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경성학교' 세 가지 색 RED 인터뷰 ①] ‘진짜’ 레드 엄지원, '처음 투성이' 영화 '경성학교'

허미선 기자
입력일 2015-06-20 14:40 수정일 2015-06-26 18:46 발행일 2015-06-20 99면
인쇄아이콘
세가지색레드2
브릿지경제 허미선 기자 = 새빨간 립스틱과 소녀들을 묘하게 바라보는 눈빛…. 오랜만의 여자들 영화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이하 경성학교)에서 엄지원은 낯설다. 그리고 신선하다.

마냥 순둥이거나 주책이거나 맹한 백치미를 뽐내는 캐릭터를 주로 연기하던 엄지원의 ‘가나에 교장’은 스산하고 표독한 매력을 발산하는 인물로 영화 속 미스터리와 공포의 근원이다.

영화 속에서 두드러지는 색채는 ‘레드’다. 그 중 엄지원은 성숙하고 욕망으로 불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원색에 가까운 레드다. 스타일리스트들이 집안 서랍 속에 방치되던 빨간 립스틱을 모두 가져다 안길 정도로 그녀는 한껏 치장하는 생애 첫 경험을 했다.

“바로 전 작품이 ‘소원’이었어요. 헤어, 메이크업하는데 5분도 안걸렸었는데…이번 작품에서는 3시간씩이나 걸렸죠. 시대물의 매혹적인 클래식 스타일링이 재밌었어요. 우아하고 섹시하게, 교장의 여성성이 부각되면 좋겠다 했죠.”

무채색이었던 초반 교장의 의상은 탐욕과 욕망으로 불타오르는 막바지로 내달릴수록 원색에 가까워진다. 립스틱 색 역시 보다 선명해진다. 여배우로써 언제 또 올지 모를 아름답고 섹시한 매력을 발산하는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는 엄청난 고통도 뒤따랐다.

촬영이 있는 날이면 새벽 5시에 현장에 도착해 분장차에서 3시간을 버텨야 했다. 박보영, 박소담 등 소녀들이 끊임없이 오가며 스타일링을 받는 걸 지켜보는 3시간 역시 그에겐 색다른 경험이다. 그렇게 ‘경성학교’는 엄지원에게 ‘처음 투성이’ 영화다.

◇농담도 진짜로 만드는 신뢰, 이해영 감독
경성학교: 영화스틸컷21
농담반 진담반으로 “교장은 내가 할게”라는 엄지원의 말에 진짜 대본을 쓰기 시작한 이해영 감독에 엄지원은 기꺼이 조연을 감수하는 것으로 답했다.(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악역을 애써 찾은 건 아니었어요. 농담반 진담반으로 ‘소녀하고 싶지만 안되니까 교장 내가 할게요’라고 했더니 진짜 쓰셨어요.”

엄지원에 대한 이해영 감독의 믿음은 슬쩍 농처럼 던진 그녀의 말에 진짜 ‘엄지원=교장’으로 인식하고 대본을 쓰게 했다. ‘페스티발’을 함께 했던 이해영 감독에 대한 엄지원의 신뢰는 “조연은 안된다”는 회사의 만류에도 기꺼이 출연할 정도다.

“악연은 한번도 안해본 거라 재밌게 풀 수 있는 여지가 있겠다 싶었어요. 그리고 이걸 보여주면 다양한 모습의 책(시나리오)을 보내주지 않을까도 생각했죠.”

그리고 그는 꽤 훌륭하게 첫 악역을 소화했다. 소녀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니 가나에 교장의 감정이 다소 불친절하게 표현되고 폭발하기도 했지만 ‘엄지원’의 또 다른 가능성을 엿보기에는 충분했다.

“저도 아쉽긴 하죠. 완성체로 평가받아야 하니 가끔은 자막을 쓰고 싶기도 해요. 저 장면을 찍을 때는 감정을 몰입할 시간도 안주고 촬영을 진행해야 했어 혹은 저 때는 40시간을 못자서 얼굴이 부었어…뭐 그런 식이요. 하지만 많은 것들을 조합할 수 있는 소스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게 배우잖아요. 그 역할에 충실했으니 그 자체로 평가받아야죠.”

‘경성학교’에서도 결국 완성돼 스크린에 담긴 가나에 교장으로 평가받아야하는 것이 배우의 숙명임을 엄지원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녀를 과학자라고 생각했어요. 비상하리만치 똑똑한 여자였죠. 심지어 일본어와 조선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잖아요. 여자가 직업을 가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시대를 만나 잘못된 열망과 욕망으로 분출된 거죠.”

조선 땅에서는 허용될 수 없는 여성의 자아실현을 일본에서 하고 싶었던 여자, ‘경성학교’ 속 교장은 엄지원의 분석대로 1938년 조선의 수동적인 여성과 나약한 조국의 투영이었다.

◇완벽한 일본어, 한껏 활용한 비음, 촘촘한 캐릭터 설계도
7
엄지원 능숙한 일본어 연기를 위해 일드를 정주행했다. 그러던 중 새삼 깨닫게 된 기무라 타쿠야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며 웃는 그녀는 여전히 소녀다.(사진제공=채움엔터테인먼트)
“캐릭터의 설계도를 촘촘히 그리는 편이에요. 발톱을 숨기고 있다가 훅 드러나는 용상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어떻게 설계할까를 고민했죠.”

하늘하늘한 베이지에 어두운 무채색 의상, 점점 짙어지는 입술 색은 물론 한껏 히스테릭해지는 순간에 로브를 입으면 좋겠다고 제안한 이도 엄지원이다.

“이번엔 제가 잘 쓰지 않는 비음 톤도 잘 활용하면서 감정을 표현했어요. 속삭이듯이 얘기하고 춤추듯 연기할 거라고 혼자 그림을 그렸죠. 그 과정들이 재미있었어요.”

덕분에 엄지원은 늘 자제하던 그녀 본연의 비음을 한껏 쓸 수 있었다. 이 역시 배우 생활 중 처음이다.

“교장은 광기어린 열정이 넘치고 100% 주는 여자였지만 한번 돌아설 때는 냉정한 캐릭터예요. 수술하는 의사처럼 깊이 들어가 깨끗이 절단하는 여자죠. 감정은 힘들었지만 다양한 감정을 연기할 수 있어 즐거웠어요.”

엄지원은 욕심이 많기로 유명한 배우다. 첼리스트로 등장하는 ‘주홍글씨’ 촬영 당시에는 진짜 첼리스트로 보이고 싶어 연습에 매진했다. ‘경성학교’에서도 그는 완벽한 일본어를 구사한다. 이를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일드 정주행’이었다. 아침 9시부터 새벽까지 유명한 일드란 일드는 모두 정주행했다.

“현장에 일본어 선생님이 계셨지만 감정적인 연기까지 그분이 해줄 수는 없잖아요. 일어로 감정연기를 어떻게 하는지 보고 싶었어요. 실제로 많은 도움을 받았죠.”

이에 일본어 연기를 할 때는 엄지원이 먼저 감정연기를 하고 일본어 전문가가 틀린 발음만 잡아주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그렇게 일드 정주행으로 완벽한 일본어 연기를 할 수 있었고 정주행한 일드 중 ‘러브제네레이션’, ‘히어로’, 서머배케이션‘ 등 다수 작품에 출연한 기무라 타쿠야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어떤 연기를 하는 배우인지 몰랐는데 왜 인기가 있는지를 알겠더라고요.”

뒤늦게야 빠져든 일본 배우에 대해 이야기하며 소녀처럼 웃는다.

◇뿌듯했던 소녀들과의 만남, 고독 그리고 차기작
경성학교: 영화스틸컷34
‘경성학교’는 엄지원에게 여러 가지로 처음을 많이 선사한 작품이다. 첫 악역, 여배우로써 한껏 치장할 수 있는 첫경험, 남자들 사이에서 하나의 오브제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됐던 첫 영화 그리고 어린 후배들과 함께한 첫 작품이다.(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저는 보영이랑 함께 해서 너무 좋았어요. 걔는 어쩜 사탕을 그렇게 먹어요? ‘나 건강해진 거 같아’ 하는데도 너무 예쁜 거예요. 그리고 유카(공예지)가 나무에 매달리는 장면은 기괴했지만 처연하고 아름답고…제일 예뻤어요.”

첫 악역, 여배우로써 한껏 치장할 수 있는 첫 경험, 남자들 사이에서 하나의 오브제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됐던 첫 영화 등 ‘경성학교’는 엄지원에게 ‘처음’ 투성이다. 늘 선배들과 작업을 하다가 어린 후배들과 함께한 첫 작업이기도 했다. 스스로에겐 엄한 그에게 후배들은 마냥 예쁘고 대견하기만 했다.

박보영은 “현장에 엄지원 선배가 나오시는 날이랑 그렇지 않은 날은 너무 달랐다. 선배가 계신 날은 뭔가 편안하고 순조로운 느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교실에서 바라보는 20여명의 소녀들은 진짜 귀엽고 예뻤어요. 하지만 연기적 소통은 없으니 홀로 떠있는 섬처럼 고독하고 외로웠죠. 하지만 그 고독이 가나에의 감정과 맞물려 더 그렇게 느낀 것 같아요.”

가나에의 그 고독과 안쓰러움에 빠져 한동안 눈물로 시간을 보냈던 엄지원은 이제 새로운 작품 속 인물을 연구하고 설계도를 그리는 중이다. 손현주와 함께 할 ‘더 폰’은 타임슬립 스릴러다. 1년 전 죽은 아내에게서 걸려온 전화, 현재와 과거를 오가다 시간이 공존하는 순간들이 얽히기도 하는 미스터리를 담는다.

“이 작품도 만만치가 않아요. 전화로만 연기를 하려니 정말 힘들어요. 하지만 정말 새로워요. 힘들지만 묘한 설렘과 정복하고 싶은 열정이 생겼죠.”

엄지원은 새로운 걸 하려면 늘 고난이 따른다는 걸 알고 기꺼이 감내하는 배우다. 그래서 고통을 감내하고 승부욕을 불태운다. 그렇게 엄지원은 ‘처음 투성이’였던 영화 ‘경성학교’를 보내려 노력 중이다.

글=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인포그래픽=이소연 기자 moomoo1828@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