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더컬처] 살 내음 진동하는 영화 '간신' 민규동 감독 "이 영화가 야한가요?'

이희승 기자
입력일 2015-06-03 09:00 수정일 2017-02-11 13:07 발행일 2015-06-03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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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과 욕망이야말로 제 영화적 영감의 원천이죠.”

스크린의 연금술사 민규동 감독이 영화 ‘간신’으로 돌아왔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실존했던 왕과 채홍사를 소재로 했지만 영화적 상상력은 기대 이상이다. 그는 왕을 쥐락펴락하는 신하와 음탕한 생활을 즐기기 위해 뽑힌 여성들에게 눈을 돌렸다.

영화적으로 너무 많이 다뤄진 연산군을 그리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양가집 규수부터 노비, 기혼녀까지 구분하지 않고 전국적으로 각출됐던 여성들의 시각을 다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간신’의 관심은 더없이 뜨겁다. 개봉 후 청소년관람불과라는 핸디캡에도 개봉 첫 주말 40만 관객을 불러모으는가 하면 역사적 고증에 입각한 영화로 문화와 역사 콘텐츠 분야에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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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규동 감독(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그는 “(채홍사는)피해자가 여성이었다는 것과 연산군이 한 가장 나쁜 짓이었다”면서 “어쩌면 역사는 철저히 왕의 시각으로 완성된 각본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과연 어떤 간신의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사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애초 15세용으로 쓰여졌던 시나리오는 민규동 감독에 의해 좀더 농밀한 남녀의 감정과 살 내음이 더해진 작품으로 완성됐다. 사극 영화 역사상 가장 수위가 높은 동성베드신이 등장하는가 하면 고전으로 전해 내려오던 방중술을 과감하게 되살렸다.

“성적으로 어필하려고 만든 영화는 아니에요. 생경하게 야한 건 단 한 장면도 없지 않나요? 저는 눈에 욕망이 있어야 야한 것 같은데 ‘간신’은 취향을 드러내는 리트머스 같은 영화일 뿐, 에로티시즘의 극치를 보여주진 않잖아요. 만약 그 부분을 강조하려고 했으면 더 잘 만들었을 거예요.” 그러곤 멋쩍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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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간신’의 한 장면.(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민규동 감독의 작품들은 가만히 들여다 보면 자존심 있는 레스토랑에서나 맛 볼 수 있는 프랑스 만찬이 떠오른다. 

오랜 시간 파리에서 영화 공부를 한 그는 인간의 엇갈린 감정과 사랑, 사회에서 금기되는 취향을 주 재료로 다양한 필모그래피를 채웠다. 

에로스 그 이상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오감도’와 다양한 커플들을 내세운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은 민규동 세계의 에피타이저라면 남성 동성애라는 쉽지 않은 소재를 발랄하게 그려낸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와 ‘내 아내의 모든것’은 가장 대중적인 메인 디시다. 

여기에 세 남녀의 금지된 사랑을 담은 ‘끝과 시작’, 옴니버스 공포영화 ‘무서운 이야기’ 시리즈는 색다른 디저트를 먹는 듯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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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숭재(주지훈)를 잡고 있는 연산군(김강우)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민규동 감독의 작품들은 한번 함께 한 배우들이 또다시 출연하는 공통점이 있기도 하다. TV의 남다른 아우라를 민 감독의 영화에서만 보여주는 천호진을 비롯해 주지훈은 데뷔작을 비롯해 ‘페르소나’로 불릴 만큼 여러 편의 영화를 함께 했다. 

김강우 역시 아내 홍지영 감독까지 합세해 두세 편의 영화를 함께 했다. 예민하고 까다롭기로 유명한 배우들을 매료시키는 감독인 셈이다.

“저만큼 배우에게 많이 거절 당한 감독도 드물거예요. 믿고 가는 배우들이 있긴 하죠. 그리고 (주)지훈이는 제 페르소나 아니예요. 그냥 첫 자식 같은 느낌? (김)강우는 워낙 욕심나는 배우였는데 ‘간신’에서 더 잘 해줬어요. 저는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여배우들이라고 생각해요. 분명 힘들만한 신들인데도 놀라우리만치 잘 해내더라고요. 역시 여자들은 위대한 것 같아요. 남성들보다 훨씬 우월한 존재!”

‘간신’의 하이라이트인 채홍사의 결승전은 왕이 미쳐있는 상태에서 두 여자가 엉켜있는 강렬한 신이다. 촬영만 이틀 내내 진행해 배우들이 막판에는 지쳐 쓰러져 전라의 몸을 가릴 생각도 못 할 정도였다.

민 감독은 “검투사들이 싸우는 극한의 모습을 그리고 싶어 여배우들을 끝까지 내몰았다. 롱테이크로 가서 수위가 꽤 높았는데 그건 아마도 감독판에서나 볼 수 있을 것”이라며 배우들의 호연이 가려진 아쉬움을 드러냈다. 

민 감독의 표현대로라면 뮤지컬 스타로 군림하다 첫 영화를 찍은 장녹수 역할의 차지연은 연산군에게 젖 물리는 장면도 거침없이 해냈으며, 설중매 이유영은 ‘제 2의 전도연’으로 칭할 만큼 될성부른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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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잠긴 장녹수(차지연)(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스스로를 준비되지 않은 감독이라 칭하는 민규동의 어린 시절은 자연과 자유로 정의된다.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산속 사택에서 지낸 유년시절은 개구리와 연못, 들판이 어우러진 방만함의 연속이었다. 호기심이 왕성해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려도 보고 치아가 6개나 부러지는 사고를 치는 개구쟁이였다. 

그는 “그 당시 유일하게 집에 있었던 책이 세계문학전집 30권짜리였다. 고전 문학을 통해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배웠다. 지금 생각해도 다행인 게 가끔 정말 멋진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뭔가 비슷하다 싶으면 거의 대부분 고전의 플롯을 차용한 것이다. 영상세대가 아닌 시절에 자란 건 천운”이라며 미소 짓는다. 

세계문학전집으로 배운 기승전결과 플롯을 31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비디오 카메라를 사서 찍기 시작하면서 풀어냈으니 영화에 대한 갈증과 상상력의 폭발은 어쩌면 당연하게 느껴진다.  

민규동 감독
민규동 감독(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그는 여전히 평소엔 빈둥거린다. 다음 작품을 만날 때까지 놀면서 차기작을 상상하며 쉬는 일상이 가장 행복하단다. 하지만 충무로에서 가장 영상미 뛰어난 영화를 만드는 비결에는 ‘생명을 불어넣고 싶은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영원히 살 수 있는 불멸의 방식에 관심이 많아요. 그건 아마도 가족이 될 수도, 영화일 수도 있겠죠. 다 제 새끼니까요. 아직도 저에겐 5년에서 10년 묵은 시나리오들이 많아요. 감독으로서 생명을 불어넣고 싶은 욕망이 크죠. 그래서 더더욱 제 다음 영화가 마음에 들 것 같아서 또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무미건조한 반응보다 이렇게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를 만드는 게 정말 좋다니까요.”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