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100] 마땅히 들려야 하고 보여야할 것들에 대하여…연극 ‘흑백다방’

허미선 기자
입력일 2020-04-15 14:30 수정일 2020-04-16 09:33 발행일 2020-04-16 13면
인쇄아이콘
[Culture Board]차현석 작·연출의 2인극 '흑백다방' 5.18 소재 윤상호와 김명곤 출연
17일 세종문화회관 '힘내라 콘서트' 온라인 생중계, 22일부터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오프라인 공연으로 관객 만나
에든버러 3년 연속 초청, 영어 버전 ‘Black And White Tea Room-Counsellor’ 공연되기도
BWCoffee
연극 ‘흑백다방’ 공연장면(사진제공=극단 후암)

1980년 광주. 치열했고 끔찍했던 5.18 광주민주화항쟁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났던 중년 남자와 젊은 남자가 20년이 흐른 후 재회한다. 1980년에서 20년이 흐른 후 부산 남포동의 한 다방에서 카운슬러와 상담자로 재회한 두 사람이 풀어가는 연극 ‘흑백다방’이 온라인 스트리밍과 오프라인 공연으로 동시에 관객들을 만난다.

‘흑백다방’은 차현석 작·연출이 이끄는 극단 후암의 대표작으로 2014년 제14회 2인극페스티벌 공식참가작으로 시작해 꾸준히 공연되며 사랑받았다.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는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초청돼 영국배우들과 함께 한 영어 버전의 ‘블랙 앤 화이트 티룸-카운슬러’(Black And White Tea Room-Counsellor)를 선보이기도 했다. 뉴욕 브로드웨이 러브콜을 받는가 하면 독립영화화를 진행 중인 작품이기도 하다.

흑백다방포스터
연극 ‘흑백다방’(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상담이 이뤄지는 흑백다방의 주인인 중년 남자는 전직경찰이자 심리상담사로 꽤 이름을 알린 인물이다. 1년에 단 하루, 지병으로 세상을 먼저 떠난 아내의 기일에만 다방 문을 닫는다.

그 쉬는 날 서울에서 찾아와 상담을 부탁하는 젊은 남자는 어딘가 부산스럽다. 과거를 잊은 채 20여년을 흘려보낸 중년 남자의 기억과 죄책감을 두들겨 깨우는 젊은 남자는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분노와 불안감을 여과 없이 표출하는가 하면 내지르듯 대사를 반복한다.

반면 중년 남자는 생각과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 침묵과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일관하며 젊은 남자가 스스로의 이야기를 하도록 이끈다.

상반된 두 사람의 태도와 빗소리, 관객들 눈앞을 가로지르지만 눈에는 직접 보이지는 않는 낡아버린 커다란 수족관, 턴테이블이 돌지만 들리지 않은 LP판 소리, 오래된 괘종시계 등은 침묵과 정적을 만들고 극도의 긴장감과 공포를 조성하는 극적 장치다.

극의 중반부터는 반대의 태도로 돌변한다. 잊은 줄 알았던 과거를 떠올린 중년 남자는 위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젊은 남자는 소리도 내지 못할 정도의 공포로 울음마저 내뱉지 못한다. 그렇게 두 사람이 재회한 다방 안팎에서 마땅히 들려야할 소리가, 보여야할 것들이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데서 작품은 관객들이 생각하고 상상할 여지를 창출하며 주제에 깊이를 더한다.

20년 전 충실한 공권력의 수행자였던 중년 남자, 그 폭력 아래 많은 것을 잃었고 그 후로도 오래도록 신음했던 젊은 남자. 20년 후 만난 두 사람은 반전과 반전, 또 다른 반전을 거쳐 지금의 사람에겐 산울림 노래로 더 잘 알려진 노고지리의 ‘찻잔’으로 마지막을 맞는다. 마지막에 함께 부르는 노래는 극 내내 표출되던 대립과 충돌, 회한과 부끄러움, 침묵으로 일관하던 비겁함 등을 인정하고 그제야 대화가 시작됐음을 알린다.

화해와 동시에 “이제 시작”이라고 말하는 듯한 마지막에 극의 소재인 5.18 민주화항쟁 뿐 아니라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팽목항 바다 깊숙한 곳에 침몰돼 있는 세월호 참사의 진실, 위계에 의한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 늘 불씨가 남아 있는 블랙리스트 등 대한민국을 아프고 분노하게 했던 사건들이 떠오르는 것은 그래서다. 

WBCoffeepage
연극 ‘흑백다방’(사진제공=극단 후암)

차현석 작·연출이 “절대 섞일 수 없는 검은 색 커피와 백색 설탕의 달콤하고 쌉싸름한 맛이 이 시대와 닮았다. 오늘날 사회를 완전히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서로 섞여 살고 있는 게 삶의 본질”이라고 소개한 ‘흑백다방’은 마땅히 들려야 하고 보여야 할 것들에 침묵하고 눈 감고 있지는 않은지, 마지막까지 남겨진 두 개의 찻잔으로 묻고 또 묻는다.

초연부터 함께 했던 윤상호가 젊은 남자로, 지난해 합류한 김명곤이 다방주인으로 출연한다. 배우들이 실제 자신의 이름으로 출연하며 현실감을 더하는 연극 ‘흑백다방’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4월 22~26일)에서의 오프라인 공연 뿐 아니라 세종문화회관의

무관중 생중계 공연 프로젝트 ‘힘내라 콘서트’ (이하 힘콘, 17일 오후 7시 30분)에서도 만날 수 있다.

‘힘콘’은 세종문화회관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 사태로 무대에 오르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공연들을 선정해 지원하는 무관중 생중계 공연 프로젝트다. 3월 31일 ‘오페라 마티네-오페라 톡톡 로시니’로 시작한 ‘힘콘’에서는 ‘흑백다방’과 더불어 뮤지컬 ‘은밀하게 위대하게: The Last’ 토크콘서트(16일 15시), ‘사춤2: 렛츠댄스 크레이지’(17일 15시), 서울시무용단의 ‘놋’(N.O.T, 17일 17시)이 네이버TV를 통해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된다.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