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이정현,"배우로 상 받는 건 20년 전"

이희승 기자
입력일 2015-08-13 18:00 수정일 2015-08-13 18:49 발행일 2015-08-13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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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만나고 싶어 15살에 '꽃잎'오디션 봐
극중 수남의 촌스러움 위해 직접 의상 공수 해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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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와 광기를 오가는 수남 역할로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 출연한 배우 이정현.(사진제공=영화 홍보사 카라멜)

한마디로 ‘신들린 연기’였다. 본인 스스로는 ‘미친 연기’란다. 영화 ‘꽃잎’은 가수가 되고 싶었던 열다섯 소녀를 ‘배우의 길’로 이끌었다. 데뷔하자마자 1996년 청룡영화제 신인상을 거머쥔 이정현. 20대는 테크노 여전사로 보내고 30대에는 중국와 아시아 시장에 진출하며 바쁘게 살아왔다.

단편영화 ‘범죄소년’으로 해외 영화제를 섭렵하기도 했고 국민 예능으로 안방 극장을 초토화 시키기도 했다. 이제 30대 중반의 이정현은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로 대중들의 취향 저격에 나섰다. 이 영화에서 이정현은 생활의 달인으로 순수하면서도 괴기한 극단의 감정선을 오간다.

“읽자마자 1시간도 안돼 하겠다고 나선 작품이에요. 인연이 참 신기한 게 저에게 시나리오가 먼저 왔는데 회사측에서 저에게 말도 안하고 돌려 보냈더라고요. 그걸 우연히 박찬욱 감독님이 보시고 저를 추천하니까 감독님이 ‘퇴짜 맞았다’고 하더래요. 그래서 직접 구해다 읽었죠.”

거장 감독의 추천이 아니었더라도 출연했을거냐는 물음에 이미 자신에게 왔었던 작품임을 강조하는 이정현의 모습에는 극중 수남의 모습이 자주 스쳤다. 억척스럽지만 순수한 캐릭터의 완성은 아마도 이정현이 가진 예의바름과 여린 마음에서 시작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손으로 하는 건 뭐든 잘 하는 캐릭터인 수남은 ‘열심히 살면 복이 온다’는 진리를 종교처럼 믿는 인물이다. 1년만에 각종 자격증을 14개나 딸 정도로 잘나가는 실업고등학교의 모범생에서 한 순간에 귀 안 들리고 손가락이 잘린 남편을 둔 억척녀가 된다. 수남은 신문배달과 생선 내장 제거, 아파트 청소, 명함 돌리기 등을 하며 생활비를 번다.

“제 인생에 있어서 앞으로 못 만날 캐릭터라 돈 생각도 안 났어요. 노개런티가 너무 강조되서 한편으로는 걱정이에요. 모든 스태프들이 정말 즐겁게 모여서 재능기부식으로 만든 건데 저만 그런 것처럼 보도됐잖아요. 저는 그냥 수남의 비상적일만큼 맑고 순수한 영혼이 좋았어요. 오죽하면 4~5살 조카들의 글씨체를 다 따라했겠어요. 조카들이 가진 순진무구함이 바로 수남일 거라고 생각했죠.”

끝이 독특하게 꺾이는 한글 모양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가 가진 ‘필수불가결한 살인’과 더불어 묘한 공포감을 자아낸다. 자신의 평소 글씨를 버리고 모양을 연구해 현장에 왔을 정도로 이정현에게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소중하고 각별했다.

동갑 감독에게는 존경과 더불어 남다른 아이디어로 소통에 나섰다. 애초 설정된 캐릭터가 꽃무늬에 열광하는 ‘소녀’ 콘셉트였는데 작고 마른 이정현에게 꽃무늬 옷을 입히자 일본 여배우 아오이 유이의 청초한 분위기가 연출됐던 것. 과감히 반기(?)를 든 이정현은 “목에는 머플러를 두르고 조끼 스타일의 솜 점퍼를 입자”고 말해 시장에서 직접 의상을 공수해 수남을 연기했다.

영화 속에서 80평에 달하는 대저택을 단 2시간만에 끝내는 청소 실력 역시 실제 그가 가진 기술이다. 야무지고 꼼꼼하게 닦는 그 손놀림은 평소에도 청소에 집착하는 자신의 모습을 고스란히 옮겨 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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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작을 고르고 있는 이정현은 남자 배우에게 묻혀가는 역할이라도 “자신있다”며 미소지었다.(사진제공=영화 홍보사 카라멜)

이정현은 “유리창 닦는 신은 속도를 빨리한 게 아니라 실제 제가 닦는 속도예요. 손가락을 튕겨 명함을 꽂는 것도 자주 보는 프로그램인 ‘생활의 달인’을 보고 배워 직접 할 줄 안다”고 말했다.

틈과 틈 사이에 정확히 꽂히는 이 전매특허 기술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반전이기에 더 이상의 설명을 생략한다.

“가장 어려웠던 게 의외로 스쿠터를 타는 신이였어요. 자전거도 못 탔는데 이 영화를 계기로 배웠다니까요. 그리고 나서 바로 갈아탄 게 스쿠터이니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4발 자전거를 떼자마자 오토바이를 몬 건 제가 최초가 아닐까 싶어요. 상 욕심이요? 데뷔 20년 동안 연기로 탄 상이 한개 밖에 없는데 이 영화로 받았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딸 넷 중 막내인 이정현이 요즘 꽂힌 건 ‘행복한 가정’이다. 더 늦기 전에 아이를 낳고 싶은 바람이 크기 때문이라고.

고작 대여섯 살부터 마이크와 춤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던 그는 서태지를 보고 싶어 영화 오디션을 봤고 배우가 되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20년 가까이를 연예인으로 살았지만 이제 그 꿈도 접을 때가 된 것 같다고 미소지었다.

“10대때 (서)태지 오빠를 만나려고 남자친구도 안 만들었어요. 이제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셨으니 저도 다른 남자를 알아보고 있어요. 요즘엔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그렇게 멋지더라고요. 너무 눈이 높아 시집 가기 힘들까요?”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