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100] 잃어버린 얼굴 닮은 ‘달항아리’…‘나’에서 시작하는 역사의 아름다움

허미선 기자
입력일 2020-06-30 17:00 수정일 2020-06-30 14:22 발행일 2020-07-01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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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항아리의 매력은 사람을 닮았다는 거예요. 사발 두 개를 연결해서 만드는 형태라 좌우대칭이 정확하지 않죠. 겉 표면은 매끄럽지도, 티끌 하나 없지도 않아요. 불완전한 듯 완전해 보이는 순백, 아름다움의 느낌이랄까요.”

조영지 작가는 자신의 첫 출간한 그림책 제목과도 같은 ‘달항아리’에 대해 “사람을, 특히 우리네 할머니,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했다. 고귀하게 쓰이라고 태어나 모진 풍파에 상처 입고 닳아 그 가치를 더한 달항아리, 겨울을 이겨내고 단단한 껍질을 깨고 새하얗게 꽃을 피우는 목련은 그렇게 사람을 닮았다.

“펑퍼짐한 치마를 입은 할머니를, 새 하얀 저고리를 입은 할아버지를 닮은 느낌이에요. 새 하얀 표면의 얼룩, 상처들이 마치 엄엄한 역사를 지내온 할머니를 닮아서 더 아름답고 친근하게 느껴져요.”

달항아리
달항아리 | 조영지 지음(사진제공=다림)

그림책 ‘달항아리’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6.25, 이념전쟁 등으로 치닫던 시대를 관통한 억척네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한 책이다. 

화자(話者)는 달항아리다. 억척네가 일본인 지주 집의 식모로 일하다 만난 달항아리는 해방일에 일본인 지주가 허겁지겁 도망을 가던 가운데 버려진 것으로 억척네가 “품어들었다.”

목련이 흐드러지게 꽃을 피워 올리기도 했던 달항아리에는 감자와 쌀로 채워져 산에 묻혔고 총소리와 함께 나타나는 북한군들, 미군과 경찰들 등에 의해 비어갔다.

“달항아리는 억척네가 일본인 지주 집에서 일하면서 귀하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아이들의 미래와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된다는 걸 알았죠. 전쟁 때 그 달항아리 만큼 귀한 식량을 담아 산에 숨겨요. 감자랑 쌀은 아이들과 억척네의 목숨인 거죠. 국군, 미군, 북한군에 의해 그 목숨이 줄어들고 결국 비어가는 달항아리에 비유해 할머니의 고통을 상징화했죠.”

계속되는 총성과 이별, 달항아리가 전하는 억척네의 이야기는 그 시절을 살아낸 우리네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이다. 이는 아버지에게 전해들은 조영지 작가 조부모의 실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전쟁, 국가형성 초기 등에 많았던 민간인 학살에서 저희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 다 돌아가셨어요. 그때 두 분이 자식을 지켜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까, 자식을 남기고 가는 마음은 또 얼마나 안타까웠을까…그렇게 지키고 싶은 자손들이 달항아리처럼 모진 세월을 견디고 잘 살아 남아 있다고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저의 개인사지만 우리 역사 속 흔한 이야기죠. 지역이나 구체적인 사건 등을 넣지 않았는데 보편성을 가지기를 바랐고 모든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위로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는 억척네의 얼굴이 한번도 드러나지 않은 이유기도 하다. 조 작가는 “저는 할머니, 할아버지 얼굴을 모른다. 연좌제가 있어서 돌아가시고 나서 증조할아버지께서 모든 사진을 불태우셨기 때문”이고 전했다.

달항아리
‘달항아리’의 조영지 작가(사진=조영지 작가 본인 제공)

“저는 흔적이 지워진 사람들의 자손이에요. 기억하지만 얼굴은 모른 채여야 한다는 사실이 슬펐죠. 더불어 전쟁의 주체, 학살의 주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당신들 때문에 우리는 할머니, 할아버지 얼굴도 모른 채 살아왔다고.”

책은 봉우리로 시작해 활짝 핀 목련으로 마무리된다. 조 작가는 “목련은 겨울을 보내고 피는 꽃”이라며 “겨울눈이라는 게 있어서 단단하다. 솜털이 있는 표면으로 겨울을 나고 꽃을 피워낸다”고 설명했다. 때 타지 않은 흰색의 달항아리의 처음처럼 눈부신 꽃을 피우지만 이내 시들고 상처로 얼룩진다.

“목련이 필 때는 다들 눈 같고 아름답다고 하면서 지는 모습에 손가락질을 하는 걸 보면 짠하고…시든 목련 꽃을 모으기도 했어요. 겨울을 이겨내는 단단함을 가진 꽃이고 형태 자체도 달항아리를 닮았죠. 목련은 굉장히 단단하고 아름답고 화사하며 고귀해보이죠. 달항아리도 왕실의 금사리 가마터에서 만들어진 고귀한 존재예요.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누구나 아름답고 고귀하게 태어나 세월이 흐르면서 상처로 더 단단해지고 아름다워지죠. 아름다운 목련으로 가득 채운 달항아리처럼요.”

이에 조 작가는 달항아리를 투명하게 표현해 “달 같은 은은함을”, “귀하게 쓰라고 고급스럽게 만들었지만 모진 풍파에 생겨난 표면의 상처, 얼룩처럼 사연 많고 상처 많은 사람을” 투영했다. 조영지 작가는 역사 교육의 중요성을 전하기도 했다.

달항아리
달항아리 | 조영지 지음(사진제공=다림)

“우리는 역사를 공부할 때 시간 순으로 무조건 외우곤 하죠. 하지만 역사는 우리 삶에 녹아 있어요. 역사를 이념전쟁, 거시적 사건의 배열로만 구성하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할머니, 할아버지가 겪은 경험, 잊혀진 사람들 개개인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들의 삶이 역사거든요. 우리에게 있었던 이야기를 할머니, 할아버지가 들려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우리 역사를 이분들의 얼굴, 복장, 언어 등으로 남겨주고 싶었어요.”

일제강점기부터 국가형성 초기까지를 다룬 ‘달항아리’는 그림책이지만 아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역사가 아이들만 공부해야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야기이며 그들의 아이들,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함께 보며 이야기를 듣고 대화를 나누는 ‘교류’ ‘소통’의 시작점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 이하 코로나19)로 가족이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서로에게 말을 걸고 새로운 대화를 만들어내는 데 그림책이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해요.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이 작가는 왜 달항아리를 투명하게 그렸을까, 왜 목련일까, 달항아리는 누가 썼던 물건인가, 전쟁 때는 어떻게 살았나 등 얼마든지 질문을 던지고 이야기가 뻗어갈 수 있거든요. ‘달항아리’가 그런 시작점이 되면 좋겠어요.”

이어 조영지 작가는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야기처럼 주변에서 시작해 친근해지고 다가가갈 수 있는 역사, 교과서나 미디어가 아닌 ‘나에서 시작하는 역사’가 중요하다”며 “어르신들에게는 위로가 되면 좋겠다”고 털어놓았다.

“마스크를 하지 않으면 이겨내지 못하는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우리는 서로 돕고 배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배웠어요. 생각보다 우리가 잘하고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죠. 상처는 힘들죠. 잘 아물 수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상처로 더 아름다워지는 달항아리, 목련처럼 우리는 더 단단해질 거예요. 코로나19도 그렇게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