너무 눈물이 나요. 너무 짧게 살다 간 가수, 댄서, 엄마의 기억으로 살고 있는 에릭이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게 너무 현실처럼 다가오거든요.” 

그리곤 “채 10분이 안되지만 극 전체를 주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장면”이라며 “게다가 노래하는 아이가 주는 감동이 진정성을 가지게 만드는 장면”이라고 부연했다.

그리곤 가장 좋아하는 넘버로 ‘내 사랑’(My True Love)을 꼽았다. 이 넘버에 대해 “팬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다 알고 얼굴을 보여 달라고 애원하는 노래”라 소개한 임선혜는 “성격 전환의 극치 같다”고 덧붙였다. 

“정말 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을 잘 표현하고 싶은 노래예요. 소중하지만 내 감정을 너무 실으면 부담스러우니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읊조리는 마음이죠.”

임선혜의 설명처럼 “그런 마음이 먹어지는 크리스틴을 잘못 표현하면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욕을 먹을 수도 있다.” 그는 “팬텀의 얼굴을 보고 도망은 쳤지만 마지막을 함께 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한 것 같다”고 말을 보탰다.

“마지막 팬텀과 함께 하는 자체를 잘 해냈을 때 카타르시스가 깊어요. 이 사람으로 인해 행복하다가 아니라 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감정이요. 그 후 크리스틴이 샹동한테 갈 수 있을까, 노래를 계속 할 수 있을까를 상상해 보곤 해요. 크리스틴이라면 한동안 노래도 못하다가 결국 노래로 위로받으면서 팬텀에 대한 사랑을 지킬 것 같아요.”

◇안정적인 카이, 마에스트로 박은태, 로맨틱 전동석, 어린왕자 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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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팬텀'의 네 팬텀. 왼쪽부터 박은태, 카이, 전동석, 규현(사진제공=EMK컴퍼니)

“사실 2월 말부터는 독일에서의 투어공연이 계획돼 있어서 출국을 해야 했어요. 하지만 코로나19 상황이 너무 안좋아져서 결국 취소했죠. 정말 어려운 결정이었어요. 아프지 않은데 공연을 취소하기는 처음이었죠.”

그렇게 코로나19로 성악가로서의 행보에 차질을 빚으면서 그는

뮤지컬 ‘팬텀’과의 이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임선혜는  “덕분에 모든 팀원들과 연습의 처음과 끝을 같이 했다 ”며  초연, 삼연 때 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면서 동료애도 남달라졌다”고 털어놓았다.  

2021 팬텀 공연사진 (1)

“다른 집에서 넘어온 미운오리새끼나 이방인이 아닌, ‘소프라노 임선혜’라는 수식어를 떼고 이 작품에 녹아들기를 바랐는데 이번에야 말로 그렇게 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그 어느 때보다 뮤지컬 ‘팬텀’ 사람들과 “코로나19로 인한 거리두기를 하고 조심하면서도 더 끈끈해지고 무대에서 훨씬 자유롭고 유난한 케미스트리를 이룰 수 있었던 시간”을 보낸 임선혜는 에릭을 연기하는 카이·박은태·전동석·규현(시즌합류·가나다 순)의 전혀 다른 매력에 대해 전하기도 했다.

“학교 후배이기도 한 카이는 함께 무대에 서면 든든한 안정적인 팬텀이에요. 자신만의 팬텀을 굉장히 잘 만들어 뒀죠. 박은태 배우는 음악성이 너무 좋아요. 노래를 잘 하는 사람과 호흡을 맞추니 무슨 창법이든 드라마에 빠져들게 돼죠. 진짜 마에스트의 느낌이에요. 함께 할 때마다 굉장히 유연한 가수이자 배우임을 느껴요.”

 이어 전동석에 대해서는 “눈빛 연기가 일품”이라며 “카리스마도 있는데 로맨틱한 감정을 너무 잘 살리는 팬텀”이라고 덧붙였다.

“진짜 샹동 백작이 긴장해야할 정도로 로맨틱하죠.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게 극이 훅 지나가게 하는 팬텀이에요. 규현 배우는 어린왕자 같아요. 카리스마, 비극의 주인공인 팬텀의 매력에 순수한 영혼이 더해지죠. 크리스틴으로서는 그걸 깰까 두려워하게 돼요. 정말 다칠까봐. 그렇게 팬텀에 따라 저도 다른 크리스틴이 되죠.”

◇‘마지막 크리스틴’ 선언 “아쉽지만 돌아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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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소프라노이자 뮤지컬 ‘팬텀’ 크리스틴 역의 임선혜(사진=이철준 기자)

“사실 여전히 조심스러워요. 저는 양쪽 분야를 오가고 있지만 뮤지컬은 온전히 집중해야 하는 장르임을 느끼거든요. ‘팬텀’이 예외적으로 클래식 발성이 필요해서 저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의 표현을 빌자면 “(뮤지컬을 해보겠다는) 엉뚱한 결론으로 주변 동료와 업계에서 “이도저도 안되고, 뮤지컬계에서도, 성악계에서도 이방인이 될까” 걱정을 듣던 임선혜는 두 분야 모두에서 인정받는 선례를 남겼다.

그는 성악과 뮤지컬의 가장 큰 차이로 “마이크 사용 유무”를 꼽으며 “클래식에서는 소리를 멀리 보내기 위해 노력하는 발성이지만 뮤지컬은 오히려 속삭이듯 하는 게 더 큰 감동”이라고 말을 보탰다.

“이제야 좀 알 것 같은데 끝이에요. 저는 이제 본업으로 돌아가야 하고 바흐와 모차르트를 해야 해요. 아쉬워도 가야죠.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임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렇게 처음 시작할 때와 같은 오랜 고민 끝에 임선혜는 이번 시즌을 “마지막”이라고 선언하고 크리스틴 다에로 ‘팬텀’ 무대에 오르는 중이다.

“크리스틴이라는 역할은 성악가들로 하여금 전혀 다른 장르로 건너갈 수 있는 ‘안전한 다리’ 같아요. 해맑고 앳된 느낌이 중요하니 그런 매력을 가진 후배들이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성악가에서 뮤지컬 배우로의 전향이 아닌 자유로운 크로스오버, 그 어려운 길을 건너고자 노력하는 후배들이 어렵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