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나도 국민 안 해!" 주민등록번호를 없애야 하는 이유

김종길 기자
입력일 2015-03-14 13:47 수정일 2015-03-15 12:46 발행일 2015-03-14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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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례 감독의 '남쪽으로 튀어'라는, 그리 많이 팔리지는 않은(83만명) 영화 속 배우 김윤석이 연기하는 ‘최해갑’은 다큐멘터리 연출자다.

항상 있어왔던, 이웃과의 시비로 인해 파출소에 끌려간 뒤 자신의 다큐멘터리를 언급하며 “이 긴 열 세 자리 번호를 어떻게 외우느냐”고 주민등록번호 무용론을 펼친다.

영화에서 사회 부적응자인 최해갑 가족은 결국 ‘그럼 나 국민 안 해’라며 결국 섬으로 들어간다.

주민등록번호 무용론이 다시 볼륨을 높인다.

개인정보보호범국민운동본부의 최근 주장이 들을만하다.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아이핀 해킹사태는 이미 전국민의 주민번호가 유출된 상황에서 그 도용된 주민번호만으로 아이핀 발급이 가능하도록 만든 현 시스템이 도발한 문제라는 것이고, 둘째는 인증값을 변조해 본인확인이 되지 않아도 발급될 수 있도록 해놓은 게 문제이니 시스템을 설계한 측이나 운영기관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부가 주민등록번호 제도 개편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민번호 사용국가는 전세계에서 10개국 정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는 네덜란드, 벨기에, 대한민국이 유일하고 중국은 열 네 살이 돼야 부여한다. 

출생과 동시에 번호를 부여하는, ‘천부인권’ 아닌 ‘천부번호’를 시행하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일부 저개발 국가 뿐이다. 

UN인권위원회조차 자연인을 상대로 정부가 임의의 번호를 부여하는 것은 반인권적이라며 시정을 권고한 바 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주민등록번호제도의 문제는 그 남용(濫用)에 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조차 경찰이 범죄수사용으로 쓸뿐 개인이 생활현장 곳곳에서 수시로, 마치 죄인이라도 된 마음으로 개인식별수단으로 의무 제공하는 경우는 없다.

결국 이같은 주민등록번호의 본질적 문제를 외면한채 잠시 우회하는 방식으로 미봉한 것이 아이핀이었다.

특히 이번 아이핀 해킹은 실상 아이핀 자체를 해킹한 것이 아니고 이미 해킹당한 주민번호를 가지고 해커들이 아이핀을 생성한 것이라는 데 문제의 본질이 있다. 

한 정보보안 전문가는 “아마 아이핀만 해킹당했으면 정부가 사과까지는 안 했을 것”이라며 “문제의 본질이 주민번호에 있다는 것을 정부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일단 이미 널리 퍼져있는 주민등록번호를 가지고 블랙 해커들이 공인인증서 같은 것을 훔쳐다가 아이핀을 75만개나 만들어냈다는 것은 정부도 자인한 사실이다.

주민등록번호는 1968년 북한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 이후 당시 박정희 정부가 방첩용으로 만든 것이다.

정부 입장에서는 매우 효율적인 국민 통치수단임이 증명됐고 오랜 시간 여기에 익숙해진 국민들이 별 거부감없이 사용해온 것이다. 

특히 김영삼 정부 시절 금융실명제 실시로 주민등록번호의 사용은 더욱 급증했다.

하지만 주민등록번호는 불필요한 거버넌스 기제(Governance Mechanism)일 뿐이다.

5년이나 10년마다 한번씩 바뀌는 여권번호로 모든 것이 가능한 미국에서 주민번호 같은 개인식별번호가 없어서 범죄가 증가한다던지 아니면 개인이 생활에 불편한 일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social security라 불리는 사회보장번호는 일반생활에는 쓰이지 않고 연금받을 때만 쓴다. 

영국은 범죄수사를 위해 30자리 세대번호를 쓰지만 오직 경찰만 사용하고 그 경찰은 해킹으로부터 안전하다.

그런데 주무부처라는 행자부는 효용도 적고 반인권적이며 보안도 취약한 이 제도를 바꿀 의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럴 권한도 없어 보인다.

지난해 카드3사가 무려 1억400만 건의 개인 신용정보를 유출한 사건이 있자 박근혜 대통령이 폐지를 포함해 주민등록번호 문제를 검토하라고 지시했지만 당시 유정복 장관이 인천시장 선거에 출마하고 또 당선되면서 결국 흐지부지됐다. 

최근 미래부가 주민번호 대신 생년월일만 기입하는 방식을 내놨지만 이것 역시 해결책이 못 된다. 생년월일과 이름이 결합되면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주민번호와 같은 위상과 위력을 갖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 주민등록번호에는 생일과 성별, 출생지와 신고지 등의 중요 개인정보들이 압축돼 있다.

그런 정보가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조작되고 변형돼 그들의 놀이 대상이 되고 심지어는 범죄에 악용되기까지 한다니 지금 국민들의 마음은 분노 아니면 체념이다. 

분노는 국민의 당연한 권리지만 문제는 체념이다. 국민의 개인정보조차 보호해주지 못하는 정부에게서 실망을 거듭하다 급기야 최해갑 같은, ‘국민이기를 거부하는 국민’이 증가한다면 이를 개인 탓으로만 돌리겠는가? 

과거처럼 국가의 권위 내지 이익을 개인의 권리보다 앞세우는 것이 꽤나 불편해지기 시작한 이 시대에 탈사회, 무정부를 꿈꾸는 제2, 제3의 최해갑이 늘어나는 것이 정부가 바라는 바가 아니라면 이 불쾌한 상황에 대한 책임은 결국 정부가 져야 한다.

김종길 사회부동산부 부장 kjk54321@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