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아는 만큼 보인다②] 왕자의난부터 일제강점까지…곳곳에 새겨진 왕조의 아픔

최은지 기자
입력일 2016-09-14 07:30 수정일 2016-09-14 07:30 발행일 2016-09-13 12면
인쇄아이콘
덕혜옹주 등 조선 왕조 마지막 거처 '낙선재'
Untitled-8
덕혜옹주를 재조명한 영화 ‘덕혜옹주’.(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소설, 영화 등으로 재조명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는 한국에 돌아와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싶습니다 / 대한민국 우리나라”

그녀가 오래 살고 싶어한 낙선재는 바로 창덕궁에 있다.

창덕궁은 1405년(태종 5년) 이궁(離宮)으로 완공한 이후 1989년 덕혜옹주가 숨을 거두기까지, 조선왕조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궁이다. 함께한 역사가 긴 만큼 왕조의 아픔이 서린 곳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DSC_3359
창덕궁 인정전.(사진=김성욱 기자)

창덕궁을 지은 배경도 조선에 처음으로 불어닥친 피바람에서 시작됐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면서 도읍인 한양에 건립한 경복궁, 그곳에서 후계자 자리를 놓고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다섯째 아들 방원이 권력을 잡은 이후 2대 임금으로 오른 방과(정종)는 왕자의 난을 잊고 싶은 나머지 개경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후 2년 만에 3대 임금(태종)은 다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도 자신의 과오는 잊고 싶었는지 경복궁을 피해 그 동쪽에 창덕궁을 지었다.

창덕궁은 임진왜란이 발생하면서 불에 타는 고통도 겪었다.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례 일본의 침입이 이어지는 동안 창덕궁을 포함한 한양의 모든 궁이 화재로 소실됐다.

광해
영화 광해.(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1609년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야 완전히 복구가 된 창덕궁은 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의 뒷모습도 기억하고 있다.

광해군의 반대 세력인 서인이 어린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대비를 궁에 구금하는 등의 태도,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취한 실리외교 정책 등을 문제 삼아 1623년 4월 11일 반정을 일으켰다. 창덕궁으로 몰려온 반정세력에 놀란 광해군은 후원 문을 통해 의관 안국신의 집으로 피신했지만 바로 붙잡혀 강화도로 유배됐다. 광해군의 빈자리는 능양군 이종(인조)의 차지였다.

이 반정 과정에서도 창덕궁 대부분이 소실돼 1647년(인조 25년)에 복구가 완료됐다.

폭군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도 창덕궁에서 발생한 일이다.

1506년(중종 1년) 이조참판 성희안, 중추부지사 박원종 등 훈구파 세력이 중심이 돼 중종반정을 일으키면서 연산군은 창덕궁에서 쫓겨나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됐다. 그는 폐위된 뒤 두 달 만에 역병으로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DSC_3380
창덕궁 대조전의 모습. 서양식 가구 하나가 살짝 보인다.(사진=김성욱 기자)

왕과 왕비의 침전인 창덕궁 대조전에서는 일제강점기라는 치욕적인 역사가 시작됐다. 1910년 대조전에서 열린 마지막 어전회의에서 ‘한일합병’이 결정된 것이다.

이후 1917년에 발생한 화재로 앞에 있는 희정당과 함께 불에 타 3년 뒤에 재건됐다. 희정당과 대조전은 비교적 최근에 다시 지어졌기 때문에 서양식 현관이나 화장실, 욕실을 갖췄고, 내부에도 서양식 가구를 갖추고 생활했다.

DSC_3447
창덕궁 낙선재.(사진=김성욱 기자)

일제강점기, 몰락한 왕족의 무기력한 여생도 창덕궁에서 이어졌다.

영친왕 이은과 그의 아내 이방자(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여사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생활하다 각각 1970년, 1989년 세상을 떠났다.

낙선재에서 살고 싶어 했던 덕혜옹주는 1962년 1월 26일 귀국해 낙선재에 딸린 수강재에서 생활하다가 1989년 별세했다.

600여년이나 지속된 흥망과 희로애락의 역사를 곱씹으며 걸어보자. 창덕궁의 아름다움이 보다 깊이 있게 다가온다.

최은지 기자 silverrat89@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