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더컬처] 임권택 감독 "영화 속 오상무 같은 흔들림, 나라고 왜 없었겠나"

이희승 기자
입력일 2015-04-08 09:00 수정일 2017-02-11 13:11 발행일 2015-04-08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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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켜세워주는 건 좋은데 자꾸 ‘거장’이라고 하면 너무 경로 우대 같아서 다시 영화를 찍을 수 있으려나 싶어.”

이렇게 눙치다가도 “앞으로의 계획은 ‘전혀 임권택 같지 않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며 눈을 반짝인다. 다시 태어나도 영화일을 할거라고, 할 줄 아는 건 영]화 뿐이니 다시 치열하게 연출의 길을 걸을 거라 말하는 노장 감독의 어깨는 유난히 꼿꼿했다. 오는 9일 개봉을 앞둔 ‘화장’까지 53년동안 102편의 영화를 만든 한국 영화계의 거장 임권택(78)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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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9일 102번째 영화 '화장' 개봉을 앞두고 있는 임권택 감독은 "전혀 임권택 같지 않은 영화"를 목표로 한다.(사진제공=명필름)

◇“영화 ‘화장’의 오상무? 내 얘기가 아니라고는 말 못하지.”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 ‘화장’은 죽어가는 아내와 젊은 부하직원 사이에서 흔들리는 중년의 이야기다. 임권택 감독 특유의 한국적인 영상미와 내밀한 인간의 욕망이 화면 가득 뒤엉키며 묵직한 울림을 주는 수작이다.

제목 ‘화장’은 임권택 감독의 ‘인생 화두’나 다름없었다. 동음이의어인 화장(化粧)은 극중 화장품 회사의 중역인 오 상무(안성기)의 직업이자 직장 동료로서 끌리는 추은주(김규리)와 시체를 불에 살라 장사 지내는 화장(火葬) 상태의 아내(김호정) 사이에서의 번뇌를 뜻한다. 감독 임권택이 매일 겪는 일상에도 동료이자 내조자로서의 아내(채령)와 수많은 여배우들이 있었다.

“통 없었다고는 말 못하지.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게 힘든거지 사실…그게 사는 거 아니겠어요? 극중 아내는 남편의 흔들림을 잘 알아요. 죽은 뒤 별장으로 도착한 와인이 바로 그것인데, 실제로 나는 그런 챙김을 평소에도 받고 있어요. 감독으로 성공할 수 있게 과분한 지지를 받았지.”

1971년 영화 ‘요검’으로 처음 만난 여배우 채령과 임권택 감독의 만남은 당돌함과 아쉬움 그 자체였다. 당시 MBC 3기 탤런트 합격을 받아 놓은 상태였던 신인 여배우 채령은 영화의 몇 장면이 외설적이라고 출연을 꺼려했다. 신인답지 않은 까탈스러움이 마음에 든 임권택 감독은 괜히 티가 날까 연락처 한번 못 물어보고 헤어졌다 몇년 후 충무로 길거리를 걷다 재회했다.

“배우로서의 점수? 연기를 잘 한 건 아니었어요. 마음이 있어서 잘 설명해 줘도 못하더라고. 아내는 내 지적이 서운하고…. 서로 엇갈린 게 많았는데 그렇게 만나 긴 시간 함께 하면서 단 한번도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탓한 적이 없어요. 영화감독으로서 소신있게 살 수 있게 해 줬죠. 지금도 고마운 게 배우의 길을 걷는 아들의 뒤를 부탁하거나 지인들의 민원을 지금까지 안 한다는거야. 그랬다면 분명 고단했을 거예요.”

마흔 다섯, 늦은 나이에 결혼해 두 아들을 둔 임권택 감독은 누구보다 엄한 아버지였다. 하지만 요즘 그의 일상은 ‘손주바보’다. 3년 전 장남이 품에 안긴 손주 재롱에 시간가는 줄을 모를 정도다.

임권택 감독은 “둘째 아들은 나의 후광을 얻고 싶지 않다며 예명을 지었는데, 왜 하필 권현상인지…. 그래도 열심히는 하더라”며 흐뭇해한다. 대놓고 자식 자랑을 하진 않지만 ‘할건 하는’ 아들에 대한 묵뚝뚝하지만 속정이 느껴지는 이 시대 아버지의 모습이다.

◇“이번 영화만큼 흥행이 궁금한 영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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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자신있게 내놓은 영화를 꼽으라면 단 한작품도 없다"고 단언하는 그는 노장이 아닌 타고난 감독이다.(사진제공=명필름)

한국영화사를 대표하는 명감독이지만 임권택 감독은 자신을 ‘대표작이 없는 감독’이라고 부른다. 20대 초반 충무로에 입성한 후 감독이란 타이틀을 달고 찍은 초반 50편 영화들은 누구에게 내놓기도 창피한 ‘졸작’이란다.

너무 젊은 시절에 감독을 맡았기에 현장에서 중국집 배달을 시키면 아무도 감독인줄 몰라 단 한번도 자신 앞에 먼저 음식이 놓인 적이 없었다고.

“감독으로서 10편 정도만 찍으면 행복할 거라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100편을 찍고 있었어요. 게다가 지금은 거기서 몇 편 더 왔고. 적어도 ‘내가 흥행 3류 감독은 아니구나’란 자신감이 생긴 건 ‘잡초(1973)’때부터예요. 하지만 아직도 자신있게 내놓은 영화를 꼽으라면 단 한 작품도 없어요. ‘만다라(1981)’, ‘서편제(1993)’정도가 성에 좀 차는 정도지. 솔직히 달라지고 싶어서 ‘화장’을 선택했어요. 과연 2030세대가 내 영화에 공감할까란 궁금함에서 도전한 영화예요. 많은 사람들이 내 영화를 봤지만 젊은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본 건 아니니까.”

그런 의미에서 ‘화장’은 어느 작품보다 배우 욕심이 남다른 작품이었다.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흔들리는 욕망을 혐오스럽지 않게 표현하는 배우는 안성기가 유일했다. 임권택 감독과 안성기의 의기투합작은 언론에 알려진 것만 여덟 편. 아역 배우 시절부터 함께 한 것도 워낙 많기에 더욱 부탁하기가 미안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사랑보다 의리가 먼저인 아내의 병간호는 누가 봐도 짜증나는 상황이죠. 그걸 이성적으로 대처해 내는 오 상무는 안성기가 아니면 분명 ‘화장’의 인상이 확 달라졌을거라고 자신해요. 영화 엔딩에서 아내가 키우던 개를 안락사시킨 뒤 보여주는 표정 연기는 정말 압권이에요. 관객들이 그 장면을 잘 봐줬으면 좋겠어요.”

여러 번 퇴짜를 놓은 배우였지만 아내 역의 김호정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김호정이 노출을 감행하며 보여준 병실 화장실신이 살지 않으면 이 영화는 죽는다고 봤어요. 며칠이라도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2~3시간만에 연락이 와서 너무 고마웠죠. 사실감이 남다르다며 해외영화제에서 쏟아진 기립박수와 극찬에 이제 좀 미안함을 덜었어요. 정말 힘들었을텐데 베테랑답게 잘 해줬어요.”

그는 연신 ‘거장’이란 소리가 피곤하고 싫다고 잘라 말했다. 아직도 현업이라고,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도 피 토하고 열심히 찍은 감독의 자리를 지킬 거라고 했다.

“조명부터 편집, 음악까지 영화는 숭고한 작업의 연속이죠. 그래도 내뜻을 관철시키고 완성하는 기쁨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감당할 수 없는 소재만 아니면 언제든 도전할 생각입니다.” 그를 누가 노(老) 감독이라 말하는가. 그는 여전히 패기충만한 타고난 감독이다.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