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사회적 임계점

허미선 기자
입력일 2021-01-05 14:09 수정일 2021-04-30 10:19 발행일 2021-01-06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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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미선 문화부장

“고통에 익숙한 사람, 잘 견디는 게 디폴트인 사람은 없어요.”

드라마 ‘런온’ 중 오미주(신세경)가 아끼던 후배의 은퇴소식에 참담해진 육상선수 기선겸(임시완)에게 전하는 위로는 아픈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폭행에 “운동을 그만 두게 되는 게 더 두려워” 견디면서 괜찮은 것도 같았지만 결국 ‘임계점’(臨界點)을 맞았다.

대부분의 일에는 임계점이 존재한다. 임계점은 열역학에서 상평형이 정의될 수 있는 한계점이며 그 점을 넘으면 상의 경계가 사라진다. 액체가 기체화되는 시점이며 달랐던 물질의 구조와 성질이 일체화 되는 시점을 일컫는다. “극과 극은 통한다”거나 “둘이 아닌 하나다”라는 말은 그래서 존재한다.

2020년 12월 8일 16개월 신생아가 숨졌다. 외력에 의한 복부 손상으로 인한 장파열이 원인이었다. 췌장 절단으로 인한 복강막 출혈이 사망원인이지만 소장, 대장 등 장기가 파열됐고 머리, 갈비, 쇄골, 다리 등의 뼈는 성한 곳이 없었다.

생후 7개월 무렵 입양된 양부모에 의한 상습학대 의혹이 불거졌고 아이가 다니던 어린이집 교사, 진료한 소아과 의사, 아이가 30분 넘게 혼자 차에 방치된 걸 목격한 시민 등에 의해 학대의심 신고가 있었지만 3건 모두 무혐의 처분이 내려졌다.

이 비극에는 편견에 대한 편견이 크게 작용했다. “양부모라는 편견 때문에 학대의혹을 받았다” “목사와 어린이집 원장인 부모 슬하에서 자라 미국 유학을 다녀왔고 열혈 자원봉사자였던 양모가 그럴 리 없다”. 편견에 대한 편견으로 아이는 세상을 떠났다. 그제야 양모는 아동학대치사와 상습아동학대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되고 양부는 아동학대·아동유기·방임 혐의로 불구속기소됐다. 

세번의 학대의심 신고에서 한번이라도 제대로 수사가 이뤄졌다면. 아이의 상태에 관심을 가졌다면. 하지만 이미 임계점은 지나가 버렸고 비극은 벌어졌다. 그렇게 사회적 문제의 임계점은 사건의 진상, 부조리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는 해결을 위한 최적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사회적 현상의 임계점은 물리학이나 수학처럼 딱 맞아 떨어지지도, 부동의 시기가 존재하지도 않는다. 저마다의 기준을 가진 개인들이 문제나 현상에 관심을 얼마나 가지는지, 국가적·사회적 시스템이 얼마나 제대로 작동하는지에 따라 임계점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가볍게 아이의 머리를 치는 행위를 누군가는 장난으로 받아들여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고 어떤 이는 폭력으로 인지하고 조치를 취하고자 한다.

수차례 문제제기를 해도 수정되지 않는 오류는 ‘포기’를 떠올리게 하고 ‘비극’을 맞는다. 스스로에 의한 극단적인 선택, 타의에 의한 생의 마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임계점을 맞은 폭력에 피해자가 가해자로 변질되기도 한다.

그 임계점을 좀더 일찍 인식한다면 비극을 막을 수도 있다. 한번 맞았을 때 문제제기가 이뤄지고 가해자가 법적·사회적 처분을 받는다면 임계점은 ‘한번의 폭력’이 된다. 반면 방치와 무관심으로 비극이 발생하고서야 겨우 문제제기가 되거나 해결에 나선다면 임계점은 ‘극단적 결과’로 이어진다. 그렇게 사회적 문제나 현상에 대한 임계점은 하기에 따라 앞당길 수도, 늘리거나 감출 수도 있다.

비극을 맞이하고서야 아이의 이름을 ‘언급할 자격’을 떠올리게 되는 아동학대를 비롯한 각종 가정폭력, 여성·약자에 대한 폭력에 대한 임계점은 빠르면 빠를수록, 앞당기면 앞당길수록 좋다.

허미선 문화부장 hurlkie@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