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만 매만지면 안되지, 손님 맘도 어루만져야지"

조은애 기자
입력일 2015-03-12 09:00 수정일 2015-03-12 09:17 발행일 2015-03-12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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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잊은 사람들] 74세 현역미용사 권인숙 풀잎미용실 원장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서울화력발전소(당인리발전소) 앞, 2030세대의 눈길을 사로잡는 카페와 음식점이 즐비한 골목 한 가운데 자리 잡은 한 1인 미용실. 

요즘 홍대를 찾는 개성 있는 젊은이들은 웬만하면 1인 미용실을 간다지만 ‘풀잎미용실’이란 간판과 오래된 싸인볼에 어쩐지 내가 갈 곳은 아니라는 느낌이 풍긴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면 일흔 네 살의 깊은 관록이 느껴지는 할머니의 인상에 마음이 편해진다.

권인숙 풀잎미용실 원장
동네 친구이자 단골손님인 한 아주머니의 머리 손질을 하고 있는 권씨.

권인숙(74)씨는 40년 동안 미용사라는 직업을 꾸준히 이어온 국내 미용계의 산 증인이다. 50년 전 미용학교로 유명했던 서울고등기술학교에서 미용과를 다녔던 시기까지 친다면 50년의 미용사 경력을 갖고 있다.

“원래 고향은 개성인데 내가 어릴 때 부모님 손 잡고 남으로 피난을 왔어. 김포에 처음 살다가 안국동 정독도서관 근처로 이사를 갔고. 합정동으로 넘어온 지는 이제 30년이 조금 넘었네.”

◇서독 파견 대신 선택한 미용사

서울고등기술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중구 조선호텔 옆에 있던 미용실에 취직해 준디자이너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일을 한창 할 시기, 당시 주변 친구들이 서독으로 파견을 많이 갔다고 한다. 권씨에게도 서독으로 가자는 제안이 왔었다. 서울고등기술학교를 다니기 전에 간호고등학교에서 잠깐 공부했다는 이유로 같이 일하던 다른 언니가 제안했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간호사는 원장들의 자질구레한 개인 잡무까지 봐줘야 해서 힘들었어. 그래서 간호학교도 다니다가 그만둔 거였고. 서독에 가기보다 국내에서 미용사일을 계속 하기로 결정했어.”

종로 2가 아트미용실로 옮긴 권씨의 주 고객은 기생. 당시 미용실에선 머리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쪽에서 커튼을 치고 마사지를 하기도 했다. 주변에 요정이 많았던 이유로 주 고객은 기생들이었다.

“12시쯤에 기생들이 하나둘 들이닥치면 한두 시간 안에 모두 끝내줘야 해. 그 사람들도 피곤하니까 질펀히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고. 지금 예약하는 것도 아니니까 미용사가 알아서 이번엔 누가 들어올 차례라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어야 했지. 오후 3시부터는 유한마담들이 들어왔고. 당시 여자들은 대부분 육영수 여사처럼 업스타일 머리를 했어.”

권씨가 오래도록 미용사를 할 수 있던 원동력은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동료 언니들 덕분이었다. 아트미용실을 운영하던 두 언니는 늘 오후 7시 칼퇴근을 지키게 해줬고 가끔은 술친구로 한 잔 기울이기도 했다.

26~27세쯤 권씨는 아트미용실에서 현재 남편을 만났다. 보통 여성이 결혼을 하고나면 갖고 있던 직업도 그만둬야 했던 시대지만 권씨는 그만두지 못했다. 초창기 남편 사업이 잘 풀리지 않아 권씨가 돈을 벌어야 했던 것이다.

“결혼 전에 남편이 미용자격증도 다 찢어버리고 자기랑 결혼하면 나더러 일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3년 만에 남편 사업이 망해서 다시 가위를 들어야 했어. 생각해보면 오히려 난 다시 일을 해야 하는 운명이었는지도 몰라.”

다행히 권씨 남편은 이전 직장에 다시 복직됐고 권씨는 소일거리처럼 미용사일을 이어갔다.

권인숙 풀잎미용실 원장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풀잎미용실.
◇미용사, 사람 마음 헤아리는 직업

미용사라는 직업 특성상 사람들을 여럿 만나 한눈에 그 사람의 마음을 파악하기도 한다. 권씨는 미용사라는 직업이 단순히 머리만 매만지는 것이 아니라 손님의 마음도 파악하는 직업이라고 말한다.

“손님들이 와서 머리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동안 나는 그 사람 얼굴을 보면 그림이 나오더라고. 그 사람 기분이 어떤지 보인다는 말이야. 마음이 어둡다 싶으면 머리에 조금만 힘을 주려고 해. 울적한 손님이 있으면 파마를 하는 시간 동안이라도 마음을 녹여주고 싶어.”

이 미용실에는 단순히 아주머니 손님만 오는 것이 아니다. 권씨는 풀잎미용실에 다니는 한 대학생의 이야기를 해줬다.

“소심하고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것을 어려워하는 학생이 있는데 그 학생 이야기를 들으면서 머리에서 조금 자신감을 갖게 하고 싶었어. 처음 왔을 때 그 학생 이야기를 듣고 머리에 조금 힘을 줬는데 그 다음부터 계속 여기로 오더라고.”

작년에는 한 취업준비생이 와선 매번 자신이 면접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권씨는 한 시간 동안 학생의 이야기를 듣고 고민을 한 뒤 머리를 해줬는데 며칠 뒤 그가 다시 찾아와선 합격했다고 손을 부여잡고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고 말했다.

풀잎미용실은 여타 동네 미용실과 마찬가지로 동네 아주머니들이 들어와 수다를 떠는 사랑방이다. 몸이 쑤셔 병원을 다니고 있다는 단골 손님이 있다면 권씨는 직접 찾아가서 머리를 해주겠다는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풀잎미용실은 여타 동네 미용실과는 또 다르다. 단순히 젊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정도가 아니라, 방송사 아나운서들도 직접 찾아와 머리 세팅을 하고 가는 실력을 인정 받은 미용실이기도 하다.

미용실 목이 좋아 가게를 세를 두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권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10년 가게를 하다 보니 주변에서 세를 두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권씨는 “아니요, 난 내가 재미있게 하는데 여기서 지내면 사람들도 만나고 얼마나 재미있는데요”라고 말한다고 한다.

“나는 이 나이에도 매일 아침 7시30분에 일어나서 화장을 해. 컨디션이 좋으면 루즈도 바르곤 하지. 그런데 내가 살림만 하고 있으면 아침 일찍 일어나서 화장을 하겠어? 그러니까 사람은 일이 있으면 좋아.”

80세까지도 일을 계속 하고 싶다고 말하는 권씨의 포근한 얼굴이 깊은 여운을 남겨주고 있었다.

글·사진=조은애 기자 sincerely.cho@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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